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돌아온 제네이드는 마왕을 등지고 인간의 세력에 합류해 마족과 싸웠다.
그가 합류하면서부터 전세는 완전히 인간들의 쪽으로 기울었다.
라르딘은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본 예지가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제네이드가 인간들을 승리로 이끌 열쇠였다는 사실도.
긴 전쟁 끝에 인간들은 마왕과 마족들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다.
승리에는 제네이드의 공이 컸다.
아리엔은 그런 제네이드를 왕으로 추대하길 바랐으나, 카이사와 미하일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은 마족인 제네이드가 왕이 되는 것을 꺼렸다.
“마족이 인간의 왕이 되다니? 말도안 돼. 우리가 무엇을 위해 그 오랜 시간 힘들게 싸웠는데?”
아리엔은 그들의 말에 반박했다.
“우리가 마왕과 마족을 무찌른 건, 그들이 단순히 우리와 종족이 달라 서가 아니야. 그들이 우리를 탄압하고 핍박했기 때문이지.”
“……..”
“내가 꿈꾼 건 인간들의 세상이 아니라, 그 누구도 탄압받거나 핍박받지 않는 세상이었어.”
“……”
“단지 마족이라는 이유로 그를 꺼린다면, 우리가 무찌른 마왕이나 마족들과 똑같아지는 거야.”
사람들은 여전히 제네이드를 못마땅해했지만, 아리엔의 말에 반박하진 못했다.
게다가 당시 전쟁 영웅인 아리엔을 칭송하는 자들이 훨씬 많았다.
결국 그들은 제네이드를 왕으로 받아들였다.
왕이 된 제네이드는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항상 아리엔의 곁에 함께했다.
그날도 아리엔은 제네이드와 함께 라르딘을 찾아왔다.
“라르딘, 우리 결혼할 거야.”
너무나 당연한 수순처럼 듣게 된 말이었다.
라르딘은 내심 아리엔이 아까워 못마땅했지만, 빈말이라도 두 사람을 말릴 수 없었다.
아니, 말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아리에과 제네이드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여서.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눈부시게 예뻐서.
축복해 줄 수밖에 없었다.
“축하한다.”
라르딘은 긴 전쟁과 엇갈림으로 고생한 두 연인이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얼마 가지 못했다.
제네이드가 마왕을 죽일 때 그 몸에 흡수된 마왕의 힘이 제네이드가 원래 가진 힘과 합쳐져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기에 라르딘에게 또 다른 미래가 보였다.
시체만이 즐비한 황폐한 땅, 검은 힘에 잠식당한 채 홀로 서 있는 제 네이드의 모습이.
‘설마…….’
라르딘은 그제야 알아챘다.
제네이드는 마왕이 만들어 낸 ‘살인 병기였다는 걸.
이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마왕은 자신이 이 전쟁에서 질 경우, 제네 이드의 영혼이 자신의 힘과 영혼을 흡수하여 이 세계를 멸망시키도록 설계해 놓은 것이다.
자신이 이 세계를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도록.
예정된 멸망을 막으려면 그 힘의원천인 제네이드의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정화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아리엔뿐이었다.
하지만 아리엔이 정화를 위해 그를 죽일 수 있을 리 없었다.
“……라르딘. 조금 전 그 이야기, 제네이드한텐 하지 말아 줘.”
라르딘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엔은 그에게 당부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이른 새벽.
아리엔은 다시 라르딘을 찾아왔다.
승전 이후, 늘 함께 오던 제네이드없이, 혼자서.
“내 선택을 이해해 줄 사람이 너밖에 없을 거 같아서.”
“…….”
“인사하러 왔어, 라르딘.”
담담히 웃으며 말하는 아리에의 모습에서, 그녀가 내린 ‘선택’이 무엇인지 직감한 라르딘의 마음이 무너졌다.
한 번의 정화로 대상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보다, 긴 시간 정화의 힘을 유지하며 대상의 힘을 봉인하는 것에 더욱 많은 생명력이 소요되었다.
제네이드처럼 거대한 힘을 봉인하려면 아리에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야 했다.
아리엔은 제네이드의 영혼을 소멸시키지 않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그의 힘을 봉인하는 데 쓰기로한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아리에.”
가지 마.
그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라르딘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내 말이 너의 선택을 바꾸지 못할 것을 알기에.
네가 그 선택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알기에.
그런 선택을 한 너에게 가지 말란 내 말이 얼마나 아프게 들릴지 알아서.
그래서, 너를 말릴 수가 없다.
“인사, 해 줄 거지?”
