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남자가 리하르트를 안내한 곳은 한 적한 교외에 있는 낡은 저택이었다.
겉보기엔 관리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폐가였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가 굳이 이런 곳에서 만나자 한 이유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황제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군.’
현재 레이모어는 황제의 신임을 잃은 상태다.
아니, 신임을 잃은 것을 넘어 도려 내질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모어가 리하르트와의 접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면 황제의 의심을 살 터였다.
황제에게서 내쳐진 그가 루벨린에 붙으려 한다는.
이십 년간 황제의 최측근으로 살아온 그는 황제의 약점을 제일 잘 알고 있을 테고, 그것이 루벨린에 넘어가면 황제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다.
리하르트 쪽에선 조금도 레이모어를 받아들일 마음이 없지만, 그것을 모르는 황제는 미연의 일을 방지하기 위해 레이모어를 죽이려 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제 목숨은 소중하단 건가.’
리하르트는 레이모어의 심리를 간파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리하르트를 이곳까지 안내한 남자는 저택의 문을 열어 주고 물러났다.
리하르트는 톰슨과 기사들을 바깥에 대기시킨 채 홀로 낡은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저택은 걸을 때마다 바닥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저택 중앙 홀 옆으로 보이는 접견실로 들어서자, 그곳엔 레이모어가 기다리고 있었다.
예의 재미있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진리의 탑에서 구하던 답은 찾으셨습니까?”
“덕분에.”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들이 있겠지요. 예를 들면…….”
레이모어는 리하르트에게 다가서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왜 그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 같은 의문들.”
“…….”
“그 의문들에 답해 드리지요.”
돌아서 소파에 앉는 그의 등 뒤로 섬뜩한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경고처럼 날아왔다.
“그리고 물론, 네놈의 정체도 밝혀야 할 것이고.”
리하르트는 레이모어를 따라 소파에 앉았다.
“우선은…… 옛날이야기로 시작하지요.”
레이모어는 바랜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일곱 살쯤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모친께서 죽어 가는 가엾은 여자를 하나 구해 오셨습니다.”
“…….”
“어느 날부턴가 그 여자는 부친의 침실에 드나들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여자의 배가 불러 왔습니다. 여자의 배가 불러올수록 모친께서 저를 매질하는 횟수가 늘어났지요.”
“…….”
“모친께선 제게 줄곧 말씀하셨습니다. 신께선 실패작은 원하지 않으신다고.”
리하르트는 미심쩍은 눈으로 레이 모어를 바라보았다.
불우한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내는 레이모어의 저의를 알 수가 없었으나, 일단은 잠자코 듣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은 병상에 누웠고, 저는 매일매일 약을 손수 가져다드렸습니다. 그 약에 여자가 넣은 독이 들어 있는 것을 다 알면서도.”
“모친의 장례식에서 생각했습니다.
어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이를 배신할 수 있을까. 어찌 저를 낳아준 어미를 죽일 수 있을까.”
“…….”
“인간은, 어찌 이리 악할까.”
레이모어가 모친의 독살을 방조했다는 대목은 조금 놀라웠으나, 그뿐이다.
리하르트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레이모어 본인 역시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양, 머뭇거리는 기색도 슬픈 기색도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후 십여 년, 영지를 돌보며 줄곧 가지고 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얻었지요.”
“……..”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던 이도 스스럼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인간들. 세상에서 가장 나약하고, 동시에 사악한 존재들.”
“…….”
“인간은, 신의 실패작이라는 걸.”
“…….”
“그러던 어느 날, 협곡에서 신의 뜻을 마주했습니다.”
‘협곡’이란 단어에 리하르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에서 자신이 알고자 하는 정보가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이 세상을 혼돈으로, 죽음으로, 종내엔 멸망으로 이끌 힘을 가진 영혼을 말입니다.”
레이모어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협곡 너머의 불길한 기운이 요동치 자, 선황제는 정화의 힘을 가진 에이든과 측근이었던 레이모어를 보냈다.
두 사람은 협곡을 조사하기 위해 협곡 너머의 오염된 땅으로 들어섰고,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힘과 마주했다.
그 힘은 에이든을 포함하여 동행했던 모든 이들에게 치명상을 입혔으나, 레이모어만은 공격하지 않았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검고 탁한 존재.
