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늦은 오후, 점심을 먹고 낮잠에서 깬 리온은 혼자서 말 모양 목각 인형을 만지며 놀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악당을 무찌르러 가자!”
한동안 목각 인형을 가지고 소파며, 침대며 마구 누비고 다니던 리온은 이내 심드렁한 표정으로 인형을 다시 장난감 상자에 넣었다.
상자에 나무와 천으로 만든 다양한 장난감들이 들어 있었다.
오늘 아침, 엘리사가 사용인들에게 시켜 장난감 가게를 쓸어 오게 한 결과였다.
하지만 혼자 노는 건 지루했다.
‘누나는 언제 오지?’
리하르트는 아침에 황궁에 갔고, 엘리사는 리온과 같이 점심을 먹은 후 금방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겨울이라 화단을 살펴볼 수도 없고, 혼자서 노는 것에 질린 리온은 문득 저택에 남아 있는 한 사람을 떠올렸다.
리온은 같이 장난감을 골라 주던 앤에게 물었다.
“아가 어디 이써요?”
“아, 도련님께 가시려고요?”
“응!”
“형님이 찾아 주셔서 도련님도 좋아하시겠어요.”
앤은 저가 더 기뻐하며 리온을 하네스의 방으로 안내했다.
때마침 하네스는 막 낮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던 참이었다.
유모와 하녀들은 리온을 보고 반색을 비쳤다.
“어머나, 도련님. 형님께서 도련님을 보러 오셨네요.”
“으에?”
하네스는 커다란 연둣빛 눈을 깜빡이며 유모를 쳐다보았다.
그런 하네스를 바라보는 리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사랑스러운 동생을 볼 때 나오는, 일종의 ‘형아 미소’였다.
리온은 요람 안에 누워있는 하네스에게 다가가 히죽 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가, 안녕.”
하네스는 불쑥 다가온 리온을 멀뚱히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유모와 하녀들은 두 아이의 귀여운 만남을 기대했다.
리온 역시 하네스와의 반가운 재회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 기대는 하네스의 울음으로 인해 처참히 깨졌다.
“흐에엥!”
하네스의 갑작스러운 울음에 리온은 당황하여 주춤 물러났다.
당황한 것은 하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모는 재빨리 하네스의 배를 토닥이며 아이를 얼렀다.
그리고 적잖이 당황한 표정으로 얼어있는 리온에게 설명했다.
“도련님이 낯가림을 하시나 봐요.”
“낯가림이 모예요?”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걸 ‘낯가림’이라고 한답니다.”
유모의 설명에 리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 저번에도 봤는데.”
“아기들은 어릴 땐 눈이 잘 안 보여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다가, 점점 클수록 부끄러워하게 되어요.”
“우웅, 그러쿠나…. 나는 아가랑 친해지고 시푼데……….”
“도련님이랑 자주 놀아 주시면 금방 친해지실 수 있을 거예요.”
유모는 진리의 탑에서 선물로 받아 온 모빌의 마정석을 두드렸다.
그러자 모빌이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모는 울음을 그친 하네스의 곁으로 리온이 다시 다가오도록 손짓했다.
“자, 이리 오셔서 도련님과 놀아주세요.”
리온은 잠시 머뭇거리다 슬금슬금 다가와 유모의 옆에 섰다.
다행히 하네스는 모빌에 정신이 팔린 탓인지, 리온을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울음을 터트리진 않았다.
잠시 하네스의 눈치를 살피던 리온은 조심스럽게 동물 울음소리를 냈다.
“병아리는 삐약! 하고 울어.”
“으뱌?”
“그리고 돼지는 꿀꿀!”
“우우!”
“참새는 짹짹.”
“으에에.”
하네스는 리온의 입 모양을 유심히 보며 열심히 옹알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녀들은 저마다 심장을 부여잡았다.
‘세상에, 어쩜. 둘이 붙어 있으니 꼭 천사 같네.’
리온은 저를 빤히 보는 하네스를 바라보다, 슬그머니 제 손을 내밀어 하네스의 통통한 우윳빛 뺨을 만졌다.
그러자 하네스의 두 손이 리온의 손을 움켜쥐었다.
“아우.”
하네스는 무언가 손에 잡힐 때면 늘 그랬듯, 이번엔 리온의 손을 가져가 제 입에 넣었다.
조그맣고 통통한 혓바닥이 리온의 손을 날름날름 핥았다.
리온은 손가락이 간지러워 몸을 배배 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안 돼. 지지야. 간지러워.”
리온이 하네스에게 먹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낸 그때, 방문이 열리고 엘리사가 들어왔다.
“리온? 하네스랑 놀고 있었어?”
“누나!”
리온을 만면에 반색을 드러내며 엘리사를 보았으나, 하네스에게 잡힌 손은 빼지 않았다.
엘리사는 하네스와 리온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하네스도 엘리사를 발견하고 반가움의 옹알이를 하며 손발을 바동거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리온의 손을 잡고 있던 손은 자연히 뿌리치게 되었다.
“아우웅! 으아!”
“아구, 우리 아들. 형아랑 잘 놀고 있었어?”
“따이!”
