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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24화 (124/164)

124화

브랜든은 하네스의 눈웃음을 멍하니 바라보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고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크흠! 크흠!”

“할아버지.”

헤일리가 간절한 눈빛으로 브랜든을 부르자, 브랜든은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크흠! 다시 생각해 보니, 아직 어린 소가주님을 밖에 세워 두는 것은 사람으로서 못 할 짓이군요. 다만, 도서관 출입은 절대 안 됩니다.”

“네. 명심할게요.”

덩달아 긴장하고 있던 엘리사는 그 새 태도가 급변한 브랜든의 모습에 웃으며 대답했다.

하네스 역시 엄마와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는지, 꺄르르 웃으며 손을 쭙쭙 빨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톰슨과 기사들은 곤란할 리하르트와 엘리사를 위해 선수 쳤다.

“각하, 저희는 막사에서 자도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전쟁 7년을 막사에서 잤는데, 까짓 며칠 정도야.”

“그럼요. 전쟁터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죠.”

“맞습니다. 저희 평생에 언제 또 이런 평화로운 바다를 보겠습니까?

염려 마세요.”

그러나 리하르트는 먼 길 오느라 고단했을 부하들이 신경 쓰였다.

그는 브랜든을 설득하려 시도했다.

“내 부하들을 들여보내 준다면, 경들이 밤에도 학문에 열중할 수 있도록 루벨린에서 발광석을 지원하겠소. 물론 낮엔 저들이 탑에서 나가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지.”

“밤엔 저희도 자야 합니다.”

브랜든은 거절의 의사를 내비쳤으나, 엘리사는 그가 대답하기 전 잠시 망설이던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럼 동대륙의 고서들은 어떠세요?”

엘리사의 말에 브랜든의 눈빛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바다 건너 미지의 대륙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된 서적은 언어학적으로도, 문화학적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드넓은 바다 건너의 서적인 만큼 구하기가 어려워 상당한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엘리사는 브랜든이 동요한 틈을 놓치지 않고 확실하게 밀어붙였다.

“발광석과 동대륙의 고서를 지원해 드릴게요.”

그러자 외부인에게 깐깐하게 굴던 브랜든의 기색의 한층 누그러졌다.

그는 못 이기는 척 답했다.

“크흠! 두 분께서 그리 간곡히 부탁하시니, 기사분들의 출입을 허락하겠습니다. 다만 소란이 일어난다면 그땐 예외 없을 겁니다.”

“그럼요. 물론, 우리 기사들은 점잖고 예의를 아는 신사들이라 그럴 일은 없겠지만요.”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여 브랜든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기사들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기분이 상했을 루벨린의 기사들을 다독였다.

그리고 기사들에 대한 믿음을 내비치며 그들이 자신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책임감을 심어 주었다.

기사들은 자신들을 향한 엘리사의 기대에 부합하기 위해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다짐했다.

“루벨린의 명예를 걸고, 대학자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엘리사는 기사들의 다짐에 흡족해 하며 이쪽에서도 한 가지 조건을 내 걸었다.

“다만 한 가지, 대학자와 학자들의 혜안을 빌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동대륙의 서적에 적힌 정보는 루벨린과 세리어트에 독점적으로 공유해 주셨으면 합니다.”

브랜든은 엘리사의 요구에 내심 감탄했다.

일반 사람들은 동대륙의 언어를 해석할 수 없다.

제아무리 귀중한 책이어도 읽을 수 없다면 적힌 정보는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법.

엘리사는 그 정보의 힘을 알고, 그것을 발 빠르게 독점하려는 계획인 것이다.

진리의 탑의 학자들에게 대가를 지불하면서, 자신도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끝없는 지식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는 브랜든으로선 손해 볼 것이 없는 제안이었다.

‘세리어트는 유능한 가주를 얻었군.’

게다가 엘리사는 자신의 깐깐하고 매몰찬 말에도 부드럽고 능수능란하게 응수했다.

조금이라도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권력으로 해결하려 드는 여타 귀족들과는 달랐다.

그는 마침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루벨린과 세리어트에 최우선으로 정보를 제공하겠다 약조드리겠습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브랜든은 먼저 탑 안으로 들어서고, 헤일리가 그 뒤에서 리하르트와 엘리사를 안내했다.

루벨린의 하인들과 기사들도 그들의 뒤를 따라 탑 안으로 들어섰다.

얼마간 계단을 올라가자,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거대한 탑의 양쪽 벽에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 있었고, 뻥 뚫린 중앙에 사람의 키만 하면서 나무 상자처럼 생긴 것이 놓여 있었다.

‘생긴 모양이 꼭……… 엘리베이터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브랜든과 헤일리는 그 상자 쪽으로 다가갔다.

엘리사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이건 무엇이죠?”

“아, 이건 마나로 움직이는 도르래같은 거예요.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이나 아이들은 이걸 타고 탑을 오르내리죠.”

“아하…….”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힘들어서, 에스더 가문의 초대 가주셨던 라르딘 님께서 탑의 사람들을 위해 만드신 거래요.”

엘리사의 예상대로 ‘엘리베이터’와 비슷한 것인 셈이었다.

엘리사는 그에 의문을 품었다.

