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엘리사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당신이… 라르딘 에스더인가요?”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신목의 현자라는 것을.
남자는 푸르른, 그러나 공허한 눈으로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래.”
엘리사는 눈앞의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조금 전 그가 제게 오랜만이라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고 되물었다.
“저를 아세요?”
“모를 리가 없지. 자그마치 12년을 품어 키웠으니.”
“12년이라면…….”
“네 어미가 너를 내게 맡겼거든.”
라르딘의 여상한 대답에 엘리사는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상대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12년과 라르딘이 연관이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는, 지금의 엘리사자신과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엘리사는 정정했다.
“그건 제가 맞지만, 지금의 제가 아니에요.”
라르딘이 키웠을 엘리사, 아니 엘리사란 이름도 아니었을 이 몸의 원래 주인은 지금의 자신과는 다른 영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라르딘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 지금의 너는 내가 키운 그 아이가 맞다.”
“하지만 저는… 열두 살 때 영혼이 한 번 바뀌었어요.”
“네가 그리 믿고 있을 뿐이지.”
라르딘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네 영혼은 네가 탄생한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럼 제가 기억하고 있는 전생의 기억은 뭐죠………?”
“그건 내 힘의 일부다. 내 힘의 일부가 네게 흘러 들어가, 네 영혼이 얽힌 미래 혹은 과거를 읽게 된 것 이겠지.”
온전하지 않은 힘이라, 원하는 시점을 볼 수는 없었겠지만.
라르딘은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제가… 당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요? 어떻게요?”
“네 영혼은 내가 만들었으니까.”
라르딘의 말에 엘리사의 눈동자가 거세게 동요했다.
라르딘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네가 생기기 전, 나를 찾아온 네 어미에게 네 영혼을 주었지.”
율리아가 엘리사를 갖기 전, 그녀는 라르딘의 부름을 듣고 이 숲에 왔었다.
라르딘은 그녀에게 엘리사의 영혼을 주었고, 율리아는 머지않아 에이 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나, 네 어미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너를 지켜 달라고.”
하이델 마을에 몸을 숨기고 있던 율리아는 자신을 쫓아 이 숲까지 온 황궁의 기사들을 피해 다시 라르딘을 만나러 왔다.
‘라르딘 님,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 당신께서 뜻하셨고, 제게 주신 아이이니 부디 지켜 주세요………..’
당시 에이든은 협곡에서 검은 영혼의 습격을 받고 의식불명 상태에 빠져 있던 때였다.
만약 에이든이 죽는다면, 율리아에게 배 속의 아이는 그가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되는 셈이었다.
그녀는 배 속의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랜 도망 생활로 무리를 한 율리아는 6개월 만에 아이를 출산하고 말았다.
“산달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난 너를 내가 신목으로 품었다.”
“…….”
“네 어미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네 아비에게 네 존재를 알리러 갔지만, 그 길로 돌아오지 못했지.”
“……”
“이후 너는 무사히 열 달을 채웠으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런 너를 12년 동안 품고 키웠다.”
엘리사는 그제야 알아챘다.
왜 제게 리하르트를 만나기 전 12년의 기억이 없는지를.
“그리고 12년이 되던 그 해, 너를 ‘그 아이’의 곁으로 데려다줄 사람을 불렀다.”
“………”
“알버트 루벨린. 그자에게 너를 내어주었지.”
당시, 아들을 잃고 리하르트를 자신의 손자로 받아들인 알버트는 자신이 평생 지켜 온 가문의 대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미쳐 있던 때였다.
라르딘의 부름을 받은 알버트는 엘리사를 루벨린으로 데려갔다.
신목의 현자가 내어준 아이이니, 분명 특별한 힘이 있을 거라 믿었으리라.
알버트는 그런 엘리사가 리하르트와의 사이에서 후사를 본다면, 두 부모의 힘을 이어받은 아이가 루벨린을 부강시킬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라르딘의 뜻은 따로 있었다.
“너는 제네이드… 아니, 이제 리하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그 아이를 정화할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엘리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라르딘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제네이드라고?’
