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하아………. 큭…….”
제네이드의 신음 소리였다.
라르딘은 의아한 눈으로 제네이드 쪽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제 네이드 쪽을 비추었다.
제네이드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몸을 웅크린 채 떨고 있었다.
라르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제네 이드를 살피던 그때, 제네이드의 날개뼈 부근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본 라르딘의 눈이 커졌다.
“제네이드, 너 괜찮냐?”
“잘 자라, 라르딘.”
아리엔은 매일 저녁 집으로 돌아가기 전, 제네이드와 라르딘에게 잘자란 말을 하고 돌아가곤 했었다.
라르딘도 이따금 기분이 내키는 날이면 자기 전에 제네이드에게 잘 자라고 말하곤 했지만, 제네이드가 라르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제네이드가 이 상황에 그 같은 말을 한다는 건, ‘신경 쓰지 말고 잠이나 자라는 뜻이었다.
아직 인간의 말이 어눌해서 그렇게 표현한 듯했다.
라르딘은 제네이드의 상태가 걱정됐지만,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 밤 이후로 제네이드의 상태는 점점 심해졌다.
라르딘이 알아채기 전부터 조금씩 증상이 심해진 듯했다.
“제네이드!”
그러다가도 아리에이 부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픈 기색 하나 없이 아리엔을 반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제네이드가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설쳤다.
라르딘은 평소처럼 아리엔을 반기며 안기는 제네이드를 지켜보다, 아리엔에게 제네이드의 상태를 이야기하려 입을 열었다.
“아리에, 이 녀석 말이야.”
그 순간, 아리엔의 품에 안긴 제네 이드의 싸늘한 눈빛이 라르딘에게 향했다.
아리엔에게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눈빛이었다.
제네이드의 살벌한 경고에, 라르딘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지났다.
“라르딘, 제네이드가 가 버렸어…….”
그런데 평소처럼 제네이드와 함께 나갔던 아리엔이 울면서 돌아왔다.
늘 곁에 있던 제네이드 없이, 혼자서.
그렇게 제네이드가 급작스럽게 떠나고, 아리엔은 꼬박 사흘을 울다 앓아누웠다.
아리에이 걱정된 라르딘은 잠시 고민하다, 그녀의 기억을 읽기로 했다.
당시의 정황을 알아야 아리엔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 줄 수 있을 테니.
라르딘은 아리에의 손에 손을 얹고 그녀의 기억을 읽었다.
기억 속의 아리엔은 들꽃이 만개한 꽃밭에서 혼자 화관을 만들고 있었다.
‘완성!’
화관을 완성한 아리엔은 제네이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조금 전, 서로 누가 화관을 더 예쁘게 만드나 내기를 하고 화관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저쪽에 떨어져 있는 제네 이드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했다.
그는 꽃밭에 웅크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 그의 날개뼈 부근이 크게 요동쳤다.
그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아리에이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제네이드! 왜 그래? 어디 아파?’
‘오지…… 마.’
하지만 아리에이 그의 상태를 살피려는 순간, 제네이드가 재빠르게 아리엔을 밀쳐 냈다.
그 충격으로 밀려난 아리엔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놀란 눈으로 제네이드를 바라보았다.
제네이드는 고통에 겨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꿈틀거리며 거세게 요동치던 그의 날개뼈 부근이 찢어지더니, 크고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두려움을 줄 정도로 섬뜩한 날개가.
날개가 돋아나며 찢긴 생살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아리엔은 다시 그에게 다가섰다.
낯선 날개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그에 대한 걱정이 앞선 것이다.
‘제네이-’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네이드의 손이 아리엔의 가느다란 목을 잡았다.
아리엔은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붉은 눈에 비친 감정은 평소의 다정함이나 맹목적인 감정이 아닌, 선연한 살의였다.
그 살의 앞에서 아리엔은 너무도 무방비했다.
‘제네이드……?’
아리에이 믿기지 않는 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제네이드의 눈빛에 일순 자책감이 비쳤다.
제네이드는 아리엔에게서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가진 이성을 모두 끌어모은 듯, 힘겨운 움직임이었다.
제게서 아리엔을 떼어낸 제네이드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날개를 펼쳤다.
그 움직임에서 불길한 예감을 직감한 아리엔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안 돼.’
“……..가지 마, 제네이드…….”
아리엔은 그를 붙잡으려 다시 다가섰으나, 그는 이미 날아가 버린 뒤였다.
제네이드와의 기억은 그렇게 끝이 났다.
라르딘은 고열에 시달리는 아리엔을 보며 마음속으로 제네이드를 욕했다.
‘역시 마족 따위를 거둬 주는 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렇게 되리란 것을.
다친 어린 짐승을 거두어 키워도 결국엔 본디 살던 자연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법이니.
