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아침 일찍 출발했던 루벨린 공작가의 마차가 점심때가 되어 멈췄다.
루벨린 공작가의 일원들은 경로상별수 없이 길가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볕이 제법 따뜻하다고는 해도 아직 겨울이었기에, 일원들은 마차에서 식사를 했다.
어젯밤 머물렀던 헤드슨 백작령 본성에서 점심으로 챙겨 준 음식이 있었기에 다행히 식사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유모에게 하네스를 맡기고 식사를 시작했다.
제 몫의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먹던 엘리사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 샌드위치 엄청 맛있다. 안에 들어간 속 재료가 서로 잘 어울려.
잼도 맛있고.”
“그래?”
리하르트에게 음식은 그저 에너지 원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기에 별다른 차이는 못 느꼈다.
하지만 엘리사가 좋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헤드슨 백작령에 셰프를 보내서 배워 오라고 해야겠군.”
샌드위치를 다 먹은 엘리사는 옆에 있던 머그잔을 들었다.
꿀과 딸기를 갈아 넣은 우유였다.
부드러운 우유에 달콤한 꿀과 상큼한 딸기가 어우러져 맛이 좋았다.
엘리사는 흡족한 표정으로 잔을 내려놓았다.
“맛있다”
그때, 훅 다가온 리하르트의 입술이 엘리사의 입술에 묻은 딸기 우유를 쪽 빨아 먹었다.
돌발적인 그의 행동에 놀란 엘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작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을 한 당사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맛있네.”
“뭐, 뭐 하는 거야?”
“네가 맛있다고 해서 맛본 건데.”
“네, 네 우유는 여기 있잖아.”
“이쪽이 더 맛있어 보여서.”
리하르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엘리사의 입술에 조금 남은 우유를 마저 빨아 먹었다.
그의 행동과 말에 엘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맛있어 보인다는 것이 우유인지, 아니면 다른 쪽인지 모호한 말이었다.
“키스해도 돼?”
엘리사의 입술에 묻은 우유를 다 먹어치운 그가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물었다.
엘리사는 샐쭉한 눈으로 그런 그를 흘겨보았다.
제 심장을 철렁 떨어트려 놓고는 태연한 그가 짓궂었다.
심술이 난 엘리사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안 돼.”
엘리사의 단호한 대답에, 리하르트는 한 번 더 보채는 기색 없이 곧장 몸을 물렸다.
아니, 그러는 줄 알았다.
그는 방향을 틀어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정말 안 돼?”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 울림과 함께 입술이 목덜미를 스쳤다.
그 아찔한 감각에 엘리사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런 엘리사의 반응을 눈치챈 리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저를 집어삼킬 듯 일렁이는 붉은눈.
그 눈동자 고스란히 담긴 그의 욕망을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저돌적인가 했더니.’
생각해 보니, 아카로아를 떠난 이후 그와 제대로 밤을 보낸 적이 없었다.
여정이 고되었던 엘리사가 기절하듯 잠들어서이기도 했고, 손님으로 머무는 집에서 낯 뜨거운 행각을 벌이기 민망했던 엘리사가 피해서 이기도 했다.
공작저에선 밤새 그녀를 탐하고도 부족하듯 덤벼들던 그의 입장에선 꽤 힘든 시간이었으리라.
‘칭찬의 의미로 키스 정도는…….’
무엇보다, 저 역시 그의 유혹에 순순히 넘어가 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엘리사는 못 이기는 척 눈을 감았다.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가온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그때였다.
“각하, 마님.”
마차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와 함께 톰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는 그 부름을 무시하려 했다.
어차피 커튼이 쳐져 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고, 톰슨의 목소리를 들어 보니 그리 급한 일도 아닌 듯싶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그의 가슴팍을 짚고 살짝 밀어냈다.
“……하아.”
리하르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마지못해 물러났다.
그러고는 다소 힘을 실어 마차 창문을 열고 톰슨을 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톰슨은 화살처럼 날아와 꽂히는 리하르트의 냉기 어린 눈빛에 흠칫 놀랐다.
‘왜………? 내가 뭐 잘못했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는 톰슨과 리하르트 사이로 엘리사가 끼어들었다.
“무슨 일에요, 톰슨 경?”
“아, 다름이 아니고요. 조금 전에 정찰대를 보냈는데, 요 며칠 날이 따뜻해서 길이 다 녹았다고 하더라고요.”