엘리사가 하네스를 안아 들자, 하네스가 방 웃으며 화답했다.
수차례의 입맞춤으로 하네스와 인사를 마친 엘리사는 유모에게 다시 하네스를 안겨 주었다.
“하네스, 엄마는 형이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올게.”
“우웅?”
엘리사는 저를 멀뚱히 쳐다보는 하네스를 뒤로한 채 리온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으에엥!”
얌전히 유모의 품에 안겨 있던 하네스가 몸을 뻗대며 울음을 터트렸다.
“도, 도련님.”
유모와 하녀들이 딸랑이로 주의를 끌어 봐도 소용없었다. 하네스의 시선은 오직 엄마에게로 향해 있었다.
결국 엘리사는 하네스를 다시 안았다.
그러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울음을 뚝 그치고 방싯 웃었다.
‘설마 하네스가 리온을 질투한 건가?’
엘리사는 잠시 그런 생각을 했으나, 방 웃는 하네스의 미소를 보고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제 겨우 100일 된 아기가 뭘 알겠어.’
엘리사는 하네스를 안은 채 리온과 함께 수련장으로 왔다.
뒤따라온 하인들은 하네스가 앉을 아기용 의자를 두고 곧장 수련장을 나갔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아기용 의자에 앉히고 리온을 돌아보았다.
“리온. 우리 앞으로 매일매일 여기서 수련할 거야.”
“수련? 그게 모야?”
“음……. 리온이 가진 힘을 좀 더 잘 쓸 수 있도록 연습하는 거야.”
엘리사는 리온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힘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도록, 리온을 수련시킬 생각이었다.
“매일매일 연습하면, 다음엔 나쁜 아저씨들이 쫓아와도 리온이 다 무찌르고 불도 끌 수 있을 거야.”
“오, 좋아! 할래!”
리온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아저씨들을 무찌를 수 있다는 말이 아이의 의욕을 불태운 모양이었다.
엘리사는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런데 그전에 리온에게 할 말이 있어.”
“응?”
“리온, 네가 가진 힘은 아주 특별한 힘이야. 다른 사람들에겐 없는 힘이지. 리온도 알고 있지?”
“웅.”
“네가 그 힘을 잘 쓰게 되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지켜 줄 수 있어. 하지만 그 힘을 잘못 쓰게 되면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어제처럼.”
“우웅…….”
사람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리온은 귀를 쫑긋 세우고 엘리사의 말을 경청했다.
엘리사는 자신이 가진 힘에 책임감을 느끼는 리온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제의 그 일이 리온을 알게 모르게 한층 더 성장시킨 셈이었다.
엘리사는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힘을 쓰기 전에는 아주 많이 생각해 보고 써야 해. 그리고 리온의 힘은 비밀이라서, 더 조심해야 하고.”
그러자 엘리사의 말을 잠자코 듣던 리온이 울먹이며 되물었다.
“그럼 누나랑도 영원히 못 봐?”
“응?”
“엄마가 그래써. 다른 사람이 내 힘을 보면 엄마를 못 보게 된다 구…….”
“음, 영원히 못 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만나고 싶을 때 바로 만날수는 없게 돼.”
“왜?”
“왜냐면… 사실 리온은 왕자님이거든.”
언젠가는 아이가 알았어야 할 진실이다.
엘리사는 마냥 숨기기보다는, 리온에게 진실을 알려 주고 그 위험성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완쟈님?”
“동화에서 봤지? 왕자님.”
“오! 그럼 누나는 공쥬님이야?”
“으음, 공주님은 리온이 조금 더 크면 만나게 되지 않을까?”
리온의 물음에 엘리사가 풋 웃음을 터트리며 대답했다.
아니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공주님’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았다.
“아무튼, 리온은 왕자님이라서 왕자님인 걸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황궁에 가야 돼. 거기 가면 하기 싫은 공부도 많이 하고, 마음대로 놀 수도 없어. 누나도 맘대로 못 만나.”
“우웅….”
“그래도, 힘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지도 몰라. 어제처럼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을 때라든가.”
엘리사는 제 이야기를 경청하는 리온의 뺨을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그때는 망설이지 마.”
엘리사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리온이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수련해 볼까?”
“응!”
리온은 수련장의 대리석 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피워 냈다. 그 과정이 아주 능숙했다.
“부우!”
그런 리온을 지켜보던 하네스가 리온을 따라 허공에 손을 꼼지락거렸으나, 리온을 보고 있던 엘리사는 보지 못했다.
“아주 잘했어, 리온.”
엘리사는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 피어난 작은 불꽃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이 불꽃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불꽃으로 키울 것이라고,
*
리온과 수련을 마친 엘리사는 목욕을 하고 침실로 돌아왔다.
저녁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엘리사는 문득 어둑해진 창밖을 바라보곤 아직 돌아오지 않은 리하르트를 떠올렸다.
평소 같으면 그가 귀가했을 시간이었다.
‘리하르트가 좀 늦네. 다른 일이 있나?’
잠시 의아해하던 엘리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을 먹기 전, 하네스에게 가 볼 생각이었다.
엘리사가 막 침실을 나서려 방문을 연 그때, 마침 이쪽으로 다가오던 이와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