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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25화 (125/164)

125화

‘어디 간 거지?’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하네스를 찾아 방을 나왔다.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방 앞을 지키고 있던 앤과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마님?”

“응, 좋은 아침이야. 혹시 각하랑하네스 못 봤니?”

“각하는 아침에 도련님이랑 잠깐 놀아 주시다가 유모한테 맡기시고 도서관으로 가셨어요. 마님께서 너무 피곤하신 것 같다고 깨우지 말라고 하셨고요.”

“아………. 그랬구나.”

일상 속에서 당연한 듯이 느껴지는 그의 배려를 문득 깨달을 때면 가슴 께가 간질간질해진다.

어서 그에게 가 얼굴을 보고, 입맞춤으로 아침 인사를 하고, 홀로 해결책을 찾고 있을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앤이 당연한 수순처럼 엘리사에게 물었다.

“물그릇을 가져올까요?”

“응. 부탁해.”

앤은 엘리사의 명을 받고 세숫물을 담을 물그릇을 받으러 사라졌다.

엘리사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멀리서 헤일리가 다가왔다.

간밤에 평안하셨어요, 각하?”

“아, 헤일리 양. 좋은 아침… 아니, 좋은 오후인가? 내가 너무 오래 잤네요.”

“긴 여정이라 많이 피곤하셨을 텐데 침대가 불편하진 않으셨는지 모르겠어요.”

“아니에요. 덕분에 편하게 잘 잤어요. 파도 소리가 자장가 같아서 잠이 아주 잘 오더라고요.”

“그러셨다면 저야 기쁘고요.”

헤일리는 수줍은 듯 웃었다.

저를 세심하게 챙겨 주는 헤일리의 배려에 미소를 짓던 엘리사는 그녀의 옷차림이 외출복임을 깨닫고 물었다.

“어디 가나 봐요?”

“아, 지금 마을에 일하러 갈 시간 이거든요. 혹시 필요한 것 없으세요? 있으시면 사다 드릴게요.”

“일을 한다고요?”

엘리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평생 탑에서 책을 읽고 연구만 할 거라 생각했던 이들이 일을 하러 간다는 것이 놀라웠다.

“네. 일하지 않으면 식비가 충당되지 않아서……. 매일 몇 명씩 마을에 가서 소일거리를 도와주고 식재료를 얻어 오고 있어요.”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선황제는 지식과 정보를 중히 여겨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리의 탑을 후원했으나, 현 황제가 즉위하면서부터는 지원이 끊겼으니까.

지원이 끊겼으니, 탑에서는 자체적으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을 터였다.

걱정 어린 엘리사의 눈을 본 헤일리는 애써 밝게 웃으며 덧붙였다.

“뭐, 이럴 때 몸을 좀 움직이면 운동도 되고 좋죠. 책상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도 체력이 없으면 안되겠더라고요.”

“하긴, 그것도 그렇겠네요.”

“그럼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필요한 건 없는데……..”

그때, 물그릇을 가지러 갔었던 앤이 돌아왔다.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엘리사는 앤을 보고는 기다렸다는 듯 반색을 띠며 지시를 내렸다.

“앤, 톰슨 경을 불러 줄래?”

*

샌드위치와 감자 스튜로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브랜든은 개인 서재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들을 탑에 들인 게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엉겁결에 리하르트와 엘리사 일행을 탑 안으로 들이긴 했지만, 외부 인을 탑으로 들인 것이 너무도 오랜 만이라 밤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대의 서는 찾지 못할 터. 며칠 찾다 보면 금세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불안을 달래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저예요.”

헤일리였다.

“들어오거라.”

브랜든은 일단 출입을 허락한 뒤, 방으로 들어오는 헤일리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헤일리가 마을에 소일거리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런데 이 시간에 탑에 있다니?

“오늘은 네가 마을에 가는 날이 아니더냐?”

“아, 그게…”

헤일리는 초조한 표정으로 뜸을 뜰이다가 말했다.

“세리어트 후작님께서 탑에서 지내시는 동안은 기사님들을 마을로 보낼 테니 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식비 또한 그쪽에서 감당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브랜든은 놀란 눈으로 헤일리를 쳐다보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탑 바깥을 바라보자, 탑에서 마을까지 이어진 허허벌판을 줄줄이 이어서 가고 있는 루벨린의 기사들이 보였다.

확실히 탑의 아이들을 마을로 보낼 때보다 듬직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헤일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이래도 되는 걸까요, 할아버지? 그래도 손님들이신데…….”

브랜든은 멀어지는 루벨린 기사들을 지켜보며 엘리사의 다부지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쩐지 그녀를 향한 잘못된 오해로 빚을 진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마음이 불편해졌다.

