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뭐가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그의 말에 엘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 여긴 벨테인 별장이잖아! 우리 집이 아니라고! 남의 집에서 이러면……!”
엘리사가 그의 품에서 바둥거리는 사이, 리하르트는 그녀를 안고 성큼 욕실로 들어섰다.
리하르트는 한껏 붉어진 엘리사를 내려놓고 그녀의 겉옷을 벗겨 주며 그녀를 달랬다.
“후작 부인께선 다 알고 준비해 주신 것 같던데.”
리하르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깜빡이던 엘리사는 불현듯, 올리 비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녁 식사 준비를 늦게 시작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 씻고 쉬다가 천천히 내려오렴.”
엘리사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가 ‘천천히’를 강조하던 것과, 제게 윙크한 의미를.
게다가 별장 제일 위층, 제일 안쪽의 방을 내어준 이유도.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욕실의 후 끈하게 데워진 열기가 엘리사의 얼굴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리하르트는 한껏 달아오른 엘리사의 뺨과 입술에 차례로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어느새 리하르트의 손이 엘리사의 등 뒤, 드레스 지퍼에 닿아 있었다.
이제 와 도망갈 수도 없게 된 엘리사는 샐쭉한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으나, 리하르트는 그녀를 달래듯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그 달콤한 입맞춤에, 엘리사도 못이긴 척 눈을 감았다.
곧장 그녀의 입술로 다가가려던 리하르트는 잠시 멈추고 그녀를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곱게 감긴 두 눈도.
가지런히 내려앉은 길고 풍성한 속눈썹도.
홍조가 어린 보드라운 뺨도.
물기를 머금어 반짝이는 작은 입술도.
너는 알까.
너와 함께하는 모든 순간이 아쉽고 소중해서 눈을 뗄 수가 없다는 걸.
제 품에 갇힌 그녀의 모습을 기억에 새기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방으로 올라 간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고서야 식당으로 내려왔다.
기다리고 있던 올리비아가 빙긋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겼다.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깜빡 잠들었다니.”
올리비아의 말에 엘리사는 뜨끔했다.
욕실에서 리하르트가 도통 놓아줄 생각을 않는 바람에, 하녀에게 늦는다고 둘러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사람을 배려했을 거란 리하르트의 얘길 듣고 나니, 그녀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속아 주는 것 같아 민망했다.
“죄,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아. 배고플 텐데 어서 식사하렴.”
엘리사는 올리비아의 대각선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리하르트가 자리했다.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밥 먹자마자 금세 잠들었어. 2층 왼편 두 번째 방에 재워 뒀단다.”
“여러모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엘리사가 미소로 화답하자, 올리비아도 빙긋 웃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엘리사가 물었다.
“그런데 벨테인 후작님께선 같이 안 오셨어요? 이참에 같이 인사드리면 좋았을 텐데.”
엘리사의 입에서 남편의 이야기가 나오자, 올리비아의 표정이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찌푸려졌다.
“흥, 난들 아니? 본성에 앓아누워 있겠지, 뭐.”
“…두 분, 싸우셨어요?”
“아니, 글쎄. 얘기 좀 들어 봐. 아기 새 한 마리가 나무 아래에 떨어져 있지 뭐니. 리제가 그걸 발견한 모양이야.”
요약하자면, 딸에게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던 벨테인 후작이 아기 새를 둥지에 데려다주러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가 그만 떨어졌다는 이야기였다.
엘리사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많이 다치진 않으셨어요?”
“다리 하나 접질리긴 했는데, 자업자득이지.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기어이 올라갔다가다쳐서는….”
그제야 올리비아가 리제만 데리고 이 별장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엘리사는 두 사람이 싸운 이유가 귀엽고 웃겼으나, 올리비아는 부군에게 단단히 토라진 듯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신목의 숲에 간다고?”
“아, 네.”
“율리아에 대해 알아보러 가는 거니?”
“엄마에 대해선 아버지께 이야기를 들어서 거의 알고 있어요. 이번엔 신목을 찾으러 가는 거예요.”
“신목을? 왜?”
“제가 잃어버린 12년의 기억이 그곳과 연관이 있을 것 같아서요.”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힘에 대한 이야기는 숨기고 두루뭉술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신목을 만나면 답을 구하고 싶은 것도 있고요.”
신목은 전설 속에 나오는, 이 세계에 깊숙이 뿌리 내린 나무였다.
엘리사는 올리비아가 신목의 존재를 부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올리비아는 그러지 않았다.
“아하……. 머물 곳은 정했니?”
그저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머물 곳을 걱정했다.
자식이 그 어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해도 다정하게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엄마처럼.
엘리사는 그녀의 다정한 눈빛 너머로 느껴지는 따뜻한 마음에 빙긋 웃으며 답했다.
“인근 마을에서 머무르려고요.”
“그럼 하이델 마을에서 머무르는 게 어떠니?”
“하이델 마을이요?”
