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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41화 (141/164)

141화

라르딘 에스더.

이 땅의 모든 기억을 읽고 미래를 예지하는 힘을 가진 자.

그 힘은 수천 년 전의 기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나게 했다.

엘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라르딘은 수천 년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갔다.

*

인적이 드문 조용한 숲속, 아담한 통나무 집.

“라르딘!”

눈부신 금발에 푸른색 맑은 눈을 가진 소녀, 열다섯의 아리에이 벌컥문을 열어젖히며 들이닥쳤다.

하지만 타이밍이 나쁘게도 라르딘은 막 씻고 와서 옷을 갈아입던 중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에 당황한 라르딘의 눈과, 가쁜 숨을 헐떡이는 아리엔의 눈이 마주쳤다.

잠깐의 정적 후, 아리에이 비명을 지르며 문을 도로 쾅! 닫았다.

“꺄악! 숙녀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라르딘은 억울하고 황당한 눈으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남의 집에 노크도 없이 벌컥 들이닥친 게 누군데………!’

이젠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아리엔은 늘 그랬다. 매번 말해도 듣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하는 게 빨랐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아리엔을 아꼈다.

이성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귀애하듯 자연스러운 감정이었다.

라르딘이 한숨을 내쉬며 옷을 마저 입는데, 문밖에서 아리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르딘, 내가 신기한 거 주워 왔어! 빨리 나와 봐!”

보나 마나 시시껄렁한 장난감, 혹은 다친 동물 같은 것이리라.

마지못해 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오던 라르딘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그대로 굳었다.

집 앞에 피 칠갑을 한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라르딘은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으로 아리엔을 쳐다보았다.

“너…… 드디어 살인을?”

여기저기 들쑤시며 사고만 치고 다니더니 결국 저질렀구나, 라는 눈빛이었다.

그의 말에, 아리에이 라르딘의 등을 퍽! 때렸다.

“컥!”

“날 뭘로 보는 거야? 그리고 아직 안 죽었거든!”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숨이 붙어 있긴 했다.

아리엔보다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래서, 이거 왜 끌고 온 건데?”

“예쁘게 생겼잖아. 어디 먼 나라의 왕자님이면 어떡해?”

아리엔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라르딘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런 아리엔을 쳐다보았다.

그럼 너희 집에 데려가지그래?”

“숙녀들만 사는 집에 외간 남자를 데려갈 순 없잖아.”

“친구의 집에 정체 모를 시체를 끌고 오는 건 괜찮고?”

“…야박한 라르딘, 매정한 라르딘.”

“만약 얘가 죽으면 네가 이 애를 내다 버렸기 때문이야.”

“………”

라르딘은 아리엔의 ‘양심의 가책’공격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눈앞의 소년을 다시 살펴보았다.

옷이 온통 피로 절어 있는 데다, 상처 부위에서는 아직 피가 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라르딘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리에이라면 치유의 능력이 있으니 데려오기 전에 치유를 해서 데려올 수 있었을 텐데.’

의문을 품은 그때, 아리엔이 라르딘을 스쳐지나 집으로 향하며 말했다.

“빨리 걔 업고 들어와. 그리고 붕대랑 약초는 어디 있어?”

라르딘은 아리엔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네가 치료하면 되잖아.”

라르딘의 예리한 눈빛이 아리에에게 꽂혔다.

아리엔은 그런 라르딘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치료가 안 돼.”

아리에의 말에 라르딘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아리에이 가진 치유의 힘이 먹히지 않는 경우는 단 하나였다.

치유의 대상이 신의 마나로 만들어진 생명체가 아닐 때.

이 세계에 마나가 아닌 다른 것으로 만들어진 생명체는 단 하나다.

마족.

즉, 치유의 대상이 마나가 아닌 혼돈으로 만들어진 마족일 때.

지금 세계는 마족과 인간이 한창 대립하고 있는 시기였다.

좀 더 정확히는, 마족이 인간을 핍박하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마족을 구하다니.

라르딘은 조금 전의 시큰둥한 표정과 달리, 심각하게 굳어진 표정으로 아리엔을 다그쳤다.

“너, 이게 마족인 걸 알면서……!”

“하지만, 얘는 다른 마족들한테 쫓기고 있었단 말이야.”

“…….”

“불쌍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소년을 바라보는 아리엔의 눈동자가 아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라르딘은 그런 아리엔의 선량함이 매번 귀찮고 곤란했지만, 그럼에도 그 마음을 어여삐 여겼다.

척박한 세상에 남은 순수한 선의를 지켜 주고 싶었다.

