119화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숨을 돌리기도 전에 다시 입술을 겹쳐 그녀의 숨을 빼앗으며 그녀의 목선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엘리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입을 맞췄다.
“아…”
그의 입술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뜨거운 손길이 닿을 때마다 엘리사는 움찔 떨며 예민하게 반응했다.
오랜만이어서인지 그 달콤한 접촉이 너무도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리하르트….”
그를 밀어내 멈추고 싶으면서도, 그를 더욱더 깊이 안고 싶은 이중적인 충동이 들끓었다.
엘리사는 저를 달뜨게 하는 이 감각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를 끌어 안았다.
리하르트는 제 거친 욕망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아프면, 말해.”
후회하지 말라더니, 정작 그는 조심스러웠다.
엘리사는 말과 행동이 다른 그의 아이러니함이 우스웠으나, 웃을 여유가 없었다.
곧이어 저를 덮쳐 오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엘리사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열기에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위험한 욕망이 일렁이는 그의 눈에 오직 제 모습만이 담겨 있었다.
이 순간, 이 세상에 오직 그와 자신 둘만이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엘리사.”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까스로 억누른 채 괴로운 듯한 그의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몹시 유혹적이었다.
동시에 그가 저를 소중히 대하기 위해 이 순간을 얼마나 인내하고 있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리사는 그의 단단한 등을 끌어안는 것으로 겨우 묶어 둔 그의 고삐를 풀었다.
이윽고 뜨거운 입술이 겹쳐 왔다.
그는 처음엔 마치 유리 공예품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그녀를 다루다가, 그녀가 제게 익숙해지자 귀신같이 눈치채고 거칠게 몰아세웠다.
그가 닿는 곳곳마다 열에 덴 것처럼 홧홧했다.
수차례 그 뜨거운 열기에 잠식된 엘리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까무룩 잠들었다.
*
리하르트는 그간 참아 온 욕망이 터진 듯, 그녀를 탐하고 또 탐했다.
그렇게 엘리사는 다음 날 한낮이 되어서야 그에게서 풀려났다.
그마저도 식을 줄 모르는 그를 또 한 차례 받아 낸 후에야 겨우겨우 풀려난 것이었다.
오늘은 리하르트, 하네스와 함께 율리아의 묘지를 찾아가기로 한 날이었다.
엘리사는 지난밤의 여파로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목욕을 마친 후, 드레스룸으로 들어섰다.
‘다시는…… 도발하지 말아야지.’
하여간, 적당히를 몰라.
엘리사는 저를 녹초로 만들고도 태연히 또 안으려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혔다.
“저, 마님.”
그때, 옆에서 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엘리사는 그 목소리를 듣고 번뜩상념에서 벗어났다.
“으응?”
“그, 목에 프릴 초커를 하시겠어요…?”
그렇게 묻는 앤의 시선이 엘리사의 목을 보지 못하고 땅으로 향해 있었다.
그에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앞에 놓인 전신 거울을 보고서야 한 박자 늦게 그 이유를 알아챘다.
그녀의 새하얀 목에 지난밤, 리하르트가 남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비단 목만이 아니라, 몸 곳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겨울이라 천만다행이었다.
엘리사는 붉어진 얼굴을 애써 식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게 좋겠다.”
앤은 엘리사의 목에 프릴 초커를 해서 리하르트가 새긴 흔적을 가려 주었다.
엘리사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침실로 나왔다.
침실에 이미 채비를 마친 리하르트가 하네스와 놀고 있었다.
하네스는 침대에 누워 뒤집기 연습중이었다.
파닥파닥, 통통한 팔과 다리가 분주히 움직였다.
“우아! 으뷰에! 우에으!”
요즘 부쩍 옹알이가 는 하네스는 뒤집기가 뜻대로 안 되어 심통이 났는지, 옆으로 누워 리하르트를 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쏟아 냈다.
리하르트는 웃으며 그런 하네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잘 안 돼, 하네스?”
“으뷰뷰!”
“좀 더 힘내 봐.”
그의 미소를 본 하녀들은 흠칫 놀랐다.
‘도련님 앞의 각하는 꼭 딴 사람 같단 말이지……’
매사에 서늘한 표정인 그가 웃는 모습은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엘리사의 앞에서도 다정히 웃긴 했지만, 그녀를 대할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엘리사는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두 남자의 곁으로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섰다.
“리하르~”
그런데 그에게 다가선 순간, 일시적으로 다리의 힘이 풀렸다.
리하르트는 비틀거리는 엘리사를 재빠르게 받아 안았다.
그 바람에 엘리사의 손이 그의 가슴팍에 와 닿았다.
두꺼운 겨울옷감 너머로도 선명히 느껴지는 그의 근육이, 저를 내려다 보는 그의 시선이 지난밤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그와 동시에 엘리사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네스가 태어난 이후 처음이라 그런가, 어쩐지 의식하게 돼…….’ 덩달아 가슴도 두근두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런 엘리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엘리사? 괜찮아?”
“어? 으응.”
엘리사는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무언가를 발견한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다시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목덜미를 가린 머리카락을 살짝 걷고 프릴 초커 위에 입술을 맞댔다.
얇은 프릴 위에 닿는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몸이 움찔 떨렸다.
그런 그녀의 귓가에 리하르트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 내 거라고 도장 찍어 놨는데 왜 가렸어?”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는 그 눈에는 지난밤 저를 몰아세우던 열기와 장난기가 공존하고 있었다.
그 눈빛에 굳어 있던 그때, 옆에서 하네스의 옹알이가 들려왔다.
