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14. 최초의 왕, 제네이드
오후 예배를 마친 에이든은 서둘러 별관으로 왔다.
별관에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급한 일이라니, 무슨 일-”
다급히 별관으로 들어서던 에이든은 리하르트에게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을 보고 말을 멈췄다.
“갑자기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바쁘실 텐데 송구합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검은 기운이….”
에이든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미안함을 내비쳤고, 엘리사는 대신 답했다.
리하르트의 검은 기운을 잠시 살펴보던 에이든은 팔을 걷고 나섰다.
“…우선 정화부터 해야겠구나.”
리하르트는 상의를 벗고 의자에 앉았다.
에이든은 리하르트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 옆으로 엘리사의 손도 얹어졌다.
에이든과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그들의 시선에 결의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저도 같이 할게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에이든을 찾아올 순 없다.
엘리사는 이 기회에 정화의 능력을 사용하는 법도 배울 생각이었다.
그런 엘리사의 생각을 읽은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물의 능력을 쓸 때는 네 밖으로 분출한다고 생각했다면, 이번엔 각하의 몸 안에 네 마나를 모아 물을 생성한다고 생각해 보렴.”
엘리사는 에이든의 말대로 리하르트의 등에 손을 얹은 후, 눈을 감고 자신의 힘을 리하르트에게 주입하는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힘을 흘려보내면 된단다.”
엘리사는 에이든의 말대로 자신의 힘을 리하르트의 안으로 흘려보냈다.
합쳐진 에이든의 힘과 엘리사의 힘이 리하르트의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검은 기운이 씻겨 내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저 일시적으로 가라앉았을 뿐, 아직 그의 안에 남아 있는 검은 기운이 보였다.
“왜 정화가 되지 않는 거예요?”
“이제 네 눈에도 보이는구나.”
에이든이 말했다.
처음, 리하르트가 검은 힘에 사로잡혔을 때는 엘리사의 눈에 그 기운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정화의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며 마나의 흐름을 읽는 법을 익혔기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어를 만나고 돌아온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그자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얼버무렸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시선을 피하며 설명했다.
“그땐 네가 걱정할까 봐 말할 수가 없었어. 네 안정이 최우선이었으니까.”
당시 엘리사는 조산기가 있어 심신이 모두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그에 별다른 의문을 가질 여력이 없었다.
“숨겨서 미안해, 엘리사.”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손을 끌어와 어루만지며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이번 일로 그녀에게 미움을 받을까 초조해하는 행동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엘리사는 그를 나무라지 못했다.
‘내가 리하르트였어도 그 상황에선이 사실을 숨겼겠지……….’
그때, 리하르트의 기운을 살피던 에이든이 입을 열었다.
“만약 후작의 말대로 이 힘이 각하본인의 힘이라면, 정화되지 않는 게 이해가 되는군요.”
“리하르트의 힘이면 정화가 안 되는 거예요?”
“정화라는 건, 물로 더러운 물건을 씻는 것과 같거든. 그 자체의 근본적인 기운은 씻어 내기 힘들단다.”
에이든은 두 사람이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덧붙였다.
“검은 물감이 묻은 물건은 씻어 낼수 있어도, 검은 물감 그 자체를 하얗게 만들어 줄 순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럼 정화할 수 없는 거네요?”
“물론 검은 물감에 계속 물을 섞다보면 물에 가깝게 희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영혼을 건드리는 일이야.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정화를 하다간 리하르트가 죽을 수도 있다니.
그저 가정일 뿐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엘리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에이든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에이든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검은 기운이 점점 더 세지고 있어. 지금까진 엘리사 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기운은 잠재울 수 있었지만, 이젠 주기적으로 정화를 해야 할 거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당장에야 정화를 하면서 버틸 수 있겠지만, 점차 기운이 거세지고 있다는 건 머지않아 정화로도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니까.
그 전에 대책을 찾아야 했다.
엘리사는 다급한 표정으로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왜 네게 이런 힘이 있는 거야 ……? 이 힘은 뭔데? 후작이 다른 얘기는 안 했어?”
“그자는 신의 뜻이라고만………”
레이모어가 한 말을 전하려던 리하르트는 불현듯,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 말을 믿기 힘드시다면, 진리의 탑으로 가십시오. 그곳에 당신이 찾는 답이 있을 테니.’
리하르트는 하던 말을 끊고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진리의 탑.”
“진리의 탑………?”
“그곳에 우리가 찾는 답이 있을 거야.”
설령 그것이 레이모어의 함정이라고 해도, 지금은 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
일시적이나마 검은 기운을 정화한 후, 두 사람은 공작저로 돌아왔다.
하네스를 유모와 하녀들에게 맡기고 돌아온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엘리사, 난 이번 일이 해결될 때까진 별채에서 지낼게.”
“싫어.”
엘리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이대로 가 버리기라도 할까 그의 팔을 꼭 붙잡은 그녀의 손이 애처로웠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내겐 너랑 하네스의 안전이 최우선이야.”
“너 두고 가지 말라며.”
“엘리사, 그건-”
“그리고 펜던트도 있으니까. 이것만 있으면 바로 대처할 수 있어.”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목에 걸린 정화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일전에 에이든이 만들어 주었던 펜던트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펜던트는 엘리사가 그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게 걱정이라면 몇 번이고 깨져도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 줄 테니까… 같이 있어. 내 옆에. 응?”
엘리사는 그의 펜던트를 만지던 손을 올려 그의 뺨을 감싸 쥐고 저와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에게 거짓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난 대답을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엘리사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단호한 눈으로 말했다.
“우린 가족이잖아.”
“…….”
“나는 네 아내니까, 너와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함께 할 거야. 그게 기쁜 일이든, 힘든 일이든.”
몬스터들이 신전을 습격했던 건국제 직후, 그와 떨어져 있는 시간 동안 깨달았다.
서로 떨어져 지내며 불안해하는 것보다는, 곁에 있으며 그 불안을 함께 나누는 것이 낫다고.
‘이제 그 어떤 일이든 너 혼자 짊어지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런 건 지난 전쟁 한 번으로 족했다.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체격 차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안긴 꼴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안든, 안기는, 그가 절대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잠시 멈칫했으나, 결국 그녀의 예상대로 그녀를 안아 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엘리사.”
귓가에 울리는 다정한 그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고개만 반짝 들었다.
혹여나 그새 그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로.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고 속삭였다.
“키스해 주면 옆에 있을게.”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부끄러워하거나, 꼬집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엘리사는 순순히 입을 맞춰 왔다.
맞닿은 입술로, 느껴지는 숨결로 저를 향한 그녀의 애틋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를 걱정시키고 속 썩인 것 같아 미안한 한편으로, 그 감정들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기뻤다.
엘리사는 가볍게 입을 맞추고 됐다.
아니, 떼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술을 떼기가 무섭게 리하르트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 당겨 안으며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갈급한 듯 절박하게 겹쳐 오는 그의 입맞춤에 놀라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이내 눈을 감고 그를 받아들였다.
서로를 갈망하는 호흡이 가쁘게 얽혔다.
오랜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 물을 찾듯, 엘리사가 뱉는 숨을 모조리들이켜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숨이 가빠진 것을 눈치채고 살짝 입술을 뗐다.
그러나 찰나의 시간마저 아까운 듯, 그의 시선은 엘리사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아….”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기다리다, 그녀가 숨을 한번 들이쉴 때마다 한 번씩 입을 맞췄다.
그러다 엘리사의 호흡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시 그녀를 삼키며 안아들었다.
그러자 엘리사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것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리하르트는 곧장 침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