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한 시간 전,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탄 마차가 산불이 번지고 있는 산 아래에 도착했다.
그곳엔 한발 먼저 도착한 에이든이 있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마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섰다.
“아버지.”
“엘리사. 돌아왔구나.”
세리어트의 힘을 이용하여 불길을 진압하고 있던 에이든이 반색을 비쳤다.
엘리사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듣기 전, 물의 장벽을 펼쳐 급한 불부터 껐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에이든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불, 리온의 힘이란다.”
“리온의 힘이라고요?”
“그래.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그 아이가 만들어 낸 불이야.”
에이든의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의 눈이 놀라 커졌다.
에이든은 엘리사에게 지금까지의상황을 설명했다.
리온이 아이들과 함께 땔감을 구하러 갔는데 갑자기 몬스터들이 출몰했고, 리온이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때마침 그곳을 지나던 로제가 그런 리온의 정체를 알아채고 기사들에게 리온을 추적하게 했다는 이야기까지.
‘몬스터’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고, ‘로제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엘리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엘리사는 결의에 어린 눈으로 아직 불타고 있는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서 리온을 찾아야겠어요.”
리온이 스스로 이 불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건, 불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뜻이었다.
서둘러 아이를 구해야 했다.
“상공에서 살펴보고 올게.”
리하르트는 리온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가 리온을 데려오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그가 부른 바람이 불길을 더 번지게 하거나 더 키울 수도 있기에 가까이 접근할 수는 없었다.
엘리사가 불을 끄고 있는 동안, 상공을 선회한 리하르트가 돌아왔다.
“이쪽이야.”
“리온은, 괜찮습니까?”
에이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하르트에게 물었다.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외관상으로 다친 곳은 없는 듯 보였습니다만, 울고 있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와 에이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 사람은 리하르트가 안내하는 방향을 따라 불길을 진압하며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불길 너머로 자그마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사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물의 장벽을 일으켜 불을 진화한 후, 리온에게로 향했다.
“리온!”
리온은 기적처럼 나타난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을 향해 다가서며 두 팔을 뻗었다.
“이제 괜찮아, 리온. 이리 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믿기지 않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 못하던 아이는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한 발짝.
첫 한 걸음은 무겁고 두려웠으나, 두 걸음부터는 쉬웠다.
리온은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운 걸음으로, 그러나 망설임 없이 달려가 엘리사의 품에 무너지듯 안겼다.
저를 포근히 감싸 주는 온기와 부드럽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지자, 긴장이 풀리며 울음이 터졌다.
“흐아앙!”
엘리사는 울음을 터트리는 리온을 소중히 감싸 안았다.
아이의 작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에서 이 어두운 산, 통제되지 않는 힘 속에서 홀로 두려웠을 아이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전해지는 그 선연한 감정들이 너무나도 마음 아파 울컥 차올랐다.
이제 겨우 다섯 살 된 리온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일들이었다.
엘리사는 제 품을 파고드는 아이를 더욱 소중히 보듬어 안아 주었다.
저가 구원 줄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매달려 오는 아이를 놓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리온.”
그렇게 속삭이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엘리사의 눈가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
에이든은 화재 현장에 남아 정리를 하기로 했고, 엘리사는 리온을 데리고 공작저로 왔다.
여전히 덜덜 떠는 아이를 두고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가 않아서였다.
리온은 마차 안에서도 엘리사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그녀의 품에 꼭 붙어 있었다.
“도착했습니다, 각하. 마님.”
마차가 도착하자, 리하르트는 리온에게로 팔을 뻗었다.
“내가 안을게.”
그는 엘리사에게 무리가 갈까 봐자신이 아이를 안으려 했으나, 리온은 엘리사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 몸을 움츠렸다.
“난 괜찮으니까, 업무 보고 와.”
엘리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리하르트를 먼저 집무실로 올려 보냈다.
그는 이번 화재 관련으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엘리사는 리온을 안고 2층의 욕실로 올라왔다.
욕실 앞에 엘리사를 기다리고 있던 하녀들이 있었다.
그들은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있는 리온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도련님은………?”
“친척 아이야. 저번에 아버지와 함께 왔었던.”
하녀들은 그제야 에이든과 리온이 함께 공작저를 방문했던 것을 떠올리곤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리온의 옷과 손에 묻은 검댕을 보고 말했다.
“도련님을 씻겨 드릴까요?”
“아니, 내가 할게. 너희는 가서 쉬어.”
엘리사는 하녀들을 돌려보내고 리온과 함께 욕실로 들어왔다.
“리온, 우리 목욕할까?”
“얼른 씻고 코 자자. 응?”
엘리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어르자, 엘리사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내내 꿈쩍도 하지 않던 리온이 꾸물꾸물 고개를 들었다.
