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톰슨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린 리하르트는 목욕을 마치고 곧장 침실로 왔다.
부부의 침대에 엘리사와 리온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리온은 이미 깊이 잠든 상태였고, 엘리사는 잠든 리온의 배를 토닥이며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제 아내의 다정함과 따뜻한 마음씨를 사랑했고, 리온의 일역시 안타깝게 생각했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문득 위기감을 느꼈다.
“…역시 둘째는 안 되겠어.”
둘째까지 태어나면 엘리사를 아이들에게 아예 빼앗겨 버릴 것이 분명했다.
리하르트는 잠든 리온의 머리맡에 다가앉았다.
“오늘의 방해꾼은 이 녀석인가.”
그의 말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엘리사가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오늘만 리온이랑 같이 자려고 하는데, 괜찮지?”
리하르트는 잠든 리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모처럼 만에 엘리사를 안을 생각에 들떴던 그의 욕망은 내심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으나, 자신이 그녀를 이길 수 있을 리 없다.
리온을 허락해야 그녀의 마음이 편할 테니까.
리하르트는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나를 구했네.”
“응?”
“이 녀석이 몬스터로부터 신전 아이들을 구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역시 이번 일에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엘리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루벨린 병력의 일부를 이쪽으로 보내라고 했어. 당분간 그게 좋을 것 같아서.”
리온과 아이들이 땔감을 구하러 갔던 산은 성기사들이 관리하여 몬스터나 위험한 짐승들이 없는 곳이다.
그런 곳에 몬스터가 출몰했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분명 내가 가진 이 힘과 관련이 있겠지.’
아이들이 땔감을 주우러 갔던 그 시각에 자신이 있었던 곳의 위치를 생각해 보면, 길을 빙 돌아오긴 했으나 실질적으론 아카로아와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전에 몬스터가 출몰했던 구역과 당시 자신과의 물리적 거리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보단 꽤 멀었다.
그렇다는 건…….
‘이 힘이 영향을 미치는 반경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뜻.’
자신이 가진 이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해결할 방법을 찾을 때까진, 이 힘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도록 막아야 한다.’
리하르트는 그 생각으로 루벨린 본성의 병력 일부를 아카로아로 소환한 것이었다.
“급한 일이 정리되는 대로 신목의 숲으로 떠날까 하는데, 괜찮겠어?”
“그럼, 당연하지. 체력 회복은 며칠이면 충분한걸?”
엘리사는 씩 웃으며 씩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리하르트의 얼굴에도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리하르트는 리온을 사이에 두고 엘리사와 마주 보고 누우며 물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는 이후 리온의 거처를 묻고 있었다.
마침 엘리사도 그것을 고민하던 차였다.
‘로제가 리온의 거처를 알아 버린 이상, 신전에 더 둘 수는 없어.’
신전은 외부인의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라 로제가 접근하기 쉬울 터였다. 위험했다.
‘우리가 지켜 주려면 루벨린이나 세리어트 영지로 보내는 것이 좋겠지만…….’
그랬다간 여주인공과 리온의 만남이 틀어질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아직 리온은 자신의 힘을 다루는 데 서툴렀다.
또 한 번 오늘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에이든과 자신이 곁에 없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될지도 몰랐다.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 아이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만 우리가 키우는 게 어떨까?”
*
다음 날 오후, 엘리사는 로제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로제가 만나자고 한 곳은 아카로아광장 외곽의 한 카페였다.
엘리사는 광장의 카페에서 만나고자 하는 로제의 의도를 간파했다.
‘요양을 갔다더니, 아카로아에 들어온 사실을 황실에 숨기고 싶은 건가.’
황후가 로제를 요양 보낸 것이라 했으니, 로제가 아카로아에 들어온 것을 알면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무엇보다…… 어제 일에 연루되었단 사실을 숨기고 싶은 거겠지.’
엘리사는 무심코 제 품에서 덜덜 떨던 리온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려 홀로 카페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가온 카페직원은 카페의 뒷문과 연결되어 있는 온실로 엘리사를 데려갔다.
온실 군데군데에 테이블이 놓여 있었으나, 손님은 없었다. 로제가 카페를 통째로 빌린 듯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직원이 물러가고, 엘리사는 다가가 로제의 앞에 섰다.
평소 저만 보면 날을 세우거나, 과장된 미소를 짓던 모습과 달리 오늘은 한껏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황태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앉아. 오늘은 황태자비가 아니라네 오랜 친구로서 만나러 왔어.”
‘친구’라.
