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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26화 (126/164)

126화

정오 무렵, 브랜든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엔 루벨린의 기사들이 오늘도 어김없이 마을로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이 이 탑에 온 지 어느덧 엿새가 된 날이었다.

‘평화롭구나.’

그들을 처음 이 탑에 들일 때 우려했던 것과 달리,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음에도 평화로웠다.

루벨린의 기사들은 무례하게 소란을 피우지 않았고, 오히려 탑의 일거리를 덜어 주어 생활이 편해졌다.

게다가 그들이 노동의 대가로 얻어온 식량은 비축해 두고, 엘리사가지원하는 돈으로 식비를 충당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하네스 역시 탑 안 모든 이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잘 지내고 있었다.

“고놈 참 방방 잘 웃는 것이 어여쁘기도 하……. 크흠! 크흠!”

하네스를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흐뭇한 할아버지 미소를 짓던 브랜든은 황급히 제 표정을 갈무리했다.

‘나도 참, 오랜만에 어린아이를 봐서 신기한 모양이군.’

아무튼, 오히려 그들이 오고서부터 탑 안 사람들의 일상에 묘하게 활력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브랜든은 그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탑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너무 걸어 잠갔었구나.’

물론 예로부터 탑을 혼란에 빠트린 외부인은 많았고, 여전히 외부인을 경계할 것이나 하나는 분명해졌다.

엘리사 일행에게 내밀었던 자신의 잣대는 명백한 편견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자신의 편견을 인정한 브랜든은 결단을 내렸다.

그는 헤일리를 불러 말했다.

“헤일리, 아가일을 불러오거라.”

잠시 후, 그의 부름을 받은 아가일이 그의 개인 서재로 찾아왔다.

“부르셨습니까, 스승님.”

“왔느냐.”

브랜든은 오랜만에 만난 제자에게 다짜고짜 둘둘 말린 양피지부터 내밀었다.

아가일은 의아한 눈으로 그것과 브랜든을 번갈아 보다 물었다.

“이게 뭡니까?”

“고대의 서를 직접 본 자들의 기록을 모은 자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고대의 서를 보게 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

“너처럼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 발견되었는지 기록도 남아 있다.”

“…….”

“고대의 서가 발견된 위치며, 시간이며, 워낙 제각각이라 별 도움은 안 될 것 같다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 분께 전해 드리도록 해라.”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이 탑에 온지 어언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들은 아직 고대의 서를 발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것은 아주 작은 실마리지만, 현재로선 유일한 실마리이기도 했다.

브랜든은 그것을 내어준 것이다.

아가일은 그렇게 말하는 브랜든을 빤히 쳐다보았다.

‘외부인을 극도로 꺼리는 이 사람이 웬일이지?’

아가일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브랜든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럽게 덧붙였다.

“크흠! 예뻐서 주는 게 아니라, 빨리 찾고 떠나라고 주는 것이다. 높으신 분들을 모시고 있자니 마음이 영 불편해서, 원.”

“감사합니다, 스승님.”

“감사받고자 한 일이 아니니 인사는 되었다. 어서 가서 전해 드려라.”

아가일은 감사 인사에 머쓱해하는 브랜든에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그때, 등 뒤에서 브랜든의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능력을 높이 사고 믿어 주는 곳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아 보기 좋구나.”

아가일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몇 달 전, 아가일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브랜든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터라 두 사람은 만나지 못했었다.

그러니 이것은 스승과 제자가 근십 년 만에 만나 나누는 제대로 된 첫 대화였다.

매사에 날카롭게 빛내던 브랜든의 눈빛이, 서로 마주 보는 이 순간만큼은 묘하게 누그러져 있었다.

브랜든에게 다정한 말이나 칭찬을 들어 본 적 없는 아가일은 그의 모습이 어색하기만 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던 아가일이 대답했다.

“네. 그분들을 위해 일할 수 있어 영광이죠. 스승님께 많이 배운 덕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고개만 꾸벅 숙이고 나갔을 아가일이었지만, 이번엔 제법 상대가 듣기 좋은 말을 했다.

엘리사와 지내면서 배운 대화 스킬이었다.

“…흥, 인사치레를 하는 법도 배운 모양이구나.”

브랜든은 말로는 퉁명스럽게 받아 쳤으나, 그의 입가에는 흐릿한 미소가 번졌다 사라졌다.

아가일은 그에게 묵례를 한 후 그의 개인 서재를 나와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방으로 향했다.

그때, 도서관에서 내려오던 헤일리와 마주쳤다.

“할아버지랑 대화는 잘 끝나셨나 보네요.”

“아, 네.”

아가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처음 탑에 온 날, 그녀의 앞에서 그녀의 할아버지인 브랜든을 험담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아가일은 그녀가 자신과 다른 방향으로 가길 바랐으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헤일리는 본인의 방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헤일리가 껄끄러운 아가일은 말없이 그녀와 보폭을 맞춰 걸었다.

