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리하르트와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그쪽을 돌아보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루벨린의 기사들이 보였다.
“각하, 돌아오셨군요.”
리하르트가 당분간 제도의 치안을 위해 불렀던 이들이었다.
이곳에 몬스터 무리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막 도착한 듯했다.
리하르트는 그들에게 물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나? 몬스터들의 동향이 수상하다거나.”
“각하께서 신목의 숲으로 떠나시고 한동안은 조용했습니다. 하지만 어제 오후쯤부터 다시 몬스터들이 출몰하기 시작하더군요.”
기사들의 이야기를 들은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리온의 사건 때 힘이 미친 반경은 마차로 한나절 정도의 거리였다. 실질적인 거리를 생각하면 그보다 좁은 반경이었지. 그런데 어제부터 몬스터들이 날뛰기 시작했다는 건 힘의 반경이 그보다 더 넓어졌다는뜻.
즉, 그새 힘이 더 강해졌다는 의미였다.
“……다들 고생이 많군. 좀 더 수고해 주길 바라.”
“이곳은 저희가 책임지고 맡을 테니, 어서 귀가하셔서 쉬십시오.”
리하르트는 기사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마차에 올랐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했다.
*
“하네스.”
공작저에 도착한 엘리사는 저녁을 먹고 하네스의 방으로 왔다.
긴 여정이 피곤했던 리온은 저녁을먹자마자 곧장 잠들었고, 리하르트는 밀린 업무를 본 후 뒤늦게 목욕을 하러 갔다.
하네스는 긴 여정 내내 잔 탓인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엘리사를 반겼다.
“음마!”
최근 들어 하네스는 ‘엄마’란 단어를 부쩍 입에 붙이고 있었다.
그런 하네스의 모습에, 엘리사의 입가에 반사적으로 미소가 번졌다.
엘리사는 바동거리며 인사하는 하네스를 안아 들며 대답했다.
“응, 엄마 왔어. 우리 아들, 안 졸려요?”
“오옹.”
“그동안 집도 아닌 곳에서 피곤했을 텐데. 우리 아가는 아빠 닮아서 튼튼하구나.”
“꺄히.”
엄마가 저를 칭찬하는 걸 아는지, 하네스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방방 웃는 하네스를 보자 그간의 피곤도, 긴장도 눈 녹듯 풀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하네스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하네스를 위해서라도 운명을 바꿔야 해.’
절대로, 보았던 미래에서처럼 이 아이를 혼자 자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음마. 음마!”
“하네스, 엄마랑 아빠랑 같이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자.”
“우옹.”
엘리사는 불안함에 무너지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속삭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막 욕실에서 나온 듯 가운을 걸친 리하르트가 들어왔다.
이제 부부의 침실로 갈 시간이었다.
엘리사는 하네스의 동그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은 꿈 꾸렴, 우리 아가.”
“잘 자고 내일 보자, 하네스.”
리하르트도 뒤이어 하네스의 통통한 뺨에 입을 맞췄다.
“꺄우!”
엄마 아빠의 애정 어린 굿나잇 키스를 받은 하네스는 투명한 침까지 흘려가며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사는 신이 나서 흔들어 대는 하네스의 조그마한 손을 잡고 같이 흔들어 주다, 유모에게 안겨 주었다.
리하르트 역시 하네스에게 손 인사를 한 후, 엘리사와 함께 침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진리의 탑에서 돌아온 이후 매일 밤 그랬던 것처럼 상의를 벗고 엘리사에게 등을 맡겼다.
“그럼 시작할게.”
엘리사는 정화의 힘으로 리하르트의 힘을 씻어 내렸다.
하지만 이렇게 정화해도, 표면의 기운만 옅어질 뿐 그의 안에 자리 잡은 검은 기운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나날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엘리사는 선명한 검은 힘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도리질하며 눈을 감았다.
이 힘을 원망할 순 없다.
이 힘이야말로 본연의 리하르트, 그 자체니까.
“엘리사?”
