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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46화 (146/164)

146화

‘여기가 어디지?’

꿈속의 엘리사는 어두컴컴한 장소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걷던 그때,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리하르트?’

그 부름을 들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저를 담을 때면 늘 부드러운 빛을 띠던 그의 붉은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선 검은 기운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기운이 스친 손끝이 아릴 정도로,

‘설마….’

엘리사는 제게 다가오는 리하르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성큼 다가온 그는 엘리사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검은 기운이 닿은 피부가 아리고, 숨이 막혔다.

‘리하, 르트……….’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내어 그를 불러보았지만, 그는 그런 저를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엘리사에게서 뿜어져 나온 신성력이 리하르트를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숨통을 조이던 힘이 사라졌다.

엘리사는 괴로운 숨을 토해 내며 조금 전까지 리하르트가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곳에 그는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그녀가 만들어 주었던 정화의 힘이 담긴 펜던트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엘리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하르트…?’

이곳 어디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터질 듯 꽉 조여 오며 감당하기 힘든 슬픔이 차올랐다.

‘아, 안 돼……. 아니야…….’

엘리사는 펜던트를 움켜쥐고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였다.

“…엘리사?”

리하르트의 목소리와 함께 눈이 번쩍 떠졌다.

그 바람에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들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자 시야가 선명해지며 그토록 찾았던 그의 얼굴이 또렷이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안도감과 함께 울음이 터졌다.

“리하르트…’ 꿈은 깨졌는데도, 감정은 계속해서 차올랐다.

리하르트는 온몸을 덜덜 떨며 울음을 터트리는 엘리사를 품에 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독였다.

“괜찮아, 엘리사. 그건 그냥 꿈이야.”

엘리사는 그의 품에 안겨 한참을 울고서야 겨우 울음을 그쳤다.

엘리사가 진정하자, 리하르트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그래.”

잠시 머뭇거리던 엘리사는 잠긴 목소리로 조그맣게 대답했다.

“……네가 죽는 꿈을 꿨어.”

겉으론 강한 척,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하면서도 내심 마음 한편에 가지고 있던 불안이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을 눈치챈 리하르트는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엘리사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제 심장에 가져다 댔다.

엘리사는 아직 눈물이 맺혀 있는 눈으로 리하르트를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손끝으로 쿵쿵, 제 심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뛰는 고동이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얼떨떨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엘리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 심장을 네게 줄게, 엘리사.”

“…….”

“네가 죽는 날까지 지켜보다가, 장례를 치른 후에 널 따라갈게.”

“……..”

“난 네가 허락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거야.”

아이를 어르듯 조곤조곤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에 엘리사의 손 떨림이 멎었다.

물론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심장을 줄 수는 없으리란 걸 안다.

하지만 진심 어린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 그의 심장이 제 것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가 죽지 않을 것 같았다.

항상 제 말이면 무엇이든 들어주던 그였으니까.

엘리사는 저를 품에 안은 채 속삭이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다음 생에는?”

“다음 생에도.”

리하르트는 제 가슴에 얹었던 엘리 사의 손을 제 입으로 끌어가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든 그녀를 안심시키고픈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왜 전생에 아리엔을 사랑했어?”

갑작스러운 엘리사의 추궁에 리하르트의 얼굴에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 비쳤다.

“그건 전생이잖아. 난 그 사람 얼굴 기억도 안 나.”

“흐응,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더니.”

엘리사가 입을 삐죽이며 새치름하게 종알거리자, 리하르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할 소리를.”

“나도 다음 생엔 다른 남자 만나서 아주 뜨거운 사랑을 해야겠어. 넌 다다음 생에 찾아와.”

“뭐?”

“생각해 보니까 억울해. 전생에 그 여자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속삭였을 거 아냐? 그러니까-”

엘리사의 말은 반쯤 장난이었다.

물론, 아리엔과 제네이드를 생각하면 질투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가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데, 다음 생이라고 한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상상이나 될까.

고작 꿈 때문에 운 것이 머쓱해서 장난치고 싶은 마음에 한 말이었건만, 금세 질투에 찬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입술을 제 입술로 막아 버렸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란 엘리사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주한 그의 눈빛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매섭게 일렁이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절대 안 돼.”

이윽고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엘리사의 숨결 하나까지 삼킬 듯 부드러운 입술로 자근자근 그녀를 씹어 삼키던 리하르트는 숨 가빠하는 엘리사의 기색을 눈치채고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그 찰나마저 아쉬운 듯, 그녀의 입술 언저리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불렀다.