옆 사람의 발걸음에 맞추어 걷는 건 보좌관으로서 살며 얻게 된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그러나 정작 헤일리는 그 일이 기억나지 않는 듯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저는 할아버지를 따라 몇 달 전에 이 탑에 처음 왔어요.”

“……처음 보는 얼굴이다 했더니, 역시 그랬군요.”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할머니랑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몇 달 전에 할머니마저 돌아가셨거든요. 오갈 곳 없는 저를 할머니의 오라버니이 신 할아버지가 거두어 주셨어요.”

헤일리의 이야기에 아가일은 내심 놀랐다.

꼬장꼬장한 브랜든이라면 당연히 학문에 정신이 팔려 가족을 등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사실 저도 이제 성인이라 보호자는 없어도 되긴 한데… 책 읽는 것이 좋아서 따라왔어요. 먼 친척이라도 피는 못 속이나 봐요.”

그렇게 말하는 헤일리의 표정에서 브랜든을 몹시 존경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런 그녀를 보자, 그녀의 앞에서 브랜든에 대해 나쁘게 말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아가일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날 일은 죄송했습니다. 헤일리 양의 기분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날 일이요?”

고개를 갸웃하던 헤일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할아버지가 꼬장꼬장한 게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제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헤일리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에 아가일의 무겁던 마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불쌍해서 조금만 변명하자면요……. 할아버지는 사실 탑의 모든 사람들을 아끼세요.

특히 어린 아이들은 더욱더.”

“다만 정을 주지 않으려 하시죠.

아이들이 이 답답한 탑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세상으로 나아가 빛이 되길 바라시거든요.”

브랜든은 막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애착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함부로 애착 형성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이 자신과 탑에 정을 붙이면, 이 탑을 떠나지 않으려 할 테니까.

“물론 이러니저러니 해도 굉장히 퉁명스럽고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인건 부정할 수 없지만요.”

“…….”

“그래도, 사실은 경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계세요. 탑 아이들에게 저 형을 모범으로 삼으라고 하실 정도로요.”

아가일은 문득 탑의 아이들이 처음보는 자신을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보던 것이 기억났다.

어린 시절 그토록 바랐던 스승의 칭찬이었다.

아가일은 스승의 칭찬을 대신 전하며 빙긋 웃는 헤일리를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그녀를 따라 피식 웃었다.

가슴 한편에 내내 묻어 두었던 작은 응어리 하나가 완전히 사라진 기분이 들었다.

*

“…이렇게 찾다간 평생이 지나도 못 찾을 거 같아.”

아가일이 브랜든에게 받은 양피지를 하나하나 체크하며 고대의 서가 나타났던 도서관의 포인트를 살피던 엘리사가 꿍얼거렸다.

리하르트도 방금 훑어본 책을 도로 꽂아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정보가 있을까 해서 다른 책들도 살펴보고 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뭔가 다른 대책이 필요해.”

엘리사는 눈을 부릅뜨고 브랜든이건네준 양피지를 살펴보며 이 단서들의 연관성을 찾아보려고 했으나, 아무리 봐도 연관성은 없어 보였다.

결국 엘리사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니, 그 힘을 정화할 수 있는 사람이 나인데 책은 왜 나한테 그 힘에 대한 정보를 보여 주지 않는 거야?”

그때, 엘리사의 머릿속에 아가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책에 적힌 정보를 감당할 수 없는 자가 책을 읽으면 기억을 지우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즉, 책이 자신을 발견한 자가 이 정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판단한다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한 가지 방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책이 사람을 판단하고 나타나는 것이라면, 책이 아직 우리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해서 보이지 않는 거라면.

판단할 수 있게 무언가 보여 주는 것도 방법이 아닌가?

“리하르트, 나 믿지?”

리하르트는 수많은 책이 있는 도서관에서 물의 힘을 사용하는 엘리사의 행동이 의아했으나, 그녀를 믿고 지켜보기로 했다.

그사이, 엘리사가 만들어 낸 물방울은 점점 더 커져 엘리사의 얼굴만해졌다.

엘리사는 눈을 천천히 감으며 간절히 바랐다.

‘나는 그 책의 내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조금 전까지 없던 책장 하나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그 책장 한가운데에, 책 한 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 책이 바로……… 고대의 서.’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엘리사는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그는 확신에 찬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물의 힘을 잠재운 후,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 책을 들었다.

낡은 책 표지에 제목만이 이질적이게 느껴질 정도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최초의 왕, 제네이드,

그리고 그 아래에 저자의 이름 또한 적혀 있었다.

‘라르딘 에스더’이 땅의 모든 기억을 읽고 미래를 예지하는 힘을 가졌다는 에스더 가문 초대 가주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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