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엘리사는 낯선 듯 익숙한 두 이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라르딘 에스더는 신목과 한 몸이 되었다던 에스더 가문의 초대 가주.
그리고 제네이드라면……….’
제네이드.
건국제 연극 때, 엘리사가 무심코되뇌었던 이름이었다.
이 책에 그 이름의 주인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는 것이다.
‘이 사람이 리하르트가 가진 힘이랑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책이 세리어트의 힘에 반응하여 모습을 드러냈으니 읽어 볼 가치가 있었다.
엘리사는 책을 펼치기 전,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 역시 책과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책이 그 또한 이 책에 적힌 정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했다는 뜻이었다.
엘리사는 결심을 굳히고 책의 첫 장을 펼쳤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이와 같이 적혀 있었다.
[최초의 왕, 제네이드.
카이로트, 루벨린, 세리어트, 에스더 4가문이 인정한 최초의 왕.
그리고, 마족과 마물의 마지막 왕.]
그것을 본 엘리사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마족과 마물의 마지막 왕이라면, 이 사람이 마왕이란 뜻…….’
즉, 이 내용대로라면 아렌시아의 초대 왕이 ‘마왕’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는 카이로트의 초대 가주가 아렌시아의 초대 왕으로 되어 있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와는 다른 내용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왜곡된 걸지도.’
엘리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신이 혼돈을 빚어 생명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마족과 마물이다.
하지만 혼돈을 빚어 만들어진 이들은 서로 죽고 죽이며 더욱 큰 혼돈을 만들어 냈다.
신은 자신의 피, 마나를 빚어 또다른 생명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나의 세계, 두 피조물이 서로가 으뜸이라 주장하여 살육이 끊이지 않았다.
오랜 싸움 끝에, 혼돈을 이겨 낼수 없었던 인간은 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은 인간의 네 가문에 자신의 힘을 나눠 주었다.
카이로트에는 홍염의 힘을.
세리어트에는 생명의 힘을.
루벨린에는 폭풍의 힘을.
에스더에는 녹음의 힘을.
네 가문의 가주는 신의 힘으로 마왕에게 맞서 싸웠으나, 혼돈의 힘을 가진 마왕은 막강했다.
마왕의 힘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스러져 사라졌다.
그가 분노하면 그에게 종속된 이 땅의 모든 마족과 마물들이 분노하여 인간들을 공격했다.
네 영웅이 고전하던 그때.
마왕에 대적할 자가 나타났으니, 그는 마왕의 아들 제네이드다.
아비보다 강한 힘을 가진 제네이드는 아비와 마족을 등지고 인간의 편에 서서 마왕에게 맞섰다.
다섯 영웅은 오랜 전투 끝에 마왕을 무찌르고, 마족을 협곡 너머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네 가주는 가장 큰 공헌을 세운 제네이드를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아렌시아를 세웠다.
왕이 된 그는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준 연인, 아리에 세리어트와 평생을 약속했다.
하지만 평화는 오래 가지 않았다.
아들의 손에 죽은 마왕의 힘이 제 네이드에게 흡수되며 그가 가진 혼돈의 힘이 요동치기 시작한 까닭이다.
협곡 너머의 마족들과 마물들이 ‘새로운 마왕’의 힘에 반응하여 밤낮으로 날뛰었다.
인간들은 제네이드가 가진 혼돈의 힘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한 힘은 두려움을 부르고, 평화에 균열을 만들었다.
‘마왕이 어찌 인간의 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불안에 불을 지피듯, 다섯영웅에게 예언이 내려왔다.
‘마왕이 이 땅의 모든 생명을 거두고, 이 세계를 멸할 것이다.
그 ‘마왕’이 누구인지는 자명했다.
세계의 멸망을 막으려면 제네이드를 죽여야 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혼돈의 힘을 가진 그를 죽일 수 있는 건 정화의 힘을 가진 그의 연인 아리에 세리어 트뿐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을 죽여야 하는 운명앞에 놓인 아리엔은 차마 그를 죽일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여 그의 힘과 협곡을 봉인했다.
자신의 모든 힘을 소진한 그녀는 영면에 들었다.
부디 제네이드가 행복하길 바라며.
그러나 그녀의 간절한 마지막 소망은 처참히 부서졌다.
그토록 믿었던 동료들의 손에.
혼돈의 힘을 두려워하며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카이로트와 루벨린은 아리엔을 잃은 슬픔에 빠져 약해진 제네이드를 습격했다.
힘을 봉인한 상태에다, 아리엔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제네이 드는 그가 믿고 지키려 했던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그가 죽은 후, 그들이 말하던 ‘진정한 인간의 시대’가 열리며 초대왕의 존재는 잊혔다.
