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두 사람은 마을로 돌아가서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라르딘을 만났으니, 이 숲에 더 볼 일은 없었다.
두 사람은 촌장이 제공해 준 마을 내 거처로 돌아왔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리하르트였다.
“라르딘 에스더. 그 사람이 무슨 얘길 했어?”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라르딘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내 예상대로 12년 동안 나를 키워 준 사람은 그 사람이었어. 그 사람이 나를 선대 공작 각하께 보냈고.”
“내 힘을 정화하게 하려고?”
리하르트의 물음에 엘리사는 멈칫했다.
리하르트에겐 숨기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제가 리하르트의 힘을 정화시키면 되는 건가요?’
‘그래.’
“그럼…… 리하르트는 어떻게 되는데요?’
…혼돈과 어둠은 그 영혼의 본질, 본질을 잃은 영혼은 소멸한다.
그럴 수 없다면, 아리엔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희생하여 그의 힘을 봉인하거나.
‘원작’이라고 알고 있었던 미래에선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집착한 나머지, 리하르트를 죽이려다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죽인 후, 그 역시 그 여파로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라르딘의 힘을 빌려 본 원작, 아니 ‘미래’는 하네스가 어느 정도 자란 이후의 시점이다.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원작 속 다른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다.
사실 ‘원작’의 엘리사가 리하르트에게 집착한 이유는 아마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결국 폭주한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죽인 것이고, 엘리사 역시 죽어 가면서 그를 정화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제는 알았다. 그것은 ‘원작’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가능성’ 이었다.
‘미래의 가능성을 리하르트가 알게 되면……’
그라면 기꺼이 저를 위해 그 자신을 포기할 것이다.
‘그런 건 싫어.’
저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을 알아서, 저를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버릴 그를 알아서, 그래서 그 가능성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리하르트 역시 고대의 서를 읽었으니 짐작하고 있겠지만, 그래도 외면 하고 싶었다.
‘만약 같은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네가 없는 내 미래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리하르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엘리 사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레이모어 펠리 스를 다시 만났어. 그자가 얘기했지.
그가 나를 만들었다고, 이 땅의 모든 인간을 죽여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서.”
뭐?”
“이 땅의 모든 기억을 읽는 현자라면 알고 있었겠지. 그래서 나를 막으려 너를 키운 거고.”
“…….”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로 널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어.”
진리의 탑에서 제네이드의 힘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확신을 한 건 아니었다.
같은 힘이어도 같은 운명은 아니리라, 외면하고 부정했다.
하지만 라르딘까지 그렇게 말한 이상, 그도 더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엘리사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는 리하르트를 초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이 바라지 않는 선택을 할까 불안했다.
“리하르트, 나는 신목의 숲에서 자라는 동안 라르딘 에스더, 그 사람 힘의 일부를 받아 우리의 미래를 봤어.”
“우리의…… 미래를 봤다고?”
“물론 완전한 내 힘은 아니어서, 전부를 보진 못했지만.”
“…….”
“그때 내가 본 미래의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배 속의 하네스를 죽이려고 했어. 그래서 그 미래를 알았던 나는 하네스를 가졌을 때 네게서 도망가려고 했던 거고.”
엘리사의 이야기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일어나지 않은 그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듯이.
리하르트는 살짝 찡그린 표정으로 엘리사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내가 너를, 하네스를 다치게 할 리가 없잖아.”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언제나처럼 부드러웠다.
“맞아. 지금의 넌 나를 사랑하니까.”
엘리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제 뺨을 감싼 그의 큰 손을 감싸쥐었다.
“내가 봤던 미래와 현재가 달라진 것처럼, 운명은 바꿀 수 있어.”
그것은 그에게 하는 말이면서, 불안해하는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내심 불안해하는 엘리사의 감정을 느낀 리하르트는 그런 그녀를 끌어 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렇게 될 거야.”
*
늦은 밤, 펠리스 후작저.
자정을 훌쩍 넘긴 야심한 시간임에도 레이모어는 잠들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왕의 힘을 하루 빨리 완성시킬 방법….’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두드리던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십 년 전 협곡에서 영혼이 살생을 했을 때, 그 힘이 더욱 커졌었다.’
