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두 사람은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한 채 서로의 온기를 탐했다.
엘리사는 새벽 무렵까지 그의 열기에 시달리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엘리사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엘리사의 새하얀 어깨를 이불로 꼼꼼히 덮어주었다.
벽난로의 열기로 방 안이 따뜻하긴 했지만, 땀을 잔뜩 흘린 그녀에겐 그마저도 서늘하게 느껴질지 모를 일이었다.
엘리사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정리해 주고 있던 그때였다.
“리하르트……….”
엘리사가 잠결에 그의 이름을 웅얼거리며 그의 온기를 찾아 끌어안았다.
꿈속에서조차 그를 놓아주기 싫은듯이.
그와 동시에 그의 손길이 멈칫했다.
와 닿는 온기에 심장이 쿵쿵, 거세게 달음박질하기 시작했다.
혹여나 엘리사가 깨기라도 할까 굳어 있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숨소리가 다시 규칙적으로 돌아오자, 그제야 안도했다.
하지만 제 품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온기가 저를 자극해 난감했다.
“…하아.”
잠시 침음을 삼키던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뒤척이는 바람에 드러난 그녀의 몸을 다시 이불로 감싸고, 제 품에 보듬어 안았다.
엘리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무방비한 얼굴이 저를 얼마나 자극하는 줄은 모른 채로.
그 모습이 얄미우면서도 사랑스러웠다.
그때, 문득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네 아내니까, 너와 관련된 일은 무엇이든 함께 할 거야. 그게 기쁜 일이든, 힘든 일이든.”
나라고 이런 널 떼어 놓고 싶을까.
보고 있어도 애틋하고, 닿아 있어도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너인데.
잠든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인정했다.
그 어떤 위험도 그녀를 향한 자신의 감정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리하르트는 졌다는 듯 엘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네 곁에 있을게, 엘리사.”
“……,”
“사랑해.”
그 순간, 엘리사의 눈꺼풀이 움찔떨리더니 이윽고 그녀가 눈을 떴다.
아직 잠이 덜 깬 듯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이내 눈웃음을 치며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돌아온 대답에, 리하르트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잠시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다가가 입술을 겹쳤다.
잠기운을 이기지 못한 채 느릿하게 깜빡이던 엘리사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또다시 긴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
“으음….”
방 안을 환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느낀 엘리사는 무겁게 닫혀 있던 눈을 떴다.
눈앞엔 늘 그랬듯 흐트러짐 없이 잘난 얼굴로 잠든 리하르트가 있었다.
‘뉘 집 남편인지 아침에도 잘생겼네…… 가 아니라, 아침?’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엘리사는 시계를 보고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하네스!’
이른 새벽까지 그에게 시달리다 겨우 잠든 탓에 온몸이 뻐근하고 피곤했지만, 하네스 앞에선 그 모든 것이 잊혔다.
하네스는 여느 귀족 가문의 아이들이 그렇듯 젖유모가 있었지만, 엘리 사는 가급적 직접 수유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네스와 가깝게 시간을 보낼수록 아이와 유대가 더 생기는 것 같았고, 엘리사 역시 그 시간에 엄마가 되었다는 행복감을 느꼈다.
유모가 있으니 걱정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아이와의 약속을 어긴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서둘러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저를 끌어안은 리하르트의 팔이 문제였다.
‘겨우 팔 한 짝이 왜 이렇게 무거워? 무슨 돌덩이로 만들었나…….’
엘리사는 낑낑거리며 그의 팔을 계우 걷어 내고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급한 대로 베드 가운을 걸쳤다.
그때, 뒤에서 불쑥 나타난 온기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와 동시에 금방 잠에서 깬 듯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어디 가?”
리하르트는 그렇게 물으며 엘리사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가뜩이나 예민해진 그녀의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 감각에 신경이 곤두선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하네스한테…….”
“이따 가.”
그의 입술이 엘리사의 목덜미에 쪽 닿았다. 그리고 가운을 여미는 엘리 사의 손을 감싸 쥐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그녀의 행동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했다.
리하르트는 그 틈을 타 그녀의 가운을 살짝 당기고 드러난 새하얀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는 한 번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녀의 어깨에 계속해서 입을 맞췄다.
“아….”
그 아찔한 자극이 닿을 때마다 엘리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저를 감싼 그의 온기가, 와 닿는 숨결이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쪽쪽, 귓가에 울리는 마찰음마저 지독히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엘리사는 그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 하자고? 밤새 그렇게 해놓고………?’
이미 밤새 그에게 시달린 탓에 녹초가 될 지경이었다.
엘리사는 그에게 안긴 몸을 비틀며 바르작거렸다.
“리하르트, 그만…….”
“널 안고 있으면 그 기운이 사라지는 것 같아.”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엘리사는 새치름한 눈으로 그를 슬쩍 돌아보았다.