“엘리사.”

그의 부름에, 엘리사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무서운 기세로 저를 삼키려던 모습과 달리, 애원하듯 간절한 눈이 제게로 향해 있었다.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할 테니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날 사랑해 줘.”

전해지는 그의 진심에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엘리사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응.”

곧이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날 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영혼 구석구석에 저를 새길 기세로 그녀를 안았다.

기억 하나, 빈틈 하나까지 서로가 서로로 채워진 밤이었다.

*

다음 날, 엘리사는 좀처럼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뒤척이고 있었다.

먼저 씻고 온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 회의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리하르트와 엘리사 모두 귀족 회의에 참석하기로 예정되어 있는 날이었다.

엘리사가 세리어트 후작 위를 이어 받았고, 율리아의 누명 또한 벗었으니 귀족 회의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엘리사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옆으로 슬쩍 다가가 누웠다.

그러자 엘리사가 잠결에 그의 온기를 찾아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품 안이 제 자리인 듯 파고드는 엘리사의 행동이 마냥 사랑스러워 피식 웃음이 났다.

‘그냥 회의를 빼먹을까.’

이대로 귀족 회의에 불참하고 엘리 사의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엘리사에게 깨우지 않았단 원망을 듣겠지……….’

리하르트는 무방비하게 잠든 엘리 사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녀를 깨웠다.

“엘리사.”

“응….”

“오늘 회의는 가지 말고 쉬는 게 어때. 너 너무 피곤해 보여.”

오늘 새벽까지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한 장본인이 하기엔 우스운 걱정이었다.

‘회의’란 말에 감겨 있던 엘리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냐, 가야지. 금방 준비할게.”

비척비척 무거운 몸을 일으킨 엘리 사가 침대 밖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은 몸이 휘청했다.

리하르트는 재빠르게 그녀를 받아 안았다.

“욕실까지 데려다줄게.”

평소 같으면 제 발로 걷겠다며 바둥거렸을 엘리사지만, 오늘은 너무 피곤한 나머지 얌전히 그에게 안겼다.

하지만 욕실에 도착한 리하르트가 은근슬쩍 같이 들어서려 할 때는 단호했다.

“준비하고 방에서 기다려.”

그를 욕실 밖으로 밀어낸 엘리사는 까치발을 들고 그의 입술에 가볍게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리하르트가 붙잡기도 전에 욕실 문을 닫았다.

단호히 닫힌 문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졌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무심코 그쪽을 돌아보자, 벽 모서리에서 빼꼼 쳐다보고 있던 적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나무 바퀴가 달린 말 모형을 타고 있는 걸 보니, 아침부터 산책이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리온에게 성큼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일찍 깼네.”

하지만 리온의 관심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리온은 반짝이는 눈으로 리하르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아가 또 생겨?”

“…아기?”

뽀뽀 했자나! 아조씨랑 누나랑!”

잔뜩 기대한 목소리였다.

리하르트는 그런 리온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다, 헛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뽀뽀로는 아기 안 생겨.”

*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늦기 전에 황궁에 도착했다.

귀족들은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 세리어트 후작님이시군요. 회의에선 처음 뵙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그나저나 두 분, 어제 제도로 돌아오셨다던데 많이 피곤하시겠습니다.”

귀족들이 서로 옆자리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사이, 어느덧 회의 시작시간이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되었음에도 아직 빈 자리들이 제법 보였다.

전부 크리스티안의 최측근들 자리였다.

리하르트는 왜인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싸늘한 눈으로 빈자리를 바라보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지.”

의장인 리하르트의 허락이 떨어짐과 동시에 황궁의 시종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 여러 장의 서신이 들려있었다.

그는 리하르트의 서늘한 눈빛에 흠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서신들을 내밀었다.

“다른 일정으로 인해 회의 참여가 불가할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귀족 회의는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영향력이 센 소수의 귀족들이 모여 회의하는 자리였다.

그들 중 상당수가 빠지면 기껏 시간 내서 회의를 진행하는 의미가 사라졌다.

서신에는 하나같이 ‘황태자 전하와의 선약이 있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크리스티안이 유치한 훼방을 놓은 것이다.

리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서신을 확인한 후, 귀족들에게 말했다.

“회의를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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