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브랜든이 두 사람을 데려간 곳은 탑 내의 연구실이었다.
그곳엔 많은 학자들이 저마다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연구실을 훑어본 엘리 사가 브랜든을 쳐다보았다.
“여긴……?”
“일전에 말씀드렸던 마도구를 연구하고 만드는 곳입니다.”
연구에 집중하고 있던 학자들은 엘리사와 리하르트, 브랜든에게 가볍게 목례만 하고 곧장 다시 연구에 집중했다.
브랜든은 먼저 연구실에 도착해 있던 헤일리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러자 헤일리가 세 사람에게로 다가왔다.
손에 무언가를 든 채로.
다가온 헤일리는 엘리사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이건…… 오르골인가요?”
엘리사는 왜 이걸 제게 주냐는 눈으로 헤일리와 브랜든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자 브랜든이 대답했다.
“단순한 오르골이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대답함과 동시에 오르골의 태엽을 두어 번 감았다. 그리고 설명을 덧붙였다.
“정해진 음악을 기억하고 연주하는 오르골과 달리, 이 오르골은 태엽이 풀리는 동안 들은 소리를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알려 주지요.”
이윽고 태엽이 완전히 풀어졌다.
브랜든은 오르골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러자 오르골에서 브랜든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해진 음악을 기억하고 연주하는 오르골과 달리, 이 오르골은 태엽이 풀리는 동안 들은 소리를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다시 알려 주지요.]
소리는 실제로 브랜든이 말하고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선명하고 또렷했다.
엘리사는 놀란 눈으로 오르골을 바라보았다.
이건 녹음기와 똑같은 기술 아닌가. 승강기에 이은 큰 충격이었다.
“정말 놀랍네요. 우리가 모르는 곳에 이토록 마법 문명이 발전해 있다니….”
리하르트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신기한 눈으로 오르골을 살폈다.
“이 정도면 당장 상용화해도 문제가 없을 듯한데. 이걸 팔면 생활비도 마련이 될 테고, 왜 아직 상용화할 수 없다고 하는 건가?”
“라르딘 님이 만드신 도르래가 수천 년 동안 유지될 수 있는 건, 마정석에 마나가 계속 채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아직 마정석에 마나를 채우는 방법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브랜든은 설명을 덧붙였다.
“두 분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의 세계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나가 존재하고 있지요.”
“그렇죠.”
“이 마나를 마정석에 채워 넣는 방법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 마도구들 전부 일회성 물건인 셈입니다.”
엘리사는 그제야 마도구가 아직 상용화되지 못한 이유를 이해했다.
‘배터리는 있는데 충전을 못 하는 거랑 같은 이치구나.’
전생을 떠올리니 바로 이해가 되었다.
“아, 물론 정말로 일회성은 아닙니다. 물건에 따라, 마정석에 들어 있는 마나의 양에 따라 사용 횟수가다르지만 확실한 건 횟수가 한정적이라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때, 무언가를 만들고 있던 학자 하나가 브랜든에게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그의 손에 딱 봐도 갓난아기의 장난감으로 보이는 모빌이 들려 있었다.
“스승님, 마무리 작업을 지시하셨던 모빌입니다. 하명하신 대로 최상급의 마정석으로 -”
“크흠!”
학자가 브랜든의 지시를 읊으려고 하자, 브랜든은 헛기침을 하며 그의 말을 막았다.
“흠흠! 그냥, 연구실에 굴러다니는 마정석이 있어서 만든 겁니다. 딱히 소공작께 드리려고 만든 것은 아니니 곡해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누가 봐도 선물의 주인은하네스였다.
엘리사는 겉으론 솔직하지 못해도, 행동으론 하네스를 아껴 주는 브랜든의 마음을 알아채고 애써 웃음을 참았다.
그리고 받은 모빌을 하네스에게 내보였다.
“하네스, 이거 봐. 할아버지가 우리 하네스한테 선물을 주셨어.”
“브우?”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있던 하네스는 곧장 모빌에 관심을 보이며 조그마한 손을 허우적거렸다.
하네스가 통통한 뺨을 오물거리며 열렬한 옹알이로 반응하자, 지켜보던 브랜든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불쑥 설명에 나섰다.
“이 마정석을 살짝 두드리면 자동으로 회전합니다. 그리고 회전하는 동물 인형의 순서에 따라서 동물 울음소리가 나오지요.”
“오옹.”
동물 모양의 봉제 인형이 회전하자, 그에 맞춰 동물 울음소리가 나왔다.
그것을 본 하네스가 연둣빛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두 팔과 다리가 파닥파닥 움직였다.
그런 하네스를 바라보는 브랜든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누그러들었다.
엘리사는 브랜든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우리에게 주셔도 되는 건가요?”
“물론 그냥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두 분께서 저희의 연구를 후원하고 싶다고 하셨으니, 한 번 숙고해 보시란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말로는 ‘후원’을 언급하며 이 선물이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닌, 철저히 금전적인 거래라고 선을 긋고 있었지만 엘리사는 알았다.
브랜든처럼 외부 세력을 경계하는 사람이 후원을 받는다는 것부터가 마음을 열었다는 뜻이라는 것을.
에이든을 처음 만났을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브랜든에게 오르골과 모빌을 받은 엘리사와 리하르트, 하네스는 브랜든, 헤일리와 함께 탑 입구로 내려왔다.