그저, ‘마지막 마왕’ 으로만 기억될 뿐.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마지막까지 왕을, 나의 친우를 기억하리라.
친애하는 나의 친우, 아리엔을 기리며 기록을 남긴다.]
*
늦은 밤, 리하르트는 창밖의 파도 치는 밤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은 습관처럼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엘리사가 그의 힘을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 준 그 펜던트였다.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던 리하르트는 고대의 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떠올리곤 미간을 찡그리며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마왕의 힘..…..’
적혀 있던 내용은 자신이 가진 힘과 정확히 일치했다.
힘이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생명을 앗아 가는 위험한 힘도, 그리고…….
‘메르디안 영지의 별장에서 몬스터들을 날뛰게 한 것도 이 힘이었나.’
그렇게 생각하니 아귀가 맞아 들었다.
리하르트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엘리사가 방으로 들어왔다. 유모에게 맡겼던 하네스를 품에 안은 채였다.
엘리사는 잠든 하네스를 침대에 눕히고 리하르트에게 다가왔다.
“리하르트, 우리, 신목의 숲에 가보자.”
“………라르딘 에스더. 그 사람을 찾아가려는 거야?”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사람이 정말 실존한다면, ‘마왕의 힘’에 대해 아는 그 사람이라면, 뭔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 사람이 과연 실존할까?
인간의 몸으로 몇천 년을 사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물론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지.
하지만 마왕의 힘을 가지게 된 너도 있는데, 신목과 하나가 되어 몇천년을 산 현자도 있을 법하잖아?”
엘리사의 반문에 리하르트는 더 이상 라르딘의 실재 가능성을 부정하지 못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엘리사는 신목의 숲으로 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덧붙였다.
“그리고 선대 공작 각하는 그곳에서 나를 데려왔다고 했어. 정말 현자를 만났는지는 모르겠지만.”
“…….”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12년의 진실도 그곳에 있을지 몰라.”
자신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계에 빙의한 비밀도 그곳에 가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엘리사는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고 있는 리하르트의 뺨을 감싸쥐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내가 그랬지? 나는 네 아내고, 힘든 일이든 기쁜 일이든 전부 너와 함께 할 거라고.”
“……”
“우리는 이 일을 해결할 거야.”
그 책을 읽는 순간 떠올랐던 한가지 가능성을 외면한 채로,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마.”
저보다 작고 약한 몸으로 당차게 말하는 엘리사의 모습에, 내내 굳어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는 피식 웃고는 엘리사의 손바닥에 입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 한 가지만 약속해 줘.”
“응?”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위험해지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이 반대 의견은 받지 않겠다는 듯 단호했다.
엘리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엘리사의 대답에 리하르트는 안도한 표정으로 제 뺨을 감싼 그녀의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그럼 맹세의 키스를 해 줘.”
속이 뻔히 보이는 그의 요구에 엘리사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요즘 들어 부쩍 그의 능청이 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싫지 않았다.
엘리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쪽.
하지만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자,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못마땅한 기색이 어렸다.
그 순간, 리하르트의 단단한 팔이 엘리사의 허리를 바짝 끌어당겨 안고 제 품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훅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엘리사의 입술로 다가서며 속삭였다.
“맹세에서 진심이 안 느껴지는 것 같은데.”
이윽고 겹쳐진 그의 입술이 진심어린 맹세를 받아 냈다.
*
그로부터 이틀 후,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우선 아카로아로 돌아가기로 했다.
장시간 여행을 준비한 것이 아니었기에, 바로 신목의 숲으로 향하기엔 무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목의 숲으로 가려면 아카로아를 거쳐 가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채비를 마친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털 담요로 감싸고 안아 들었다.
엘리사는 하네스의 손을 잡으며 속삭였다.
“하네스, 우리 이제 집에 갈 거야.”
“우웅.”
“그동안 얌전히, 건강하게 잘 있어줘서 고마워.”
하네스는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제 손가락을 빠는 데 정신이 팔려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하네스를 보며 피식 웃던 리하르트는 문으로 다가섰다.
“가자, 엘리사.”
방문을 열자, 때마침 두 사람을 찾아온 브랜든과 마주쳤다.
“대학자님?”
엘리사는 그를 보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탑에서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먼저 찾아온 적 없던 그였다.
갑작스럽게 열린 방문에 흠칫 놀란듯하던 브랜든은 큼, 헛기침을 하고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두 분이 떠나시기 전에 보여 드릴 것이 있습니다. 잠시 시간 괜찮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