아리엔은 간절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을 잇지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던 라르딘은 천천히 다가가 아리엔을 끌어안았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안아 본 아리엔은 너무도 작았다.
이 세계의 무게를 홀로 짊어지기에 너무도 작고, 여리고, 가냘픈 몸이었다.
이 온기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저를 골리던 장난기 어린 목소리도, 천진한 미소도, 전부.
다시는, 그런 너를 만날 수 없어.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라르딘은 아리엔을 안은 채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그녀를 붙잡을 말은 참을 수 있어도, 흐르는 눈물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
이후, 아리엔은 자신을 희생하여 오염된 땅으로 향하는 협곡과 제네 이드의 힘을 봉인했다.
봉인의 과정에서 의식을 잃었던 제 네이드는 깨어난 후에야 아리엔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아리엔이 자신을 살리고자 희생한 것을 알게 된 제네이드는 무너졌으나, 그녀의 희생으로 이 세계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제네이드를 부탁해.’
라르딘은 아리에이 남긴 마지막 부탁을 지키기 위해 그를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비극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제네이드를 탐탁지 않아하던 카이사와 미하일은 제네이드가 약해진 틈을 타 그를 죽였다.
그 결과, 라르딘은 또 다른 미래를 보게 되었다.
멸망한 세계에 홀로 서 있는 제네 이드의 모습에서, 리하르트의 모습으로 변한 미래로.
그 미래를 본 라르딘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신께선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하시는구나.’
신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답은 과연 무엇일까.
라르딘은 그 답을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또 한 번 제네이드의 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리엔뿐이라는 것을.
그 미래를 본 라르딘은 신의 뜻에 대적하기 위해 신목과 하나가 되었다.
약하디약한 인간의 몸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은 너무도 찰나이기에.
그리고 아리엔의 힘이 깃든 정화의 호수에서 영혼의 파편을 모았다.
힘이란 영혼에 귀속된 것이기에, 그것을 모아 조각난 아리에의 영혼을 소생시킬 생각이었다.
라르딘은 아리에의 영혼을 안고 다가올 종말을 기다리며 수천 년을 고민했다.
‘아리에, 너를 살리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일까.’
그녀를 환생시키면, 또 한 번 제네 이드를 죽여야 하는 잔인한 운명에 던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전생의 기억이 없는 두 사람의 영혼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채 맞서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르딘은 알면서도 그녀를 되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첫 번째 죽음은 헛되었다.
그녀가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살리고자 했던 제네이드는 죽었고, 이 세계의 운명 역시 바뀌지 않았으니.
‘그러니 한 번 더.’
네게, 한 번 더 기회를 줄게.
라르딘은 결국 조각난 아리에의 영혼을 소생시켰고, 그 영혼으로 엘리 사를 만들었다.
소멸시키거나 희생하거나, 아니면이 세계의 멸망.
세 가지의 답 중 하나를 선택할지, 아니면 다른 답을 찾을 수 있을지는 그녀에게 맡기기로 한 채.
*
라르딘은 마치 어제처럼 선명한 기억에서 헤어 나왔다.
“…네 기억은 지워져도 네 감정은 지워지지 않는구나, 아리에.”
그리고 빛 속으로 희미해진 엘리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네가 바라는 답을 찾을 수 있기를.”
*
엘리사는 라르딘을 뒤로한 채 빛을 넘어 아공간에서 빠져나왔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리하르트와 함께 있었던 공터가 나타났다.
하지만 그 자리에 리하르트는 없었다.
“리하르트?”
그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바람이 들이치더니 상공에서 리하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엘리사.”
사라진 엘리사를 찾고 있었던 듯, 그의 눈에 절박한 기색이 역력했다.
훅 다가온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보자마자 그녀를 끌어안았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마주 안아 주며 속삭였다.
“나 괜찮아, 리하르트.”
그의 큰 손이 엘리사의 뒷머리부터 등허리까지 쓸어내렸다.
그녀가 무사한지 확인하듯이.
그 손길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손길에서 그가 느꼈을 걱정과 두려움, 그리고 저를 향한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감정들을 깨닫자, 새삼 그와 제 앞에 놓인 가혹한 운명이 실감 났다.
동시에, 희망적인 가능성도.
‘원작은…… 아니, 내가 봤던 미래는 이미 바뀌었어.’
엿보았던 원작, 아니 그 미래와 달리, 리하르트는 저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엘리사는 불안한 마음을 외면한 채 그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내 아이의 아빠.
내가 사랑하는 남자.
‘나는 반드시 너를 그 운명에서 구해 낼 거야.’
엘리사는 마음을 다잡으며 그를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