고대의 서에서 제네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그의 말로 확인하게 되자 충격이 컸다.
라르딘은 혼란스러워하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진리의 탑에서 고대의 서를 봤으니 너도 알겠지. 그 아이의 힘이 위험하다는 걸.”
“…….”
“신께선 이 세계를 멸하기 위해 제 네이드의 영혼을 만드셨다.”
엘리사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부정했다.
“신께서 이 세계를 멸하려 하신다니요? 신께선 인간들을 사랑하시잖아요. 그런데 왜……….”
“신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건, 인간이 만들어 낸 지극히 인간 중심적이고 오만한 착각이지.”
“…….”
“인간은 신이 만든 수많은 피조물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도 실패한 피조물.
“나는 그 뜻에 대항하기 위해 지금껏 살아왔고, 너를 만들었다.”
엘리사는 라르딘을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제가 리하르트의 힘을 정화시키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럼…… 리하르트는 어떻게 되는데요?”
엘리사는 에이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에이든은 근본적인 어둠을 정화하는 건 불가능하며, 희석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은 영혼을 건드리는 일이어서 생명이 위험해지는 일이라고 했었다.
‘그리고 고대의 서에서도…’
고대의 서에서도 말했었다.
제네이드의 힘을 멈추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그런데, 리하르트가 제네이드라면.
그 영혼의 환생이라면.
엘리사는 그 가능성을 외면하며 라르딘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금껏 주저 없이 대답하던 라르딘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혼돈과 어둠은 그 영혼의 본질. 본질을 잃은 영혼은 소멸한다.”
그 말은 즉, 정화를 하면 리하르트는 죽는다는 뜻이었다.
다시 말해, 엘리사에게 그녀의 손으로 그를 죽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에 지금껏 외면하며 버티고 있던 엘리사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고대의 서에서 아리엔과 제네이드의 이야기를 읽었을 때부터 떠오른 가능성이었다.
정화의 힘을 가진 아리엔과 자신.
혼돈의 힘을 가진 제네이드와 리하르트.
아리에이 제네이드를 죽이거나, 아리엔이 희생해 제네이드의 힘을 봉인해야 하는 운명.
애써 무시하고 외면하고자 했던 그 운명이 제 앞에 놓여 있었다.
‘…말도 안 되잖아.’
믿기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가, 그 다정한 남자가 세상을 멸할 운명을 타고난 남자라니.
내가 그를 죽여야 하는 운명이라니.
그런 게, 믿어질 리 없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혼란스러워하는 엘리사를 지켜보던 라르딘이 말했다.
“지금은 영혼이 완전히 융합되지 않은 상태라 버티고 있지만, 곧 이 지를 잃고 살육을 탐하는 마왕이 될 거다.”
“…….”
“너도, 네 아이도 알아보지 못할 테지.”
한 마디로 이 세계를 멸하고, 다시 세우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그전에 죽여야 한다고.
엘리사는 한동안 말없이 생각을 곱씹다, 라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그 운명이라는 거, 바꿀 수도 있는 거죠?”
라르딘의 힘을 받아서 본 원작, 아니, ‘미래’와 ‘현재는 달라졌다.
원작의 리하르트는 하네스의 존재를 끔찍이 혐오했지만, 현재의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사랑했다.
원작의 리하르트는 마찬가지로 엘리사를 싫어했지만, 지금의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
‘이미 운명은 바뀌었고, 바꿀 수 있어.’
라르딘은 그렇게 묻는 엘리사를 내 심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동요하는 기색이 가득하던 엘리사의 눈에, 어느새 차분한 결의가 어려 있었다.
엘리사는 그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아니, 우리는 그 운명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신들이 멋대로 정한 운명 따위.
“우리는 우리만의 답을 찾겠어요.”
그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를 포기할 마음은 없었다.
라르딘은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그의 대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아공간을 벗어났다.
라르딘은 빛 속으로 희미해져 가는 엘리사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엘리사의 뒷모습이 익숙한 뒷모습과 겹쳐 보이며 그리운 얼굴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