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을 나왔다.
그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크리스티안의 시종이었다.
“루벨린 공작 각하, 세리어트 후작각하. 황태자 전하께 두 분을 모셔오라 명받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미소 띤 표정으로 엘리사를 바라보고 있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달갑지 않은 초대에 엘리사의 표정 역시 찡그려졌다.
엘리사가 시종을 따라가려는데, 리하르트가 그녀의 팔을 살짝 붙잡으며 시종에게 말했다.
“아내는 몸이 좋지 않아서, 먼저 집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군.”
크리스티안이 엘리사에게 어떤 흑심을 품고 있는지 알기에,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그에게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엘리사를 음험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눈을 본다면, 이번엔 정말로 죽여 버릴지도 모르니.
그리고 지난밤, 긴 여정에서 돌아 오자마자 제게 시달리느라 고생한 엘리사를 쉬게 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시종은 리하르트의 서늘한 기세에 머뭇거리면서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 하오나 전하께선 두 분을 모셔오라 하셨는데…….”
“가서 쉬어, 엘리사.”
리하르트는 시종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엘리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엘리사는 그에 못 이기는 척 시종에게 말했다.
“여정이 고되었는지 감기 기운이 좀 있답니다. 혹여 전하께 옮으면 안 될 일이니 먼저 돌아가겠다고 아뢰세요.”
시종은 난감한 표정이었으나, 리하르트의 위압감에 눌려 엘리사를 붙잡진 못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인사 대신 그의 손등을 살짝 어루만지고 돌아 섰다.
그렇게 마차가 대기하고 있는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루벨린 공작 부인…… 아니, 세리 어트 후작 각하.”
엘리사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듣고 돌아보았다.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얼굴을 한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의 가슴팍에 달린 황실 문양의 금배지를 보고 알아챘다.
시종장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부인을 뵙고자 하십니다.”
크리스티안은 황태자궁의 접견실에서 리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중얼거리는 크리스티안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시종이 리하르트를 데려오기엔 그리 많이 지난 시간도 아니었건만, 그의 인내심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전하, 루벨린 공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해라.”
문이 열리고 예의 잘난 그 얼굴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섰다.
매번 보아도 한결같이 짜증이 치미는 얼굴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뒤따라 들어올 엘리사를 떠올리곤 금세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지만 접견실의 문은 리하르트만 들여보낸 후 그대로 닫혔다.
그것을 본 크리스티안의 눈빛이 다시 매서워졌다.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는 예의 무심한 눈으로 크리스티안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공작 부인은? 함께 오지 않았나?”
“어제까지 긴 여정으로 몸이 좋지 않은지라, 부득이하게 먼저 공작저로 돌려보냈습니다. 따로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제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핑계를 대었으나, 그것이 리하르트가 제게서 엘리사를 보호하려는 것임을 간파한 크리스티안은 이를 부득 갈았다.
‘치밀한 새끼……….’
하지만 그런 제 흑심을 드러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됐어. 그냥 안부만 물으려던 것이니. 일단 앉지.”
크리스티안은 거만한 눈짓으로 대각선의 소파를 가리켰다.
리하르트는 그의 대각선에 마주 앉았다.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공작. 요즘얼굴 보기가 힘들어? 공이 통 제도에 머무르지 않는 탓에, 내가 오늘 사냥 모임에 초대를 못 했지 않나.”
크리스티안의 말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무얼 하기에 귀족들을 빼 갔나 했더니, 고작 사냥을 간 것이었나.’
사냥에 동원된 황궁의 기사들만 최소 수십일 터.
백성들이 몬스터의 출몰로 고통받는 이 시국에 제도의 치안을 강화하긴커녕, 그 병력을 제 유흥에 쓴 크리스티안이 영 마뜩잖았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감정을 숨긴 채 여상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괜찮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동물 사냥에 취미가 없어서.”
크리스티안이 저를 여기까지 부른 저의는 알 수 없지만, 적당히 말을 끊어 내고 서둘러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런 리하르트의 의도를 파악한 듯, 미간을 살짝 찡그린 크리스티안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사냥하러 가는 길에 보니, 루벨린의 기사들이 백성들의 통행로를 통제하고 있더군. 무장한 기사들이 그리 무서운 얼굴로 경계하고 있으니, 내 백성들이 겁을 먹지 않겠나?”
“근래에 몬스터들이 제도 주변에 자주 출몰하고 있어 영지의 기사들을 불렀습니다. 병력이 부족한 듯하여.”
“아카로아는 우리가 잘 지키고 있으니, 루벨린의 기사들은 이만 돌려 보내지.”
리하르트는 그제야 크리스티안의 의도를 알아챘다.
루벨린의 기사들이 백성들을 지키고, 자신이 백성들에게서 신임을 얻는 것이 영 거슬렸던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도 백성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루벨린을 견제하는 크리스티안의 속내가 역겨웠다.
리하르트는 차가운 저음으로 짓씹듯 물었다.
“그들이 전하의 백성이 맞습니까?”
“뭐?”
“신전에 몬스터들이 습격했을 때도, 산불이 났을 때도, 주거지에 몬스터들이 출몰했을 때도, 아카로아의 기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리하르트의 말속에는 이 상황에 황궁의 기사들을 데리고 사냥을 간 크리스티안을 향한 질책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물론 이번에 몬스터들이 자주 출몰하는 건, 전적으로 리하르트 자신의 책임이기에 루벨린의 기사들을 나서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정황을 모르더라도, 제국의 치안을 지킬 의무가 있는 황실에선 약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해 먼저 나서는 것이 맞지 않은가.