“이런 기술이 있는데, 왜 탑밖엔 알려지지 않았나요?”

“아직 이 기술의 비밀을 풀지 못했으니까요.”

브랜든은 헤일리 대신 대답했다.

그리고 탑 꼭대기에 매달려 있는, 푸른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돌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 도르래는 라르딘 님의 마나를 빚은 마정석으로 만든 겁니다. 이 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정확히기억하고 수행하지요. 무려 수천 년 동안이나.”

“돌이 기억을 한다고요?”

“예. 라르딘 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도르래를 만들어 주시며 숙제를 내셨습니다. ‘이 도르래가 움직이는 알고리즘의 비밀을 풀고 원리를 알게 되면, 한층 더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그럼 아직 그 원리를 풀지 못하신 건가요?”

“아뇨, 수천 년에 걸쳐 그 비밀과 원리는 알아냈습니다. 다만 아직 완벽히 적용하는 법을 찾아내지 못했을 뿐이지요.”

“아하……”

“얼마 전부터 그 원리를 적용한 마도구들을 만들고 있으니, 곧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먼저 헤일리와 엘리사, 리하르트, 하네스, 아가일이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승강기에 오르자, 브랜든이 승강기 한쪽에 달린 줄을 당겼다.

그러자 여섯 사람이 탄 승강기가 서서히 층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내심 불안했던 것과 달리, 승강기는 안정적으로 층을 올랐다.

‘진짜 엘리베이터랑 다를 바 없잖아?’

그 모습을 신기한 듯 지켜보던 엘리사는 승강기에서 내리자마자 이야기를 꺼냈다.

“기술이 완성될 때까지 후원하고 싶은데, 어떠세요?”

“저는 이 기술을 누군가에게 독점적으로 팔 생각 없습니다. 생활에 가까운 기술인 만큼,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 기술의 수혜를 누리고 살수 있는 방향을 모색할 생각입니다.”

브랜든은 엘리사가 이 기술을 독점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거절했으나, 엘리사의 반응은 달랐다.

“그래서 더 후원하고 싶어졌어요.”

“예?”

“저는 이 기술을 독점할 생각이 없어요. 대학자님의 말대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이 기술의 수혜를 누리고 살아야 해요. 저는 그 뜻깊은 일에 마음을 보태고 싶을 뿐이고요.”

엘리사의 의도를 멋대로 곡해한 브랜든은 멍하니 엘리사를 바라보다, 그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했다.

그러고는 헤일리에게 지시했다.

“헤일리. 귀빈들이 머무를 곳으로 안내해 드려라.”

“네, 할아버지.”

“그럼 편히 쉬십시오.”

브랜든은 다시 승강기의 줄을 당겨 올라가고, 헤일리가 방으로 안내했다.

브랜든의 무례에 괜스레 저가 멋쩍어진 아가일은 엘리사의 곁으로 슬쩍 다가서며 말했다.

“스승님께선 본디 사람에게 박하십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기피하고 정을 주지 않으시는 분이죠. 마님께만 그러시는 건 아니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않으셔도-”

“아가일 경.”

엘리사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아가일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 눈짓으로 앞서가는 헤일리를 가리켰다.

아가일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브랜든의 손녀인 헤일리의 앞에서 그에 대해 험담하는 건 해선 안 될 행동이었다.

“…송구합니다.”

아가일은 황급히 입을 다물고 헤일리의 눈치를 살폈다.

앞서가는 헤일리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때마침 방 앞에 도착한 헤일리가 뒤를 돌아보았다.

“두 분 각하와 소공작께서 머무실 곳은 이 방이에요.”

“고마워요, 헤일리 양.”

“그… 탑에 직접 찾아오는 귀빈들은 없어서, 귀빈용 방이 따로 없답니다. 그리고 갓난아이들도 없어서 요람도 구비되어 있지 않고요.

귀하신 분들을 이런 누추한 곳에 모시게 되어 송구스럽네요.”

헤일리의 사과에 엘리사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탑에 외부인을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이었는지 알아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니 괘념치 말아요.”

엘리사의 말에 헤일리는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제 방은 여기서 다섯 번째 방이에요.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찾아주세요.”

헤일리가 아가일과 함께 멀어지고,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방으로 들어왔다.

작고 아담한 방에 1인용 침대 두개와 책상이 마주 보는 구도로 놓여 있었다.

“이잉….”

그새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하네스가 잠결에 칭얼거리다, 이내 손가락을 빨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긴 여정 동안 고생했어, 하네스.”

엘리사는 잠든 하네스를 토닥이다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하품을 하는 그녀의 눈에도 졸음기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물었다.

“우리도 일찍 잘까?”

“그게 좋겠어.”

두 사람은 하녀들이 가져다준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곧장 잠자리에 들었다.

어느덧 창문 너머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다음 날, 엘리사는 철썩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으음.….”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볕이 쨍한 걸보니, 꽤 오랫동안 잠을 잔 듯했다.

하네스!’

엘리사는 하네스에게 수유할 시간이 지난 걸 깨닫고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품에 안겨 있어야 할 아이가 사라져 있었다.

“하네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반대편 침대를 돌아보았다.

리하르트의 침대 역시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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