이십 년 전, 에이든과 함께 협곡너머를 조사하러 갔다가 ‘그 힘과 마주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검은 힘은 에이든과 기사들을 공격했다.
에이든이 그 공격을 막아섰지만 버티지 못했고, 힘에 당한 기사들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
그와 동시에 검은 힘이 더욱 커졌다.
마치 거두어 간 그들의 생명이 힘의 양분이라도 되는 듯이.
레이모어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검은 힘은, 살생을 거듭할수록 더욱 강해진다는 가설을.
‘그래서 왕을 전쟁터로 떠밀었지.’
그리고 그 가설은 얼추 맞아 들었다.
레이모어는 두 개로 나누어진 영혼을 전부 협곡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으나, 하나의 영혼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리하르트가 전쟁에서 돌아온 후, 다시 협곡으로 돌아가자 영혼이 하나로 합쳐졌다.
전쟁에서 축적된 수많은 죽음들이 검은 힘에 어떤 작용을 한 것이다.
‘이번에도 죽음이 축적되면, 힘의 폭주를 앞당길 수 있으려나.’
이 가설을 또 한 번 입증하기 위해선 제물로 사용할 수많은 ‘죽음이 필요했다.
‘죽음을 모을 방법……….’
골몰히 생각하던 레이모어는 마침내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리하르트가 수많은 살생을 하도록 유도함과 동시에, 자신의 불안해진 입지를 다질 수 있는 방법을.
레이모어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당신을 위해, 이 땅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지요.”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레이 모어의 눈빛에 광기가 희번덕거렸다.
17. 우리의 세계
라르딘을 만난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곧장 아카로아로 향했다.
그렇게 며칠을 달려 아카로아 근방에 도착했다.
엘리사는 화창한 날씨와 마차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끼며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엘리사는 태어나 처음 봄을 맞이하는 하네스에게 창밖의 풍경을 소개했다.
“어머나, 하네스, 이제 밖에 꽃이 많이 폈네.”
“으에. 부부.”
하네스는 커다란 눈망울로 바깥 풍경을 구경했다.
평화로운 분위기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각하, 몬스터들의 습격입니다.”
톰슨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상황을 전했다.
하네스, 리온과 함께 놀고 있던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딸랑이를 흔들어 주며 하네스와 놀고 있었던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엘리사의 품에 안겨 주었다.
“하네스, 아빠 금방 갔다 올게.”
“아부부?”
엘리사는 하네스를 받아 안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카드를 펼쳐놓고 카드 게임 연습을 하던 리온은 그런 엘리사의 기색을 눈치채고 말했다.
“나뿐 동물드리 누나랑 아가를 괴롭히면 내가 다 혼내 주께!”
제법 든든한 리온의 말에,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던 엘리사가 풋 웃음을 터트렸다.
“고마워, 리온. 리온이 있어서 아주 든든하네.”
“부탁한다, 꼬맹이.”
리하르트도 피식 웃으며 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사람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리온이 어깨를 으쓱했다.
리하르트는 마차 문을 닫고 돌아섰다.
어느덧 몬스터들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어림잡아도 십수 마리는 되어 보이는 수였다.
리하르트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다들 방어에 집중해라. 한 마리도 마차에 접근하게 둬선 안 된다.”
“예, 각하.”
공격에 리하르트 홀로 나섰다.
눈이 붉은 몬스터들은 경계하는 기색 없이, 오직 살의에 사로잡힌 것처럼 곧장 달려들었다.
리하르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재빠르게 뇌운을 만들어 낙뢰를 내리쳤다.
파지직!
“키에에엑!”
연이어 내려치는 낙뢰가 몬스터들을 차례로 관통했다.
낙뢰에 맞은 몬스터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 자리에 쓰러졌고, 잠시 움찔거리다 숨을 거두었다.
“다시 출발하지.”
곳곳에 널린 몬스터들의 사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다시 마차에 오르기 위해 돌아섰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