엘리사가 정화를 하고도 한동안 가만히 있자, 리하르트가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엘리사는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다.
“아, 미안. 잠시 딴생각하느라.”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픈 건 아니고?”
걱정으로 살짝 굳어진 표정을 하고 엘리사를 살피던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이마를 짚었다.
엘리사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럼 어서 자자.”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에 놀란 엘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왜, 왜?”
“피곤해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안되니까.”
테이블에서 침대까지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건만, 성큼성큼 몇 걸음만에 푹신한 시트가 등에 닿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옆에 누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이마에 이마를 맞대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머리 아픈 건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쉬어.”
엘리사는 흠칫했다.
그에게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했건만, 이미 다 들통이 난 것이다.
리하르트는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을 빤히 보다, 그녀의 두 눈꺼풀에 차례로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에 감겼던 엘리사의 눈이 다시 떠졌다.
엘리사를 재우는 데 실패한 리하르트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속삭였다.
“지금 안 잘 거면 밤새 안 재울 생각인데.”
그래도 돼?
그의 뜨거운 손이 엘리사의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올라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얇은 잠옷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온기에 엘리사의 몸이 움찔 떨렸다.
엘리사는 그의 경고에 재빨리 눈을 감았다. 오늘은 정말로 피곤했다.
그러자 엘리사의 이마에 기다렸다는 듯 리하르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잘 자, 엘리사.”
*
모두가 귀가하는 저녁 무렵, 황궁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광장을 가로질렀다.
펠리스 후작저에서 제도 외곽에 있는 황실의 별장으로 돌아가는 마차였다.
그 마차에 로제가 타고 있었다.
그동안 별장에서 머물던 로제는 모친의 기일을 맞아 잠깐 펠리스 후작저에 머무르다, 다시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창밖으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봄비였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자, 마차가 멈춰 섰다.
“전하, 이대로는 땅이 젖어 별장에 돌아가기 힘드실 것 같습니다. 오늘은 다시 후작저로 돌아가시고, 내일 다시 가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러지.”
로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펠리스 후작가의 마차는 방향을 돌려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사이, 저택엔 못 보던 마차 한 대가 대어져 있었다.
의아해하는 로제에게 집사가 답해 주었다.
“안에 각하의 손님이 와 계십니다.”
‘이 시간에?’ 저녁은 사적인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손님이 방문하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로제는 그에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레이모어를 찾아오는 손님은 언제나 많았으니까.
로제는 제 방으로 가기 위해 2층으로 향했다.
2층에 손님과 만나는 접견실이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왔단 말이 무색하게도 문이 열려 있는 접견실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레이모어가 집무실에서 손님을 만나고 있다는 뜻이었다.
무심히 제 방으로 향하려던 순간, 불현듯 로제의 머릿속에 레이모어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너는 괜히 황실의 눈에 띄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얌전히.’
그 말이 생각남과 동시에 방으로 향하던 로제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아버지, 도대체 뭘 하시려는 거지?’
레이모어의 집무실은 2층 접견실의 맞은편에 있었다.
로제는 제 뒤를 따라오는 하녀에게 말했다.
“저녁을 일찍 먹어서 그런지 허기가 지는구나. 간단히 먹을 디저트라도 좀 내오렴.”
“네, 전하.”
하녀가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가자, 로제는 곧장 맞은편 레이모어의 집 무실로 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 집무실 안에 손님이 와 있는 듯,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무슨 이야기인지 안 들려.’
잠시 고민하던 로제는 집무실 옆의 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집무실과 벽 하나를 두고 있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어릴 적, 크리스티안과의 약혼 이야기가 오가던 때 레이모어와 황제의 보좌관이 나누던 이야기를 엿듣던 그 자리였다.
로제는 살짝 창문을 열었다.
하녀들의 말에 의하면, 레이모어는 비가 내리는 날의 청명한 공기를 좋아해서 창문을 자주 열어 놓는다고 했다.
그 예상대로 집무실의 창문도 열려있었다.
그 너머로 레이모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엿들은 로제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