“아하.”
“그래서 오늘 빠듯하게 달리면 저녁쯤에는 제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원래 일정은 오늘 해 질 녘에 도착하는 영지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아침에 여유롭게 출발하여 내일 정오쯤 제도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집에서 자는 게 좋긴 한데……..’
하지만 장시간 이동이 힘든 사람들도 분명 있을 터였다.
엘리사는 두 선택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
점심시간이 지난 시간, 신전의 아이들은 땔감을 줍기 위해 근처의 산으로 나왔다.
그 무리에 리온도 있었다.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열다섯살 큰형 벤자민이 리온의 손을 잡았다.
“리온, 성하께서 하셨던 말씀 기억하지? 절대로 형 옆에서 떨어지면 안 돼.”
“웅. 아라써!”
해가 바뀌며 다섯 살이 된 리온은 신전의 소일거리를 거들 수 있게 되었다.
리온은 사실 연말부터 새해를 손꼽아 기다려 왔다.
매일 땔감을 구하러 신전 밖으로 나가는 형들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에이든은 처음엔 이제 겨우 다섯살이 된 리온이 위험해질까 땔감을 주우러 가는 걸 말렸으나, 머리 큰 형들이 리온을 잘 데리고 오겠다며 나서자 못 이기는 척 허락해 주었다.
무엇보다 리온이 신전에 온 이후, 황제와 로제의 눈을 피하느라 신전에서만 키운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까악이는 까악까악! 늑대는 으르릉으르릉!”
리온이 벤자민의 손을 잡고 신나게 산길을 걷던 그때, 장난을 치며 앞서가던 형들 중 하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으악!”
“헉, 잭!”
“잭, 다친 데는 없어?”
우스꽝스러운 꼴로 넘어진 잭은 머쓱했는지, 금세 벌떡 일어났다.
잭에게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한 벤자민은 동생을 타박했다.
“그러게, 장난치지 말라니까. 옷이다 더러워졌네.”
신전 아이들이 일괄적으로 입는 검은색 어린 사제복이 낙엽과 흙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잭의 손바닥과 뺨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벤자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근처에 호수가 있으니까, 거기가서 손이랑 얼굴이라도 씻고 가자.”
벤자민은 동생들을 근처의 호숫가로 데려갔다.
겨울의 호숫가는 한적했다.
호수 반대쪽을 거닐고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고위 귀족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를 제외하고는.
벤자민은 그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벤자민과 리온 일행이 있는 곳은 산에 가까웠고, 여자가 있는 쪽은 아카로아 외곽으로 마차들이 종종 지나다니는 대로와 가까웠다.
‘어디 가는 길에 잠깐 들른 건가 보다.’
그 여자가 아렌시아의 황태자비인 줄 모르는 벤자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얘들아, 저쪽은 쳐다보지 마.”
높으신 분들은 간혹 아이들이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 나빠하기도 했다.
괜스레 그들의 심기를 거스를 빌미를 줘서 좋을 게 없었다.
벤자민은 손수건에 물을 묻혀 잭의 얼굴과 손을 닦아 주었다.
리온은 벤자민의 말대로 형의 옆에 꼭 붙어서 기다렸다.
그렇게 잭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 다시 산으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베, 벤자민 형!”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들의 겁에 질린 목소리가 들려 왔다.
벤자민이 의아해하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눈이 붉게 빛나는 몬스터 무리가 있었다.
해골처럼 보이는 몬스터도 있었고, 다 썩어 가는 인간의 형상을 한 몬스터도 있었으며, 흡사 늑대와 비슷한 형상의 몬스터도 있었다.
족히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무리였다.
“모, 몬스터?”
벤자민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눈앞의 몬스터들을 보았다.
이 산은 신전과 가까워 성기사들이 수시로 둘러보는 곳이었다. 그 때문에 몬스터나 맹수 같은 위험한 것들은 여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몬스터들이 나타나다니.
벤자민은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호수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쪽 역시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들과 대치 중이었다.
“얘들아, 이리 와!”
벤자민은 떨리는 목소리로 몬스터들과 가까이 있는 동생들에게 소리쳤다.
그 순간, 몬스터들이 아이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으아악!”
그 광경을 지켜보던 리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으나, 이내 아이의 커다란 적금안에 선명한 살의가 어렸다.
“형아들 개로피지 마!”
그와 동시에 리온에게서 강렬한 불꽃이 발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