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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22화 (122/164)

122화

황제는 간만에 레이모어를 황궁으로 불렀다.

리하르트가 레이모어로부터 선대 황제 독살의 증인인 하녀를 빼돌리고, 엘리사가 율리아의 누명을 벗긴 이후 처음이었다.

레이모어는 불안한 마음을 안고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황제는 레이모어가 선황제를 독살한 하녀를 데리고 있었단 걸 알게 된 이후, 레이모어를 황궁으로 부르지 않았다.

레이모어는 황제가 당장 자신을 불러 죄를 물을 것이라 생각했다.

초조한 기다림 속에 사흘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그제야 레이모어는 깨달았다.

‘조용히, 썩은 부위를 잘라 내듯 나를 도려 낼 생각이구나.’

그에게 왜 하녀를 죽이지 않았냐, 공개적으로 죄를 묻기엔 위험했으니까.

그것을 드러내는 건, 황제의 아킬레스건을 드러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애초에 황제의 총애와 권력이 목표가 아닌 레이모어의 입장에선 황제가 저를 잘라 내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이 계획한 일이 어그러졌다는 게 큰 문제였다.

그런데 레이모어가 다른 방안을 강구하던 찰나, 황제가 저를 불렀다.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각하, 도착했습니다.”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추측하는 사이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레이모어는 시종장의 안내를 받으며 황제궁 후원에 있는 온실로 향했다.

황제는 늘 그곳에서 차를 마시며 간단한 정무를 보곤 했었다.

막 온실에서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안에서 황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종장이 아뢰었다.

“폐하, 펠리스 후작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지.”

의아해하며 온실 안으로 들어서던 레이모어는 황제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아스트리드 후작.

평소 황제의 최측근 자리를 노리며 황제에게 아부와 아첨을 일삼던 자였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인사하지, 레이모어. 이미 서로 익히 알고 있겠지만.”

레이모어는 아스트리드 후작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을 고작 저자에게 인사시키려고 부른 황제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신뢰감 있고 영특하지만, 아직 그 대의 연륜에는 못 미치는 친구일세.

많이 가르쳐 주게나.”

그렇게 말하며 레이모어를 바라보는 황제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레이모어의 예상대로 그를 도려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를 자신의 대체품으로 세우고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스트리드 후작이 교활한 미소를 지으며 먼저 레이모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니 더욱 반갑습니다, 펠리스 후작. 앞으로 많은 조언과 가르침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지.”

레이모어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의 인사를 받은 후, 황제를 돌아보았다.

“폐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레이모어가 그렇게 말하면, 황제는 늘 주위를 물리고 그와 독대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전에 아스트리드 후작과 먼저하던 이야기가 있어서. 잠시 자리를 피해 주지, 펠리스 후작.”

황제가 레이모어를 지칭하는 호칭이 바뀌었다.

그 호칭의 의미는 명확했다.

옆에 있던 아스트리드 후작이 과장되게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라서요. 금방 자리를 피해 드릴 테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레이모어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감히 황명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레이모어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온실을 나왔다.

닫히는 온실 문 너머로 황제와 아스트리드 후작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리드 후작의 말과 달리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임이 명백했다.

레이모어는 이를 으득 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후원 안쪽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 상황을 이렇게 꼬아놓은 두 사람이 떠올랐다.

엘리사와 리하르트.

‘새파랗게 어린 왕과 그의 계집에게 크게 한 방 먹었군.’

둘은 자신에게서 황제의 아킬레스건을 빼돌려 율리아의 누명을 벗김과 동시에, 황제와 자신의 사이를 이간질해 떨어트려 놓았다.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황제와 자신의 세력이 둘로 분산되어 약해질 터였다.

이는 황가와 대립하는 루벨린과 세리어트엔 큰 이득일 것이다.

참으로 영특하지 않은가.

“그래, 이대로 쉽게 끝난다면 재미가 없겠지.”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발버둥 치고, 결국 절망해야지.

레이모어는 광기에 휩싸인 눈을 번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고요한 황궁의 후원에 그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만이 울렸다.

*

나흘 전, 진리의 탑으로 향한 루벨린 공작가의 일행은 작은 마을 외곽에 있는 별장에 도착했다.

오늘 밤, 그들이 묵을 숙소였다.

보통 귀족들은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지나가는 길에 있는 귀족 영지에 들러 하루씩 묵어 가곤 했다.

다음엔 자신이 상대방의 영지를 방문할 수도 있기에, 서로 안면이 없어도 흔쾌히 하룻밤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 밤 묵을 예정이었던 귀족가의 본성에 문제가 있었다.