“율리아가 몸을 숨기는 동안 머물렀던 마을인데, 내가 알기로 신목의 숲에 있는 마을 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야. 신목의 숲 중심과 가장 가깝다는 얘기지.”
신목의 숲 중심과 가장 가깝다면, 숲을 돌아다니고 살펴보기도 편할 것이다.
“마을 사람들한테 율리아의 이야기를 하면 너를 반겨 줄 거야.”
올리비아의 말대로 아예 모르는 이방인보다는 인연이 있는 사람일수록 친근하게 대해 줄 터였다.
엘리사는 옆의 리하르트를 돌아보며 눈빛으로 그의 의견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생각과 같았다.
*
사흘 후, 엘리사 일행은 신목의 숲에 도착했다.
신목의 숲은 전설 속 신목이 있다고 전해지는 숲으로, 숲 전체의 규모가 보통의 백작령 정도였다.
이 거대한 숲에는 크고 작은 마을 들이 있었다.
톰슨은 엘리사가 올리비아에게서 받은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나섰다.
‘하이델 마을은 숲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잘 알려져 있지 않단다. 찾아가려면 지도가 필요할 거야.’
‘감사해요, 부인.’
‘그곳에서 네가 찾던 답을 얻을 수 있길 바랄게.’
올리비아는 언제나 그랬듯 엘리사의 앞길을 축복하며 배웅해 주었다.
그녀가 준 지도 덕에, 엘리사 일행은 어렵지 않게 하이델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각하, 마님. 마을 입구로 통하는 길목이 너무 좁아서 아무래도 마차는 여기 두고 가야 할 듯합니다.”
마을의 입구는 좁은 바위틈에 있었다.
성인 두 명 정도가 지나갈 수 있는 넓이였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각각 하네스와 리온을 안고 마차에서 내렸다.
“먼저 들어가 보고 오겠습니다.”
톰슨이 앞장서 마을로 들어가려던 그때였다.
입구에서 갑자기 여덟아홉 살 정도 된 남자아이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아이들은 저마다 활을 쥐고 있었다. 크기가 작긴 해도, 모형이 아닌 진짜 활이었다.
아이들은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 쥐고 있던 활을 엘리사 일행에게 겨누며 소리쳤다.
“꼼짝 마라, 이 악당들!”
“우리 마을에 무슨 일이냐!”
“정체를 밝혀라!”
루벨린의 기사들이 그에 흠칫 놀라며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앞을 막아서며 호위했다.
아이들이 겨눈 활이긴 해도, 활은 활이었다.
“이놈들, 너희 이분들이 누군지나 알고 감히 활을 겨누는 거냐?”
“알아! 악당!”
아이들은 톰슨의 으름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톰슨이 아이들을 꾸짖으려던 그때,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있던 하네스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흐에엥!”
그 소리를 들은 아이들이 움찔했다.
그러고는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있는 하네스와 엘리사의 뒤에 숨어 있는 리온을 보고는 저들끼리 소곤거렸다.
“아기다.”
“악당이 아기를 데리고 있어.”
“아기가 겁먹었나 봐!”
그 모습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저들끼리 속닥거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성큼 다가가 활을 빼앗았다.
그러자 활을 빼앗긴 아이가 펄쩍 뛰었다.
“앗, 악당이 내 활을 빼앗아 갔어!”
리하르트는 씩씩대는 아이의 이마에 딱밤을 콩 때리며 아이를 제압했다.
“누가 너희 같은 꼬맹이들한테 활을 쥐여 줬지?”
“우리는 꼬맹이가 아냐! 우리는 마을을 지키는 가드야!”
아이들이 리하르트에게 항변하던 그때, 입구에서 열서너 살 정도 된 소녀가 나오더니 눈앞의 광경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금세 상황을 파악한 소녀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다가와 아이들의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아이들은 울상을 지으며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야!”
“너희들, 아무한테나 막 활을 겨누면 어떡해? 훈련 시간 외에 활 만지지 말랬지?”
“악당들이 .…!”
“시끄러워! 다들 마을로 들어가.”
톰슨의 으름장에도 꿈쩍 않던 아이들은 누나의 불호령에 못 이겨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소녀는 언제 아이들에게 화를 냈냐는 듯 상냥한 표정으로 리하르트와 톰슨을 바라보았다.
“저희 마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외지인이 찾아오기 힘든 곳인데.”
“이쪽은 루벨린 공작 각하시고, 이쪽은 세리어트 후작 각하시다. 신목의 숲 현자를 뵙고자 들렀는데, 머물 곳을 찾고 있다.”
톰슨은 리하르트와 엘리사를 차례로 소개했다.
‘루벨린’이란 이름은 처음 듣는 듯 고개를 갸웃하던 소녀는 ‘세리어트’란 이름에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응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소녀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나이가 지긋한 노파와 함께 나왔다.
노파는 엘리사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이 마을의 촌장인 마샤 글렌입니다. 귀한 손님을 바깥에 오래 모셔대단히 송구합니다. 우선 안으로 드셔서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그녀의 뒤를 따라 하이델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