애초에 제네이드가 나으면 돌려보낼 생각으로 데리고 있지 않았나.
하지만 그동안 미운 정이나마 든 녀석이 제게 말 한 마디 없이 가버린 것이, 라르딘으로선 아리엔과 마찬가지로 섭섭하기도 했다.
다행히 아리엔은 수일이 지나 털고 일어났다.
라르딘은 아리엔이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 예전처럼 잘 지내도, 속엔 제네이드의 빈자리가 공허하게 남아 있음을 알았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마족과 인간의 대립이 깊어지며 라르딘은 제네이드의 존재를 잊었다.
*
그렇게, 5년이 흘렀다.
라르딘, 아리에, 카이사와 미하일은 마왕에 대항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라르딘은 준비에 앞서 마왕 성의 기억을 읽기로 했다.
그동안 능력을 다루는 데 능숙해진 덕에, 마왕 성의 기억까지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라르딘은 눈을 감고 땅에 새겨진 기억들을 읽어 들였다.
어둠이 짙게 내리깔린 마왕 성, 마왕은 수하들과 함께였다.
그의 능력으로는 시각적인 기억은 읽을 수 있어도, 소리를 읽진 못했다.
라르딘은 그들의 말을 들을 수 없는 대신, 그들의 분위기와 상황에 집중했다.
그때, 수하들의 틈으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그전까지 무심히 기억을 읽는 데 집중하던 라르딘의 정신이 일순 흐트러졌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제네이드……?’
몸집이 커지고 앳된 느낌이 지워졌지만 분명 제네이드였다.
훌쩍 자라 성인이 된 제네이드가 번듯한 옷차림으로 그들의 앞에 섰다.
마왕의 수하들이 그를 보며 말했다.
왕자님.
정확히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수 없지만, 입 모양을 보아 그 호칭만은 분명했다.
‘제네이드가, 마왕의 아들이었어…….’
라르딘의 굳어진 표정을 본 아리엔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라르딘, 왜 그래? 뭔가 안 좋은 거라도 봤어?”
“…아니. 보고 싶지 않은 걸 봐버려서.”
그곳에서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아리엔과 카이사, 미하일이 돌아간 후 라르딘은 입술을 짓씹었다.
‘마왕의 아들이라면, 긴 전쟁에서 한 번은 부딪히게 될 텐데. 그럼 아리에이….’
아리엔이 받게 될 충격을 생각하면 걱정이 됐다.
제네이드와 아리에이 마주치게 될 미래를 읽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면 좋겠지만, 예지 능력은 뜻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예지 능력은 신이 보여 주고자 하는 미래만 볼 수 있었다.
신이 선택한 만큼 대개는 이 세계의 존망이나 종족의 운명 같은 큼직한 미래의 상황이었다.
라르딘은 인간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미래를 보았다.
그 말은, 마족의 왕자인 제네이드는 이 전쟁에서 높은 확률로 죽는다는 뜻이었다.
인간들 중 제네이드를 죽일 수 있는 이라면 신의 힘을 받은 넷 중 하나일 확률이 높았다.
‘부디, 그 사람이 아리엔은 아니 길’라르딘은 그렇게 빌며 전쟁에 임했다.
마족과의 전쟁은 길어졌다.
라르딘이 예지했던 미래와 달리 어느덧 전세는 마족들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지친 사람들은 라르딘이 본 미래가 틀린 것 아니냐며 슬슬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라르딘 역시도 스스로의 힘을 믿지 못하게 되자, 아리에이 발끈하며 말했다.
“만약 우리가 이 전쟁에서 질 거란 미래를 봤다면 싸우지 않았을까?”
“…….”
“아니, 질 걸 알았더라도 우린 싸웠을 거야. 이대로 마왕의 손에 죽을 순 없으니까.”
“우리는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가능성에 최선을 다한 것뿐이야. 넌 그 가능성에 희망을 심어준 것이고.”
아리엔은 라르딘의 예지를 몸소 증명하기라도 할 기세로 앞장서 싸웠다.
하지만 그런 아리엔의 마음이 그녀를 위험에 빠트렸다.
한순간의 잘못된 상황 판단으로 아리엔은 마족들에게 둘러싸여 죽을 위기에 처했다.
그 순간, 누군가가 아리엔의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위험하잖아, 아리에.”
나직하고 부드러운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아리엔은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구해 준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살짝 찌푸린 잘난 얼굴과 완연한 남자의 몸, 그리고 그녀를 보호하듯 감싼 거대한 검은 날개까지.
아리엔은 이 얼굴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소년을 알고 있었다.
“제네이드………?”
“늦어서 미안.”
제네이드는 아리엔을 보호하듯 감싸 안고는,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이윽고 일대의 마족들이 전멸하며 사위가 고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