탑 입구에 떠날 채비를 마친 루벨린의 기사들과 하녀들, 그리고 아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마차 앞에 서서 브랜든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경과 탑의 학자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군. 약속한 보답은 제도에 도착하는 대로 보내겠소.”
“아닙니다. 저희 역시 대신 일해 주신 기사님들 덕분에 편안한 시간을 보냈으니까요.”
첫날 기사들을 극도로 경계하던 브랜든이 그렇게 말하자, 톰슨과 기사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뿌듯해했다.
엘리사는 마지막으로 브랜든과 헤일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네스, 우리도 할아버지랑 이모한테 인사하자.”
“우웅.”
하네스는 엘리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브랜든과 헤일리를 향해 방 미소를 지으며 옹알거렸다.
그런 하네스를 바라보는 브랜든과 헤일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모두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 오르려던 그때였다.
어쩐지 초조한 표정을 하고 있던 헤일리가 불쑥 아가일에게 다가왔다.
“음, 그러니까…… 제도에 놀러 가게 되면요, 경께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나요?”
“예?”
“무, 물론 선배로서요!”
갑작스러운 헤일리의 이야기에 아가일이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아가일을 쳐다보는 브랜든의 눈이 도끼눈이 되었다.
엘리사와 톰슨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아가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정작 아가일은 헤일리의 저 의를 눈치채지 못한 듯 여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이죠.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그러자 곁에서 보고 있던 톰슨이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꼭 오세요, 헤일리 양. 이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톰슨은 아가일의 귀에 대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해’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아가일은 영문도 모른 채 그저 톰슨의 숨결이 소름 끼쳐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바라던 대답을 들은 헤일리의 입가에 마침내 미소가 번졌다.
우여곡절 끝에 모두 인사를 마치고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15. 작은 불꽃
아렌시아 황궁의 황태자비궁.
“비전하, 오늘은 자수정을 세공한이 귀걸이가 어떠세요?”
“……그걸로 하자.”
로제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단장을 하고 있었다.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하러 가기 위해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주일에 두번 정도 하러 가던 문안 인사를, 최근에는 거의 매일 찾아가고 있었다.
열흘 전, 레이모어가 했던 말 때문이었다.
레이모어는 열흘 전, 간만에 딸아이가 있는 황태자비궁을 찾았다.
오랜만에야 로제를 만나러 온 그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뜸 말했다.
당분간 황제와 황후, 황태자에게 미운털 박히지 않도록 몸을 사려라.’
짧고 간략하게 제 할 말을 마친 그는 차를 몇 모금 마시다, 차가 다 식기도 전에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몸을 사려야 하는지 같은 이유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것이 가뜩이나 입지가 불안정한 로제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그래서 정황을 살필 겸 황후에게 부지런히 문안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단장을 마친 로제는 황후궁으로 향했다.
“간밤에 평안하셨어요?”
“덕분에. 아침 바람이 찬데 매번 이리 문안 인사 와 주니 고맙구나.”
황후는 최근의 모습과 달리, 로제를 반겼다.
근래에 들어 부쩍 쌀쌀맞은 기색을 내비치던 그녀의 태도가 변하자, 묘하게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로제는 애써 웃으며 화답했다.
“별말씀을요. 자식 된 도리로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올리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요.”
“잠깐 차라도 마시면서 몸 좀 녹이고 가겠니? 마침 긴히 할 이야기도 있고.”
‘긴히 할 이야기’라는 것이 불안했지만, 황후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로제는 마지못해 착석했다.
황후는 잠시 목을 축이며 뜸을 들이다, 본론을 꺼냈다.
“당분간 근교에 잠시 요양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니?”
“네?”
“다름이 아니고, 네 몸 상태가 영좋지 않아 보여서. 네 몸이 좋지 않아서 수태도 힘든 듯하고.”
그녀의 제안에 로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겉으론 자신을 걱정하는 듯 보이지만, 그간 황후와 황제의 정황을 살펴온 로제는 알고 있었다.
황후가 근래에 귀족 영애와 젊은 귀부인들을 물색했다는 것을.
목적은 빤했다.
크리스티안의 정부로 들여 후사를 보기 위함이었다.
물색해 둔 귀족 영애와 귀부인들 모두 로제와 꽤 가깝게 지내던 친황제파의 사람들일 터.
피차 껄끄러워질 테니 로제를 한동안 멀리 떨어트리려는 속셈이었다.
로제는 입술을 꾹 깨물며 드레스자락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자리가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황태자비인 자신을 걱정해서 건넨 황후의 제안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로제는 굳은 표정을 가까스로 풀며 대답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당분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로제는 흡족해하며 웃는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후 물러났다.
돌아서 나오는 그녀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대로는 안 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황태자비 로제 카이로트.
머지않은 미래에 황제가 승하하면, 제국 최고의 여성이 앉을 그 자리.
황후의 자리.
자신의 것을 지켜야 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사생아. 엘리사 그 계집애가 숨긴 사생아를 찾으면 내 패로 쓸 수 있을 거야.’
그동안 엘리사의 눈을 피해 몰래 아카로아 주변의 보육원과 홍등가를 뒤졌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때마침 엘리사가 무슨 일인지 진리의 탑으로 떠났다 들었다.
엘리사가 제도를 떠난 지금이야말로 그 사생아를 찾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