지난밤에 영주님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있습니다. 저희는 모셔도 상관없으나, 아직 어린 소공께 부정이 탈까 염려가 되는군요. 외곽에 저희 별장이 있으니, 그곳에서 묵으심이 어떠신지요?’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그들의 제안대로 별장에 머물기로 했다.

다만 별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두 사람의 방문이 갑작스러웠기에, 오랜 시간 비워 둔 별장의 정리가 끝나지 않은 것이었다.

“마님, 저희는 정리를 좀 도와주고 올게요.”

앤과 하녀들은 얌전히 앉아 기다리 기가 지겨웠는지, 별장 정리를 도와주러 갔다.

“주변에 다른 위험 요소는 없는지 정찰 다녀오겠습니다.”

톰슨과 기사들도 주위를 살펴보러 자리를 떴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함께 마차 안에서 정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주변을 좀 둘러보고 싶었지만, 하네스가 제 품에 곤히 잠들어 있어 나갈 수가 없었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안은 채 난생처음 보는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별장 뒤쪽에 숲이 있었고, 그 옆엔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평야의 끝, 바다와 맞닿는 곳엔 거대한 탑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진리의 탑이구나…….’

그때, 품에서 하네스가 꼼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품 안의 아이를 내려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잠에서 깬 아이가 손가락을 쭙쭙 빨고 있었다.

“하네스, 엄마랑 아빠랑 바깥 구경하러 갈까?”

“우웅….”

하네스는 하품을 했지만, 잠은 깬듯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내가 안을게. 나가자.”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서 하네스를 받아 안고 마차 밖으로 나왔다.

마차 밖으로 나온 엘리사는 눈앞의 풍경에 정신을 빼앗겼다.

주홍빛 노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거대한 탑이 그 아름다운 풍경 위에 홀로 우뚝 서 있었다.

마차 창문 너머로 보던 광경은 실제 눈으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리하르트는 진리의 탑을 유심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아마 내일 저녁쯤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멀뚱멀뚱 손을 빨고 있는 하네스에게 말했다.

“하네스, 저기 탑 보여? 우리 지금 저기 가는 거야. 저기 가면 바다도 볼 수 있어. 아빠가 내일쯤 도착할 거 같대.”

“우에으.”

두 사람은 하네스를 안고 바로 옆에 있는 숲으로 들어섰다.

온통 새하얀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숲은 고요했다.

“이건 자작나무야, 하네스, 다른 나나무랑 다르게 엄청 하얗지?”

“오옹.”

엘리사는 하네스에게 나무를 소개했다.

물론 아이가 알아듣진 못하겠지만, 평소에 많은 이야기를 해 줘야 아이도 부모와 교감을 하며 언어 능력을 키운다고 들어서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엘리사는 꽃을 발견했다.

“이 겨울에 꽃이… 어?”

새하얀 눈송이가 뭉쳐진 것 같은 모양의 꽃이었다.

루벨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었다.

그 꽃을 본 엘리사는 루벨린 영지를 떠올렸다.

사시사철 서늘하지만, 사람들의 온기가 넘치는 곳.

자신이 반평생 사랑하고 이끌어 온 마음의 고향.

그리고, 리하르트와 자신이 처음으로 만난 운명의 땅.

엘리사는 문득 하네스가 아카로아에서 태어나 아직 루벨린에 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아이에게 설명했다.

“하네스, 이 꽃은 아빠의 고향에 많이 피는 꽃이야.”

“으에?”

“거기엔 하네스를 좋아할 사람들이 많아.”

하네스는 엘리사의 설명을 듣는 둥마는 둥, 꽃을 만지려 손을 바동거렸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입으로 끌어가는 하네스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그런 하네스를 보고 피식 웃으며 엘리사에게 말했다.

“이번 일이 끝나면 같이 루벨린에 가자.”

“좋아.”

엘리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네스에게 또 다른 것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문제가 생겨 이 여행길에 오르게 된 것이지만, 눈앞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난 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스산한 바람이 세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엘리사와 하네스는 느끼지 못했으나, 리하르트는 그 바람에서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엘리사. 뒤로 물러나.”

심상치 않은 그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들었다.

리하르트는 숲 너머를 보며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리사가 그에 의아해하던 그때, 숲의 어둠 사이로 수많은 기척이 느껴지더니 이윽고 몬스터들이 대거등장했다.

세 가족을 바라보는 몬스터들의 눈빛이 흉흉한 붉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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