세상 그 어떤 생명이든 집어삼킬수 있는, 두려운 힘을 가진 영혼.
“그 영혼을 마주한 순간 운명처럼 깨달았지요. 모친의 말씀대로 신께선 실패작을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
“신의 뜻을 받들어 실패작을 없애는 것이 제 사명이라는 것을.”
‘사명’을 언급하는 레이모어의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레이모어가 말하는 ‘사명’이란 신의 실패한 피조물을, 인간들을 전부 죽이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리하르트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완전히 미쳤군.”
하지만 레이모어는 리하르트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 영혼의 절반을 가지고 협곡 밖으로 나와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그는 온전한 영혼을 가지고 나가려 했지만, 두 개로 나뉜 영혼 중 하나는 오염된 땅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영혼의 반쪽만 가지고 나왔다.
“협곡 인근에 머물며 오염된 땅을 조사하는 동안, 인근 마을에서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를 치료해 달라는 한 여자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
“신기하게도, 여태 조용하던 영혼이 죽어 가는 그 아이에게만은 반응하더군요.”
“……”
“저는 죽어 가는 그 아이에게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아이의 숨이 끊어진 찰나의 순간, 영혼이 그 몸에 흡수되며 아이가 다시 살아났지요.”
“…….”
“그 아이가 바로 당신입니다.”
진실을 들은 리하르트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허무맹랑하고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레이모어의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가진 힘의 근원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열병으로 죽은 ‘리하르트’의 몸을 차지한 반쪽짜리 검은 영혼.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었다.
“당신은 실패한 이 세계를 멸망시킬, 단 하나의 성공작입니다.”
“…내가 그 뜻대로 움직일 것 같나?”
“물론 그러지 않으려고 하시겠지요. 하나 애석하게도, 당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의 말을 증명하듯, 리하르트에게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검은 기운은 억제되긴커녕, 더욱 짙어져 결국엔 엘리사의 펜던트에 금을 그었다.
그것을 본 레이모어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두 개로 나뉘었던 영혼이 하나로 합쳐졌으니, 이젠 시간문제였다.
“아무리 그래도 처자식을 당신의 손으로 죽이게 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겠습니까. 하여, 제가 그 짐을 덜어 드리려 했던 것인데…”
엘리사와 하네스의 이야기가 나오자, 리하르트는 박차고 일어나 레이 모어의 멱살을 틀어 올렸다.
그리고 살기 어린 목소리로 짓씹듯 내뱉었다.
“절대, 네 놈 뜻대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이 목숨을 잘라 내서라도 멈출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등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금방이라도 레이모어를 집어삼킬 듯 위협적으로 넘실거렸다.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
그 위압감에, 웃고 있던 레이모어도 흠칫 숨을 멈췄다.
리하르트는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고민했다.
‘죽일까.’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검은 기운이 더욱 거세지며 엘리사의 펜던 트가 완전히 바스러졌다.
그러자 펜던트에서 새어 나온 정화의 힘이 그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엘리사의 펜던트를 본 리하르트는 마음을 바꿨다.
‘……아니, 내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
레이모어는 이미 황제의 눈 밖에 났으니, 곧 그의 손에 죽을 것이다.
괜히 펠리스 후작가를 건드려 가문대 가문의 전쟁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리하르트는 그의 멱살을 팽개치듯 놓고 돌아섰다.
그리고 곧장 접견실을 나가려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췄다.
“그대는 내 걱정보다 그대의 목숨먼저 걱정하는 게 좋겠군.”
“……?”
“황태자비 전하께서 제 명줄을 재촉하고 계시거든.”
리하르트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레이모어를 무시한 채 접견실을 나왔다.
그와 동시에 살기가 어려 있던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엘리사….’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죽는대도 상관없다.
제 영혼이 갈가리 찢긴대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녀는 안 된다.
그녀와 자신의 사랑의 결실인 아이는 안 된다.
이 세상이 멸망해도 지켜야 할 그녀를, 제 손으로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니.
그 생각만으로도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알게 된 그 어떤 진실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하는 이야기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엘리사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던 리하르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핏줄이 불거지도록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택에서 나온 그는 곧장 대기 중이던 톰슨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톰슨, 성하께 물건을 하나 부탁드려야겠다.”
만약의 상황에서, 너를 보호할 최후의 방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