“무릇 군주란 자신의 사람들을 아끼며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법.”
“…….”
“전하께서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시는데, 어찌 그들이 전하의 백성입니까?”
자칫 역심을 품은 자의 말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그에 크리스티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래서, 저들이 공의 백성이라 말하고 싶은가? 그게 무슨 뜻인지 - “
“전하의 우려와 달리 저는 그들의 위에 군림할 생각이 없습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의 말을 단호히 잘라 내며 덧붙였다.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자신의 주군에게 버려지고 소외된 가엾은 이들을 측은히 여겨 나섰을 뿐.”
“…….”
“전하께서 그들을 지키겠다 하시면 루벨린에선 물러나겠습니다.”
해명을 가장한 으름장이었다.
황실에서 나서지 않으면, 기사들을 물리지 않겠다는.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른 아침부터 사냥을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오래 붙잡아두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하군요.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러고는 비아냥거리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 접견실을 나갔다.
크리스티안은 문을 닫고 나가는 리하르트를 보며 입만 벙긋거리다, 앞에 놓인 찻잔을 내던졌다.
깨진 찻잔의 파편이 사방에 흩날렸다.
“저 건방진 자식이……….”
크리스티안이 제 분을 못 이기고 이를 갈고 있던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펠리스 후작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크리스티안은 갑작스러운 레이모어의 방문에 의아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장인어른께서 간만에 어쩐 일이시지?’
엘리사가 세리어트 후작이 된 이후부터 왜인지 부황과 레이모어의 사이가 멀어진 걸 크리스티안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부황은 이렇다 할 설명 없이 그저 레이모어를 가까이하지 말라고만 했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은 로제와 사이가 껄끄러운 것과 별개로, 레이모어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장인은 그가 무엇을 하든 너그럽게 여겨 주고 비위를 맞춰 주었다. 엄격한 아비와는 달랐다.
“드시라 해라.”
크리스티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레이모어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크리스티안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었다.
“불충한 신이 간만에 찾아뵙습니다, 전하.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오랜만이오, 장인어른, 그러잖아도 한번 찾아갈까 했는데 이리 먼저 찾아 주다니, 이리 기쁠 데가. 일단편히 앉지.”
레이모어는 크리스티안의 대각선에 앉으며 미안함을 표했다.
“저야말로 자주 찾아뵈었어야 했는 데, 송구합니다. 불민한 저의 대처로 폐하께서 오해를 하시어, 찾아뵙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바마마께서 충신인 장인어른을 오해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크리스티안은 마침 궁금하던 것을 레이모어가 이야기하자, 기다렸다는 듯 되물었다.
그에 레이모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으나, 이내 갈무리하고 답했다.
“조금 전에 루벨린 공작이 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공작이 별다른 말은 안 했습니까?”
레이모어의 입에서 리하르트의 이름이 나오자, 크리스티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루벨린 공작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그와 그의 처가 저를 모함하여 폐하와 제 사이를 이간질했습니다.”
“뭐라고?”
“아주 교묘하고 간사한 이들이지요.”
“이런 간악한 무리를 보았나!”
레이모어의 이야기에, 크리스티안은 크게 분개했다.
평소 리하르트에게 열등감과 앙심을 품고 있는 그이기에 더욱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의도한 크리스티안의 반응에, 레이 모어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들을 멀리하십시오, 전하.”
*
시종장이 엘리사를 데려간 곳은 황궁의 후원에 있는 호숫가였다.
봄을 맞이한 후원의 호숫가는 피어 날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와 벚나무로 가득해 그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황제는 홀로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다.
엘리사는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이곳은 봄이면 봄대로, 여름이면 여름대로, 가을이면 또 가을대로 계절마다 운치가 있어.”
“네, 참 아름다운 곳이네요.”
“좀 걷겠나?”
엘리사는 서로 살갑지 않은 사이에 웬 산책인가 싶었지만, 잠자코 그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 때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호수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 있나?”
엘리사는 뜬금없는 그의 질문이 미심쩍었으나, 생각나는 대로 대답했다.
“선대 폐하 중 한 분이 만드셨나요?”
“아니. 그대의 선조, 아리에 세리어 트가 만든 것이라네.”
엘리사는 눈을 깜빡였다.
아리엔이 협곡에 정화의 호수를 만든 것은 알았지만, 황궁에 호수를 만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네이드를 사랑한 아리엔이라면 그를 위해 황궁에도 호수를 만들었을 법했다.
그런데, 뒤이어 들려온 황제의 말이 엘리사의 감흥을 깨트렸다.
“그녀가 사랑한 초대 황제 미하일님을 삿된 것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지.”
엘리사는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고대의 서에 적힌 진실을 보았기에 그것이 왜곡된 역사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적당히 황제의 말에 맞춰주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문제는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황제의 의도였다.
“근래에 제도 부근에 몬스터들이 많이 출몰하고 있다지. 그 탓에 백성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어.”
엘리사는 ‘알면 지원 병력을 좀 풀지 그러셨어요?‘란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으나 애써 참았다.
그리고 무어라 답할까 잠시 궁리하고 있던 그때, 앞만 보며 걸어가던 황제가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달리 인자한 미소를 띠며.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아이를 위해, 그리고 두려움에 떠는 제국민들을 위해 그대가 숭고한 희생을 하는 건 어찌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