아이가 조금 전까지 얼굴을 묻고 있던 옷은 눈물과 콧물로 축축했고, 아이의 얼굴에 검댕까지 섞여 범벅이 되어 있었다.
엘리사는 리온의 옷을 벗기고 욕조로 데려갔다.
그리고 욕조에 들어가기 전, 아이가 손을 먼저 물에 담가 보게 했다.
“안 뜨겁지?”
리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을 욕조에 담그고 아이의 조그마한 몸에 천천히 물을 끼얹었다.
따뜻한 물이 닿자, 미세하게 떨리던 아이의 몸이 완전히 진정되었다.
그러자 엘리사에게 얌전히 몸을 맡기고 있던 리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람들 안 다쳐써?”
불길 속에서 구해진 후, 아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서 아이가 안고 있는 죄책감이 느껴졌다.
저 조그마한 아이를 짓눌렀을 감정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릿해졌다.
‘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
아이가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스스로를 지키려고 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나.
물론 통제할 수 없는 리온의 힘으로 인해 사람들이 위험해질 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미 스스로도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아이에게 지금 당장 그 사실을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아이가 조금 진정된 후에 말해 줘도 늦지 않았다.
엘리사는 일부러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응. 다들 괜찮아. 나랑 성하가 빨리 물을 뿌려서 다 꺼 버렸거든.”
엘리사의 대답에 리온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으나, 이내 다시 시무룩해졌다.
“불…… 써서 미아내.”
“형아들 얘기 들어 보니까, 리온이 형아들 구해 주려고 하다가 그런 거라며? 괜찮아.”
엘리사가 리온을 다독여 주자,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 아이는 조잘거리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뿐 동물드리 나타나서 형아들을 아야 하게 하려구 해서 혼내 줘써.
그리고 불 끄려고 했는데…… 나뿐아저씨들이 쪼차와서….”
“그럼 불이 난 건 아저씨들 때문이 네. 그 아저씨들만 없었으면 리온이불을 다 껐을 테니까. 그치?”
엘리사의 말을 잠자코 듣던 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엘리사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아니, 엘리사의 말은 무조건 맞았다.
그녀는 항상 옳은 말만 하니까.
엘리사는 리온의 뺨을 감싸 쥐고 눈을 맞추며 말을 이었다.
“리온이 아니었으면 형들은 몬스터들한테 크게 다쳤을 거야. 형들은 네게 아주 고마워하고 있어.”
“지쨔?”
“응. 잘했어, 리온.”
웃으며 말하는 엘리사를 멍하니 바라보던 리온의 입가에도 그제야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
엘리사는 리온과 함께 목욕을 마치고 침실로 돌아왔다.
욕실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엘리 사의 품에 안겨 있던 리온은 목욕을 마치고서는 제 발로 걸어 엘리사의 침실까지 왔다.
다만 엘리사의 손만은 꼭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요기 누나 방이야?”
“응. 오늘은 나랑 같이 자자. 괜찮지?”
“웅!”
엘리사의 말에 리온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리온이 자연스럽게 엘리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런 리온의 행동에 엘리사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리온이 침대에 눕자마자 자연스럽게 제게 안겨 온다는 건, 리온과 함께 자는 에이든이 리온을 안아 준다는 뜻이니까.
‘아버지, 처음엔 리온을 맡길 꺼리 시더니.’
리온을 처음 데리고 갔을 때, 꺼리던 에이든의 모습과 괴리감이 느껴져 웃음이 났다.
엘리사는 그새 가물가물 감기는 리온의 눈을 보고는 아이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은 꿈 꾸렴, 리온.”
“우웅….”
길고 고된 하루에 피곤했던 아이는 금세 잠들었다.
엘리사는 잠든 리온의 배를 토닥이며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창 사랑받고, 어리광부리고 싶을 나이인데.’
리온을 처음 만났을 때도 아이가 안타깝고 안쓰러웠지만, 하네스를 낳고 나니 더욱 마음이 쓰였다.
내 아이가 소중하고 어여쁜 만큼, 눈앞의 이 아이도 아이의 엄마에겐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어여쁜아이였을 텐데.
이렇게 예쁜 아이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녀의 마음을 떠올리면 울컥 마음이 아파 왔다.
엄마의 사랑에는 비할 수 없을지라도, 이 어여쁜 아이에게 부족하나마 사랑을 나눠 주고 싶었다.
“리하르트가 올 때까지 깨 있으려고 했는데…… 졸리네.”
엘리사가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하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마님, 주무세요?”
“아니, 들어와.”
하녀는 방으로 들어와 엘리사에게 편지를 내밀었다.
“이 편지를 가져온 남자가 답변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이 늦은 시간에 편지라니.
엘리사는 미심쩍은 눈으로 편지 봉투를 살폈다.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은 편지였다.
봉투를 열어 편지를 꺼내 보니, 그곳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로제 카이로트.’
오늘의 일에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의 이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