비록 제겐 없는 마음일지라도.

아리엔을 바라보던 라르딘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나직이 대꾸했다.

“정신 차리면 바로 쫓아낼 거야.”

바라던 대답을 들은 아리엔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라르딘은 아리엔과 함께 소년을 제 집 안으로 옮겨 치료했다.

하지만 아리엔의 마음이 무상하게도, 소년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오늘내일이 고비겠어.”

라르딘은 일부러 아리엔에게 희망을 심어 주지 않았다. 그녀가 괜히 기대하고 오래 슬퍼하지 않도록.

그러나 며칠 후, 소년은 기적처럼 의식을 찾았다.

깨어난 소년은 마족이었기에, 당연히 인간의 말을 할 줄 몰랐다.

소년은 라르딘을 경계했지만, 아리 엔에겐 순종적이었다. 자신을 구한 은인을 기억하는 듯했다.

“마족들한테 돌아갔다가 이번엔 정말로 죽이려고 하면 어떡해? 이렇게 약해서는, 다음엔 진짜 죽을지도 몰라.”

아리엔은 소년이 성장할 때까지만이라도 데리고 있자며 라르딘을 졸랐고, 결국 라르딘은 소년과 함께 살게 되었다.

아리엔의 말대로 소녀 둘만 사는 집에 소년을, 그것도 마족을 들일수는 없으니.

“얘가 마족인 건 카이사랑 미하일한텐 비밀이야, 라르딘.”

카이사와 미하일은 루벨린의 초대 가주 카이사 루벨린, 카이로트의 초대 가주 미하일 카이로트였다.

두 소년은 아리엔을 좋아했지만, 아리엔은 둘보다는 라르딘과 가깝게 지냈다.

언젠가 그 이유에 대해 아리엔은 이렇게 말했다.

‘라르딘이 제일 착하고 상냥하니까!’

라르딘은 ‘그냥 내가 제일 만만하다는 소리 아니냐며 투덜거렸지만, 늘 아리에의 부탁을 들어주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신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소년의 기억을 읽었다.

열다섯의 라르딘은 아직 기억의 힘이 능숙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세계의 모든 기억을 읽지는 못했다.

다만 접촉한 자의 기억은 읽을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년의 기억을 읽게 된 라르딘은 흠칫 놀랐다.

‘이게……… 뭐야?’

소년의 기억은 온통 암흑뿐이었다.

검고, 어둡고, 비명만이 가득한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기억들.

라르딘은 소년에게서 손을 뗐다.

께름칙하지만, 소년이 그 끔찍한 현장의 피해자라면 당장 쫓아낼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찾아온 아리엔은 소년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제네이드.”

고대어로 ‘기적’이라는 뜻의 이름을.

아리엔은 인간의 말을 모르는 제네 이드에게 말을 가르쳤다.

제네이드는 금세 인간의 언어를 익혔고, 제일 처음으로 제 이름부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내뱉은 말은

“아이…… 엔.”

“아니야. 아리에. 해 봐. 아. 리.

엔.”

“아… 리엔.”

아리엔의 이름이었다.

“잘했어, 제네이드!”

아리엔은 뛸 듯이 기뻐하며 제네이 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먹어 봐, 맛있어.”

그러고는 집에서 챙겨온 과일말랭이를 제네이드에게 주었다.

나름의 보상이었다.

“아리에, 그 녀석 그런 거 안 좋아하는 거 같던 -”

그것을 본 라르딘이 한 마디 하려는 순간, 제네이드가 과일말랭이를 입에 넣었다.

제네이드가 잘 먹자, 신이 난 아리 엔은 계속해서 과일말랭이를 건넸다.

기뻐하는 아리엔을 빤히 바라보던 제네이드는 그녀가 건네는 것을 넘죽넙죽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라르딘이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내가 줄 땐 입에 넣자마자 뱉더니?’

이후 제네이드는 아리엔을 졸졸 따라다녔다.

매일 문 앞에서 아리엔을 기다렸고, 아리에이 어딜 가든 그녀의 곁엔 항상 제네이드가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았다.

라르딘은 제네이드가 마족임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애써 잊으려 했다.

‘뭐…… 그래도 보기 좋으니까.’

신의 힘에 가장 가까운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마족을 어여삐여기는 인간 소녀와 마족으로 태어났음에도 인간과 어울려 살아가는 마족 소년.

‘이런 따뜻한 그림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평화로운 날들이 지속되고, 어느덧 아리엔보다 한 뼘 작던 제네 이드가 아리엔과 비슷할 정도로 자랄 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잠들려던 라르딘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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