“아우웅. 으아!”
그 목소리를 듣자, 주위에 하네스와 하녀들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엘리사는 빨개진 얼굴로 리하르트의 팔을 꼬집으며 그를 밀어냈다.
리하르트가 그런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으며 그녀를 놓아주던 그때였다.
“마, 마님!”
다급한 앤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가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앤을 비롯한 하녀들이 흥분한 표정으로 하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따라 하네스를 본 엘리 사와 리하르트는 한 박자 늦게 놀랐다.
“어머, 하네스?”
조금 전까지 누워서 바동거리고 있던 아이가 엎어져 있었다.
아직 머리를 가누는 것이 힘겨운지 자꾸 침대에 박으며 고꾸라지긴 했지만, 혼자 힘으로 완벽하게 뒤집기를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엘리사의 눈에 경탄과 아이를 향한 사랑이 차올랐다.
“오구오구, 내 새끼. 혼자서 뒤집었어요?”
“으아아.”
리하르트는 두 손을 꼬옥 말아쥔채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며 옹알이 하는 하네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갓 태어났을 땐 숨 쉬는 것조차 서투르던 아이가 몇 달 새 쑥쑥 자라 목을 가누고, 몸을 뒤집으며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익혀 나가는 것이 신기하고 기특했다.
“아직 머리가 무거운가 봐. 귀여 워.”
목을 꼿꼿이 들고 버티던 하네스의 머리가 자꾸만 침대에 박히자, 엘리 사가 하네스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 하네스의 뺨에 쪽쪽 입을 맞췄다.
“아이 예쁘다, 우리 아가. 잘했어, 하네스.”
“꺄우!”
하네스가 엎드려 있었던 탓에 턱이 온통 침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우리 아들은 천재가 틀림없어. 남들은 보통 백일 넘어야 뒤집는다는 데, 하네스는 아직 세 달도 안 됐는데 벌써 뒤집었잖아. 그치, 하네 스?”
“우웅.”
엘리사는 하네스가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성장한다는 사실에 잔뜩 흥분하여 말했다.
“하네스가 뭔가 해낼 때마다 하네 스의 이름으로 기부를 해야겠어. 그럼 우리 아들이 천재라는 것도 소문내고, 하네스의 이름으로 좋은 일도 하는 게 되니까.”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기부할 때마다 신문에 낼까.’
하네스의 천재성을 이 저택 내의 사람들만 알고 있는 게 아쉬웠다.
진지하게 고민하던 그때, 갑자기 등에서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에 리하르트가 멈칫했으나, 하네 스에게 정신이 팔린 엘리사는 눈치 채지 못했다.
다행히 통증은 더 커지지 않고 사라졌다.
“하네스, 우리 오늘은 외할머니를 뵈러 갈 거야.”
“아우으.”
“마님, 단장해 드릴게요.”
때마침 적당한 장신구와 화장품을 고른 하녀들이 엘리사를 화장대로 안내했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다시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주고 화장대로 향했다.
그러자 하네스가 아빠의 기색을 느낀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부?”
“괜찮아, 하네스.”
아직 어린 아들이 저를 걱정할 리 없었지만,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안심시키며 불안한 제 마음 역시 가라 앉혔다.
*
율리아의 묘는 신전 뒤쪽 언덕 위에 있었다.
에이든은 신전의 일로 동행하지 못했지만, 엘리사는 어렵지 않게 율리 아의 묘를 찾을 수 있었다.
언덕의 가장 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드리나무.
에이든은 그 나무 아래에 율리아를 묻었다.
어릴 적, 두 사람이 처음으로 만났던 장소였다.
“여기인 것 같아.”
엘리사는 꼭대기에 있는 아름드리 나무 앞에 멈춰 섰다.
하네스를 안고 그녀의 뒤를 따라올라오던 리하르트도 그녀의 옆에 멈춰 섰다.
시린 겨울바람이 두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아카로아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 보였다.
그 전경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에이든이 많고 많은 추억의 장소 중 왜 하필 이곳에 율리아를 묻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엄마.”
엘리사는 아름드리나무를 올려다보며 처음으로 ‘엄마’란 호칭을 불러 보았다.
하네스에겐 곧잘 스스로를 엄마라고 지칭하곤 했지만, 누군가를 ‘엄마’라고 부르는 건 어색했다.
하지만 기억엔 없어도, 그저 자신이 하네스를 사랑하는 만큼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애틋하고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해요.’
엘리사는 아름드리나무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엄마의 누명은 벗겨졌으니, 이제 그곳에서 편히 쉬세요.’
때마침 세찬 겨울바람이 나무를 스치고 지나갔다.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윙윙 스치는 바람이 마치 그녀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했다.
“아브으!”
바람 소리만이 울리는 침묵 속에서, 하네스가 제 목소리를 냈다.
마치 제 차례를 알고 있는 듯이.
엘리사는 피식 웃으며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던 하네스를 건네받았다.
“하네스, 우리 외할머니한테 인사하자.”
“으에?”
“할머니, 하네스예요. 처음 뵈어요.”
“브에! 으부부.”
“앞으로 자주 올게요, 해.”
“아브브.”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시키는 대로 열심히 옹알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웠다.
하네스 소개를 마친 엘리사가 이번엔 리하르트를 소개하기 위해 그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리하르트의 표정이 고통스럽다는 듯 일그러져 있었다.
“리하르트…?”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그의 등에서 검은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리하르트는 다가오려는 엘리사를 피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 엘리사.”
그 순간, 그의 목에 걸려 있던 에이든의 펜던트가 파삭-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