브랜든은 그런 제 기분을 애써 외면하며 무심하게 대꾸했다.

“도움이 필요해 찾아온 이들이니, 마땅히 값을 치르기 위해 그리하는 것이겠지. 그냥 두어라.”

*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마친 엘리사는 리하르트가 있는 탑 상단의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가일 경이 고대의 서를 발견한 곳은 도서관 제일 꼭대기 층이라고 했지.’

눈으로 층수를 헤아린 엘리사는 기함했다.

11층.

저 높이를 올라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리하르트는 좋겠다. 그냥 날아서 올라갔겠네……..

그냥 방으로 돌아가서 쉴까 하는 생각이 일순 들었지만, 리하르트를 향한 감정이 그 유혹을 힘들게 이겨냈다.

‘아니, 에스더 가문의 선조님. 기왕 만들어 주실 거면 여기에도 엘리베이터를 만들어 주셔야 할 거 아니에요? 공부만 하는 학자들 다 골병들겠어요.’

엘리사는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이제 딱 죽겠다 싶을 즈음 11층에 겨우 도착했다.

엘리사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 후, 리하르트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공작 각하께서 이쪽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맨 끝에, 사서들의 도움을 받아 리하르트를 찾아냈다.

리하르트는 아가일이 고대의 서를 본 것 같다던 책장보다 조금 떨어진 책장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편한 셔츠와 수수한 바지 차림이 그의 쭉 뻗은 장신과 다부진 몸을 더욱 부각시켰다.

빚어 만든 듯 잘난 그 얼굴은 책장 사이에 있어도 숨겨지지 않았다.

비스듬히 숙인 고개를 따라 짙은 흑발이 희고 반듯한 이마 위로 흐트러져 흘러내리며 나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에게 다가가던 엘리사는 저도 모르게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흠흠, 아주 절경이군.’

새삼스럽게 남편의 비현실적인 외모에 감탄하던 그때, 인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쳐다보는 리하르트와 눈이 마주쳤다.

내내 서늘하던 그의 눈동자에 온기가 어린 순간이었다.

그 모습이 예쁘고 기뻤다.

엘리사는 그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장난을 쳤다.

“누구 남편인지 책 읽는 모습도 잘생겼네? 아주 똑똑해 보여. 누가 보면 학자인 줄 알겠어.”

“너…”

엘리사의 과감한 스킨십에 당황한 리하르트는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뺐다.

그의 반응에 엘리사는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침대에선 더 부끄러운 일도 서슴지 않고 하면서, 엉덩이 좀 만졌다고 부끄러워하는 그의 모습이 귀여웠다.

“왜 그렇게 놀라? 내 거 내가 만지는데.”

엘리사의 말에 리하르트는 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쥐고 있던 책을 책장에 다시 꽂아 넣고 엘리사의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겼다.

그녀의 얼굴을 좀 더 잘 보고 싶은 마음에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행동이었다.

“피곤할 텐데 더 자지, 왜 왔어.

계단 올라오는 거 힘들었을 텐데.”

그는 저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이 이 꼭대기 층까지 힘든 길을 온 엘리사가 마냥 걱정되고 미안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마저도 기꺼운 듯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겨 왔다.

“내가 네 정화제잖아. 옆에 꼭 붙어 있어야지.”

“……..”

“그리고 여기 풍경도 좋고, 조용하고, 꼭 여행 온 기분이야. 난 마음에 들어.”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자신을 생각해서 그렇게 말한다는 걸 눈치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불안이 사라졌다. 이 온기를, 이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단단히 끌어 안았다.

먼저 슬그머니 몸을 뗀 건 엘리사였다.

“이제 책 찾아보-”

그의 품에서 벗어나 고대의 서를 찾으러 가려 했으나, 그녀를 안은 그의 팔이 너무도 단단했다.

엘리사는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빠르게 내려앉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작정하고 유혹해 놓고, 어딜 가려고?”

그렇게 묻는 그의 눈에 짙은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맹수의 손아귀에 제 발로 들어왔다는 걸 알아챘지만 피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가 원하는 것을 순순히 내어줄 생각으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에게 저를 온전히 내맡겼다.

이윽고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애틋하게 겹쳐진 두 입술 사이로 서로를 갈망하는 호흡이 엉겼다.

“으응….”

엘리사는 아찔하게 저를 휘감는 열기에 정신을 잃지 않으려 그의 옷깃을 필사적으로 그러잡았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열중한 찰나의 순간, 도서관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일었다.

그와 동시에 책 한 권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으나, 이내 다시 흐릿해지며 모습을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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