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산불이 번진 산 아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불길을 진압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쪽, 그쪽으로 바람이 분다. 불길이 번진다! 빨리 불을 꺼!”
그들은 이 겨울밤에 땀이 나도록 양동이에 호수의 물을 퍼다 날랐다.
‘여기서 불을 잡지 못하면 집까지 번진다……!’
사람들은 집과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힘을 합쳤으나, 메마른 나뭇잎이 가득한 산은 그보다 빠르게 불길을 옮겼다.
부지런히 물을 길어 나르던 한 남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그 바람에 나르던 양동이가 엎어지며 물이 그대로 쏟아졌다.
남자는 나뒹구는 양동이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진 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젠 틀렸어. 바람이 거세서 불이 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그러자 물을 길어 오던 한 남자가 넘어진 남자의 팔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이봐!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할 텐가? 어서 일어나! 하는 데까진 해봐야 할 거 아냐? 우리 집이라고!”
“…….”
“젠장! 이럴 때 기사들은 뭐 하는 거야?”
제국에 소속된 기사들은 아카로아의 치안과 제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산불이 번지면 나서서 불길을 진압해야 하는 것 역시 그들의 임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기사단으로 이 소식을 전할 사람을 보냈음에도, 기사들은 오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넘어진 남자를 포기한 채 양동이를 들고 먼저 앞질러 갔다.
그러다 마찬가지로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아………. 젠장할.”
거센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집을 삼킬 듯 점점 더 다가오는 산불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던 그때.
등 뒤에서 말의 울음소리와 여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 인기척을 느낀 사람들이 돌아본 곳에, 말에서 내리는 에이든과 성기사단이 있었다.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
“교황 성하!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망연자실해 있던 사람들도, 발을 동동 구르며 불길을 진압하던 사람들도 에이든을 보자, 얼굴에 희망의 빛이 어렸다.
에이든은 민가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급한 불길을 세리어트의 힘으로 어느 정도 진압한 후, 호수로 다가갔다.
‘이 불길을 다 잡기엔 힘에 부친다..’
그는 여러 개의 정화의 샘을 유지하는 데 이미 큰 힘을 쓰고 있기에, 산불을 전부 진압하기엔 버거웠다.
그렇게 판단한 에이든은 호수의 물을 끌어 쓰기로 했다.
그는 호수의 물을 거대한 물방울형태로 만들어 하늘에 띄웠다.
호수만 한 크기의 거대한 물방울이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세상에…….’
사람들은 그 광경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에이든은 물방울이 터지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며 물방울을 산불이 번지고 있는 산 중심으로 이동시킨 후, 터트렸다.
펑!
그러자 산불이 번진 곳곳에 물이 흩뿌려지며 불길이 일시적이나마 약해졌다.
에이든은 그 과정을 몇 차례 반복하여 불길을 어느 정도 진압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의 이마에 땀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에이든에게 다가와 연신 넙죽넙죽고개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하. 성하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어찌 되었을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불길이 더 번지지 않도록 막아 준 덕분입니다. 다만, 아직 곳곳에 작은 불씨가 남아 있을 테니 힘에 부치더라도 진화에 나서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당연히 저희가 해야 할 일이죠. 정말 감사합니다!”
그전까지 좌절했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의욕을 불태우며 남은 불씨 진압 작업에 착수했다.
에이든은 성기사들에게도 동일한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또 다른 명령 하나를 더 내렸다.
“저와 함께 리온을 찾는 것을 도와주시겠습니까.”
“신성하신 명을 받듭니다.”
성기사들은 에이든의 지시에 따라 불길이 진압된 산으로 향했다.
그들과 함께 리온을 찾아 나서는 에이든의 머릿속으로 이곳에 오기 전, 벤자민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호숫가에서 손을 씻는데, 갑자기 몬스터들이 나타났어요. 그래서 잠시 머뭇거리던 벤자민은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실을 요구하는 에이든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눈빛을 보고는, 말을 이었다.
리온이 우리를 지키려고 불을 만들었어요. 몬스터들을 쫓아낸 후엔 다시 불이 꺼졌는데…… 기사들이 다가와서 리온을 잡아가려 했어요.
그때 미처 끄지 못한 불씨가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리온이 카이로트의 힘을 사용한 건 예상했던 바였다.
에이든은 갑자기 등장한 ‘기사들’에 대해 물었다.
그 기사들이 누군지 알고 있느냐?
그들이 왜 갑자기 리온을 데려가려고 한 것이야?’
