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리하르트?”
엘리사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흠칫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엔 욕실에 있어 마차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직이 말했다.
“다녀왔어.”
밖이 어둑어둑해져서일까, 어쩐지 그의 얼굴에 그늘이 진 듯 보였다.
그를 빤히 바라보던 엘리사는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잘 다녀왔어? 조금 늦었네.”
그런데 그때, 그의 등 뒤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검은 기운이 보였다.
그리고 신성력을 담은 펜던트가 깨져 있는 것도.
그것을 발견한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무슨 일… 있었어?”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방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은 후, 대답했다.
“그냥, 일이 좀 있었어.”
“그러니까 무슨 일?”
엘리사가 집요하게 묻자, 리하르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안 그 자식이 또 널 가지고 헛소리를 하기에, 좀 짜증나서.”
가문의 힘은 사용자의 기분 상태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 이유로 아직 힘을 다루는 데 미숙한 리온이 이번에 불을 끄지 못한 것이었다.
리하르트는 루벨린의 힘을 다루는 데는 능숙하지만, 검은 힘은 통제하지 못하기에 감정적인 영향을 더욱 크게 받았다.
그렇다 해도 엘리사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리하르트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하도록 두지 않았다.
“정화해 줘.”
우선은 저 위험한 기운을 잠재우는 것이 먼저였다.
리하르트는 겉옷과 상의를 완전히 벗고 그녀에게 등을 맡겼다.
엘리사는 먼저 정화의 힘을 모아 작은 마정석을 만들어 그의 펜던트에 다시 끼워 주었다.
그다음, 넓은 그의 등 위에 손을 올 올리고 정화의 힘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넘실거리던 검은 기운이 씻겨 사라지고, 대신 정화의 힘이 얇게나마 그를 감쌌다.
“다 됐-”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를 돌아본 리하르트가 그녀를 끌어 당겨 안았다.
탈의한 그의 큰 몸이 그녀를 완전히 덮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엘리사는 흠칫 놀랐으나, 그를 밀어내진 못한 채 눈만 깜빡거렸다.
맞닿은 그의 가슴으로 거세게 고동치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의 거센 심장 소리가, 어쩐지 불안해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리하르트?”
엘리사가 그를 부르자, 그는 대답대신 그녀의 입술을 찾아 맞대 왔다.
조급하지만 조심스러운 입맞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눈동자.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에 엘리사가 의문을 품은 그 순간.
“사랑해.”
애절한 고백과 함께 그가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엔 가벼운 입맞춤이 아닌, 집요하고 농염한 키스였다.
엘리사의 머릿속을 온통 지금 이 순간에만, 눈앞의 그에게만 집중시킬 정도의.
그는 엘리사를 가볍게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그 잠깐마저 아쉬운 듯, 그녀에게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였다.
리하르트는 엘리사가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몰아붙였다.
저를 애타게 갈구하면서도, 제게서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필사적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위태로워 보였다.
“으응….….”
리하르트는 숨이 막힌 엘리사의 신음을 듣고서야 겨우 입술을 뗐다.
그러고는 엘리사를 끌어안으며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엘리사.”
그는 엘리사의 온기를 온전히 품에 넣고서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은 듯 누그러졌다.
이윽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에게 닿았다.
엘리사는 무엇이 그를 불안하게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그의 불안을 달래 줄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
‘뭐 때문에……?’
그 이유가 궁금했으나, 그의 불안을 달래는 것이 먼저였다.
엘리사는 떠오르는 의문을 뒤로한 채 그를 안아 주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의 불안을 달래어 주길 바라며.
그는 그렇게 한참 동안, 그녀를 안고 있었다.
*
아카로아 외곽에 위치한 황실 별장은 오랜만에 주인을 맞이하여 분주했다.
그들은 로제를 위해 각종 고급 요리를 내어놓았으나, 로제는 좀처럼 식사를 하지 못했다.
샐러드만 조금 먹는 둥 마는 둥하는 로제를 지켜보던 하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하, 요리가 입에 맞지 않으신가요…?”
“…입맛이 없구나.”
로제는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을 나오는 로제의 안색이 파리했다.
‘그 아이의 존재를 황제 폐하와 크리스티안이 알게 되면 어쩌지…….’