엘리사는 스스로를 ‘친구’라 지칭하는 로제의 말에 조소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친우라니요. 제가 어찌 감히 전하와 친우가 될 수 있겠어요?”
비꼬는 것이 명백한 엘리사의 말에도 로제는 그 반응을 예상했던 듯, 아랑곳하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어제 일은 오해야.”
“오해라뇨?”
“그 아이, 죽이려고 한 게 아냐.”
이미 한 번 크리스티안의 사생아들을 찾아 죽이려 했던 그녀가 하기엔 우스운 말이었다.
엘리사는 일단 잠자코 들었다.
“너도 들었지? 황태자 전하께서 정부를 들이려고 한다는 거. 난 그 아이를 데려가서 내 양자로 들이려고 한 거야. 그러니, 그 아이를 내게 -”
그 아이는 제가 키울 겁니다.”
엘리사는 로제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
그에 로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아일 네가 왜?”
“전하께선 그 아이를 그저 ‘유용한 카드’로 볼 뿐이시잖아요?”
“자신의 자리를 유지해 줄 카드로 쓰다가, 전하께서 황손을 보면 언제 든 내다 버릴 그런 카드.”
“…….”
“제 말이 틀렸나요?”
제 속내를 들킨 로제는 반박하지 못한 채 애먼 제 입술만 짓씹다, 겨우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데리고 있다가, 폐하께 들키기라도 하면? 그땐 어떡할 건데?”
“그땐 황태자비 전하께서 귀한 황손을 죽이려 하셔서 안전하게 보호 중이었다고, 진실을 밝혀야겠지요.”
엘리사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로제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너… 나한테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전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나요?”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반문함과 동시에,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싸늘한 눈빛으로 돌변하여 말을 이었다.
“너 때문이잖아.”
“……..”
“네가, 네 욕심 채우려고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려 해서.”
엘리사의 서늘한 목소리와 눈빛이 로제를 궁지로 몰았다.
그에 잠시 멈칫했던 로제는 이내 악에 받친 목소리로 반박했다.
“너라도 그랬을 거야! 내 입지가 위태로워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다들 내 탓만 하는데!”
“아, 그 점은 나도 안타깝게 생각해. 이리저리 나도는 우리 황태자 전하야말로 천하의 나쁜 놈이지.”
같은 여자라서일까. 의외로 엘리사는 로제의 안타까운 처지에 공감해 주었다.
로제는 그 기세를 몰아 엘리사에게 감정으로 호소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리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그래서?”
“…어?”
“네가 불쌍하면, 그런 너를 위해서죄 없는 아이들은 죽어도 되는 존재야?”
정곡을 찌르는 엘리사의 말에, 로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엘리사는 로제가 반박하기 전에 못을 박았다.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죄없는 아이들을 죽이려 했던 네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어.”
“……”
“그냥 살인미수범일 뿐이지.”
말을 마친 엘리사는 볼일은 끝났다는 듯, 로제의 말을 더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앞에 놓인 찻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허튼수작을 부리다간 네 죄가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갈 수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황태자비
“전하.”
엘리사는 ‘황태자비 전하’에 묘하게 악센트를 실었다.
아직은 ‘황태자비’ 이나, 리온에게 접근할 경우 그 신분마저 박탈당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경고였다.
엘리사는 말을 잇지 못하는 로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
리하르트는 오랜만에 귀족 회의에 참석했다.
진리의 탑에 가 있는 동안엔 참석하지 못했으니, 실로 간만의 출석이었다.
그가 귀족 회의에 참여하지 못한 한 달여 간 회의의 분위기는 사뭇다르게 바뀌어 있었다.
예전엔 리하르트의 의견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황가의 세력이 많았으나, 오늘은 리하르트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늘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회의의 분위기를 바꾼 원인을 단박에 눈치챘다.
‘세리어트의 힘이군.’
엘리사가 정식으로 세리어트 후작위를 이어받으면서, 루벨린 - 세리어 트의 세력에 붙으려는 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엘리사가 이루어 낸 결과였다.
‘엘리사가 알면 기뻐하겠지.’
뿌듯해할 엘리사의 모습을 떠올리자, 그의 입가에 절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황실의 세력이 줄어든 덕에 평소보다 회의가 빠르게 정리되었다.
리하르트는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에게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서둘러 회의실을 나왔다.
그때였다.
“간만에 뵙습니다, 루벨린 공작 각하.”
회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 남자가 불쑥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리하르트는 그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고 표정을 굳혔다.
일전에 엘리사가 위험에 처했을 때, 저를 레이모어에게 인도하려 접근했던 그 남자였다.
그의 등장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공작 각하를 모셔 오라 명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