‘모르겠어요……. 저희는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높으신 분? 그 기사들과 같이 있던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하느냐?’
벤자민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말했다.
흑발에 자수정색 눈동자를 가진 젊은 귀부인이었어요. 입고 있는 옷이 엄청 비싼 옷 같았는데……….
벤자민의 대답에 에이든의 한쪽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흑발에 자안을 가진 여자가 엄청 희귀하진 않지만, 벤자민이 보기에도 높은 귀족 같아 보였다면 후보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황태자비가 리온의 존재를 알아챘다.’
상념에서 벗어난 에이든은 초조한 마음으로 산을 수색했다.
로제보다 먼저 리온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리온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 역시 들리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식이 들려왔다.
“성하. 반대쪽 산에서 또 다른 불길이 치솟았다고 합니다.”
*
그 시각, 루벨린 공작가 일행이 탄마차 행렬이 아카로아로 들어서고 있었다.
‘뭐니 뭐니 해도 집이 최고지.’
오늘 낮, 공작저로 직행할지 천천히 갈지 고민하던 엘리사가 공작저로 직행하는 선택지를 골랐기 때문이다.
마차 안, 엘리사와 하네스는 긴 여정으로 지쳐 잠들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두 사람이 편히 잘 수 있도록 제 어깨와 품을 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찬 기운에 감기라도 들세라, 털 담요를 꼼꼼히 여며 주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곧이어 톰슨이 마차 창문을 톡톡두드렸다.
리하르트가 창문을 열자, 톰슨이 나직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각하. 송구하오나, 길을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이지?”
“마을 인근의 산에 불이 났다고 하는군요. 진압에 시간이 좀 걸릴 듯 하니 돌아가는 것이 좋겠”
“이 마차는 산불의 진원지로 가고, 나머지는 먼저 공작저로 가도록 해요.”
어느새 잠에서 깬 엘리사가 톰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갑자기 들려온 엘리사의 목소리에 놀란 리하르트가 돌아보았다.
“엘리사?”
“지금 이 일을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나니까. 힘을 가진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지.”
리하르트는 긴 여행으로 피곤할 엘리사가 걱정되었지만, 그녀의 말이 옳았다.
리하르트까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톰슨은 곧장 그들의 지시를 일행에게 전하러 갔다.
그사이 엘리사는 유모에게 잠든 하네스를 맡겼다.
이윽고 엘리사와 리하르트, 두 사람을 태운 마차와 루벨린 기사단이 산불의 진원지로 향했다.
*
타닥타닥 -
평소 같으면 산이 어둠에 잠겨 고요했을 시간.
오늘은 갑자기 솟구친 강렬한 화마에 삼켜져 소리를 죽였다.
밤이면 들리던 부엉이 소리, 늑대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불길 속작은 인영이 웅크리고 있었다.
리온은 초점을 잃은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눈앞의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윽….”
리온을 잡으려던 기사들은 불길에 데어 도망간 지 오래였다.
그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불을 꺼도 되지만, 힘이 통제되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와 긴장으로 마나가 불안하게 요동치는 바람에 힘을 사용 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거센 불길도 감히 힘의 주인인 리온을 태우지는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온을 제외한 모든 것을 태웠다.
봄을 기다리던 산의 나무들도, 깨어날 준비를 하던 곤충들도.
리온은 까맣게 탄 곤충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렸다.
“미아내…….”
아이는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고개를 무릎에 파묻었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하늘에 있는 엄마는 이제 만날 수 없으니, 성하가 보고 싶었다. 누나가 보고 싶었다.
‘리온이가 불을 사용해서…… 성하랑 누나가 화났게찌?’
두 사람이 화가 나서 저를 찾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서러움이 북받쳤다.
제어되지 않는 불길 속에 있는 것보다, 다시 혼자가 되는 것이 무서웠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것이 두려웠다.
리온은 결국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잘모해떠요……….”
두려움이 극에 달한 아이가 숨이 넘어갈 듯 울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거대한 물의 장벽이 솟아 올랐다.
리온은 울음을 멈추고 그것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물의 장벽이 무너지며 리온을 에워싸고 있던 불길을 꺼트렸다.
그 바람에 불이 꺼지며 연기가 흩날렸다.
“콜록콜록….”
리온이 기침을 하며 눈을 감았다 뜬 그 순간.
불어 닥친 바람이 연기를 날리고, 그 연기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리온!”
그토록 기다리던 누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