로제는 엄지손톱을 짓씹었다.
엘리사는 리온을 황가에 넘길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그 아이를 거두었는지는 몰라도, 최대한 황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조심한다고 될 일인가.
로제는 살얼음판 위를 걷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제 엘리사를 만나고 온 이후 줄곧 이 상태였다.
‘아버지께 도움을 청할까?’
레이모어는 그리 살가운 아버지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매정한 아비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족관계를 떠나, ‘펠리스’라는 이름으로 묶인 이상 정치적으로 한배를 탄 동지가 아닌가.
어쩌면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버지께 가 봐야겠어…….’
로제가 그렇게 생각하며 나갈 채비를 하러 가려던 그때, 별장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차 한 대가 별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뜻밖의 방문객에 의아해하는 로제에게 별장의 관리인이 다가와 아뢰었다.
“전하,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레이모어의 예고 없는 방문에 로제는 흠칫했다.
그는 좀처럼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별장까지 찾아오다니.
먼저 그를 찾아가려 했던 로제였지만,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은 오히려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차를 내어오렴.”
로제는 하녀에게 지시한 후, 먼저 접견실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이윽고 레이모어가 접견실로 들어섰다.
“오셨어요, 아버지.”
“조용하고 공기 좋은 곳이구나. 요양하기에 제격이야.”
레이모어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후, 운을 뗐다.
“황후가 황태자의 정부를 들이려 너를 내보냈다지?”
“네….”
“내가 일전에 허튼짓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테니, 다른 일을 벌이진 않았을 테고.”
얼핏 듣기엔 로제를 신뢰하는 듯한 말이었지만, 그 속에 로제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일을 벌이진 않았는지 떠보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그런 그의 화법은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늘 그를 두려워하게 했다.
그의 말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로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레이모어는 대답 대신 그녀를 바라보았다. 말해 보라는 의미였다.
“실은 …… 작년에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의 사생아를 찾을 때, 제가 먼저 찾아 처리하려고 했었어요.”
“…….”
“그런데, 엘리사 그 계집애가 방해 하는 바람에…….”
‘엘리사’의 이름이 나오자, 찻잔을 쥐고 있던 레이모어의 손이 멈칫했다.
동시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그러다 이번에 우연히 사생아를 발견해서 제 양자로 들이려고 했는 데, 그 계집애가 그 아이를 공작저로 데려갔어요.”
“…….”
“만약 황제 폐하가 그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제가 황손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폭로할 거라면서요.”
“…….”
“황제 폐하와 크리스티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떡하죠?”
로제는 두려움에 이성을 잃은 듯한 눈으로 레이모어를 바라보았다.
그런 딸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모어는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전에 그 사생아를 죽여야 -”
짜악!
로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 모어의 손이 로제의 뺨을 쳤다.
“실패작 같으니.”
레이모어는 노기 어린 표정으로 로제를 바라보며 어제 리하르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대는 내 걱정보다 그대의 목숨먼저 걱정하는 게 좋겠군.’
그 말이 이런 뜻이었나.
레이모어는 실소를 터트렸다.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착실하게 제 숨통을 조여 오고 있었다.
레이모어는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잖아도 황제가 저를 잘라낼 궁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는 긴 세월 황제의 측근으로 있었던 만큼, 황제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 있었다.
즉, 황제는 언제든 빌미가 생기면 그 치부를 모두 없애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한때는 그것이 황제의 신임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으나 황제의 마음이 돌아서는 순간, 제 목을 옥죄는 칼날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제 딸이 황손을 살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것을 빌미로 로제도, 나도 반역죄로 몰아 내치겠지.’
황족을 살해하려 한 죄는 반역죄.
곧 처형이다.
레이모어는 이를 으득 갈았다.
‘아직 죽을 순 없다.’
이미 신의 뜻을 받들기로 한 순간부터 삶에 의의를 두지 않았다.
오직 신께서 인도하는 그 길만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을 수는 없다.
제 반평생을 바쳐 이룩한 결말만은, 두 눈으로 보아야 했다.
‘왕의 힘이 온전해질 때까지 내가 버티거나….’
아니면, 그 시간을 앞당기거나.
방법을 강구하는 레이모어의 광기 어린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