엘리사가 순순히 제 말에 따라 줄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리하르트는 이번엔 엘리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네 옆에 있으라고 했잖아.”
그 모습이 꼭 어리광부리는 아이 같았다.
그런데도, 그런 그의 모습이 오히려 귀여워 보인다니.
엘리사가 저를 밀어내지 않고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자, 리하르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엘리사의 입술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욕망이 일렁이는 눈으로 그녀를 집어삼킬 듯 바라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게서 멀어질 생각하지 마.”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켰다.
밤새 탐하고도 부족하다는 듯 파고드는 그의 입맞춤에, 엘리사는 졌다는 듯 눈을 감았다.
이윽고 등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빈틈 하나 없이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의 발치에 따사로운 아침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
“하네스.”
엘리사는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리하르트와 함께 하네스를 보러 올 수 있었다.
유모와 하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심히 뒤집기 연습을 하고 있던 하네스는 엘리사를 보자 갑자기 배가 고픈 게 생각난 건지, 울음을 터트렸다.
“으에!”
“미안해, 하네스, 오늘은 엄마가 늦었지?”
엘리사는 유모에게서 하네스를 받아 안으며 사과했다.
그녀는 별말 하지 않았으나, 그녀를 늦게 한 장본인은 내심 뜨끔하며 하네스의 조그마한 손을 잡았다.
유모와 하녀들은 방을 나서기 전, 서로 앞다퉈 하네스의 성장 소식을 전했다.
“아 참, 도련님께서 아침에 일어나셔서 또 뒤집기에 성공하셨어요.”
“그리고 아침에 깨서 울지도 않고 얼마나 의젓하신지 몰라요.”
“그래? 우리 아가, 오늘 또 뒤집기 성공했어요? 이제 잘하네. 아구, 기특해.”
엘리사는 하네스에게 사랑을 담아 연신 입을 맞췄다.
하네스는 엄마의 애정 표현에 잠시 울음을 그치는 듯했으나, 이내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젖을 먹을 시간이었다.
유모와 하녀들이 물러가고, 엘리사는 칭얼거리는 아이에게 젖을 물렸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뚝 그치고 먹는 데 집중했다.
리하르트는 하네스의 조그마한 손에 제 손가락을 끼워 넣고 보드라운 손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젖을 먹는 하네스를 흔흔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엘리사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리하르트, 우리 같이 진리의 탑에 가자.”
리하르트는 결의에 찬 눈으로 말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데 하네스는?”
“하네스는….”
두 사람은 정신없이 젖을 먹고 있는 하네스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이곳 아카로아에서 진리의 탑까지는 말을 타고 가면 나흘, 마차를 타고 가면 그보다 조금 더 걸렸다.
리하르트의 기운이 더 거세질 때를 대비해 엘리사가 가까이 있는 것이 좋았다.
하지만 아직 백 일도 안 지난 하네스에겐 조금 벅찬 거리였다.
그렇다고 하네스만 저택에 남겨 두고 가자니, 그것도 마음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고민하던 그때, 하네스가 젖을 먹다 말고 갑자기 입을 뗐다.
“아브아? 으에에.”
“응?”
“아부부! 으우아!”
엄마 아빠에게 열심히 옹알거리는 그 모습이 꼭,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나도 같이 가야지!‘라고 대답하는 같은 건 기분 탓일까.
제 나름의 의견을 열심히 피력한 하네스는 다시 젖 먹기에 집중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그런 하네스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다, 마침내 웃음을 터트리며 인정했다.
두 사람의 조그맣고 약한 이 아이도 이제 ‘가족’이라는 것을.
*
며칠 후, 진리의 탑으로 떠날 채비가 끝났다.
준비를 마친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하네스의 방으로 왔다.
엘리사는 외출 준비를 마친 하네스를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리 아가, 오늘 엄청 귀여운 옷입었네? 아이, 예뻐라.”
하네스는 양털로 만든 따뜻한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복슬복슬한 그 모습이 꼭 양 인형 같았다.
게다가 아직 걷지도 못하는 발에 신겨진 털 신발 역시 여간 잔망스러운 게 아니었다.
엘리사는 하네스의 뺨에 입술을 부비며 물었다.
“하네스, 우리 이제 갈까?”
“으꺄!”
하네스도 오늘이 여행 가는 날인걸 아는지, 평소보다 기분도 몸 상태도 좋아 보였다.
때마침 그레이슨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각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어깨를 안고 저택 중앙 홀로 내려왔다.
저택의 사용인들과 기사들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주인을 배웅하기 위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레이슨은 마차 앞에 선 두 사람에게 대표로 인사를 건넸다.
“이곳 걱정은 마시고,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의 인사에 맞추어 기사들과 사용 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엘리사는 그들의 인사에 빙긋 웃으며 화답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으부부!”
리하르트는 눈인사로, 하네스는 옹알이로 각자 인사를 하고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진리의 탑으로 향하는 마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