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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48화 (148/164)

148화

엘리사는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지금, 뭐라고?’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저런 말을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엘리사가 아무런 대답 없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일세.”

이제 와 농담이라고 하기엔, ‘희생’을 강요하던 그의 눈빛이 너무도 진실해 보였었다.

“요즘 제도 주변이 뒤숭숭한 걸 보니, 이 세계의 종말 직전까지 갔었던 건국 신화가 생각나서.”

“…….”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 아닌가. 친히 사병을 풀어 백성들을 비호하는 그대라면 어떤 마음일까, 싶어 물어본 것이라네.”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 표정이 기괴하고 섬뜩했다.

“이만 돌아가지.”

황제는 말없이 서 있는 엘리사를 지나쳤다. 그때였다.

“영웅은.”

그의 등 뒤에서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서야 비로소 얻는 영광이라 하지요.”

황제는 감정 한 자락 담기지 않은 눈으로 엘리사를 돌아보았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애석하게도 저는 평범한 소시민이라, 그런 거창한 영광 따위에는 관심이 없답니다.”

“……”

“제국을 구한 영웅으로 역사에 남기보다는 한 가문의 가주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아이의 엄마로 평범하게 살고 싶거든요.”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당신 뜻대로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내가 리하르트 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듯이, 리하르트에게도 내가 없는 미래를 살게 하고 싶지 않아.’

황제가 리하르트의 힘에 대해 알리 없는데도 엘리사는 그에게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에게 말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흔들린 제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다.

“참 재미없군.”

황제는 조금 전의 웃음기를 싹 지운 채 무심한 눈으로 엘리사를 바라보다 돌아섰다.

*

엘리사가 탄 마차가 루벨린 공작가로 들어섰다.

마차에서 내린 엘리사는 막 저택에서 나오던 리하르트와 마주쳤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엘리사를 보자 안도한 듯 표정을 풀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리하르트?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네가 황제와 만났다고 해서,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봐…….”

저를 걱정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대답에, 엘리사는 씩 웃으며 그를 안았다.

“걱정해 줘서 고마워, 남편. 난 괜찮아.”

엘리사는 최근 들어 그와 잠깐이라도 떨어졌다 다시 만날 때면 먼저 그에게 안기곤 했다.

그 온기를 느끼고, 그 심장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그가 아직 살아 있다.

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내면에 깔려 있는 불안함을 달래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늘 그랬듯 반사적으로 엘리사를 안아 주던 리하르트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이야기 했어? 황제가 네게 할 이야기는 없을 텐데.”

“방에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엘리사는 리하르트와 함께 방으로 올라왔다.

리하르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시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다급한 그를 보니, 황제가 혹여 그녀에게 허튼 말이라도 하지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엘리사는 어느 정도 황제가 한 말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

“최근 제도에 자주 출몰하는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고, 루벨린에서 병력을 끌고 온 것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야.”

황제가 제게 희생하란 소리를 했다고 하면, 그가 당장에라도 황궁을 초토화시킬지도 모르니.

그 이야기를 들은 리하르트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크리스티안도 같은 얘길 했어. 아무래도…… 하루빨리 이 일을 해결하는 게 좋을 거 같아.”

지금까지 제도에 있었던 몬스터의 출몰은 루벨린의 기사들이 모두 막아 냈다.

리온의 사건 땐 큰일이 날 뻔했지만, 다행히 리온의 능력으로 몬스터를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힘이 점점 더 커지고, 영향력이 미치는 반경이 더 넓어진다면.

아카로아를 넘어 다른 지역까지 힘이 미치게 된다면.

그땐 루벨린의 기사들만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고, 불가피한 피해자들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자들은 취약 계층일 확률이 높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렇다 할 해결책은 떠오른 것이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하르트는 언젠가 에이든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엘리사. 그때 성하께서 말씀하신 거 말이야.”

“아버지가 말씀하신 거?”

“검은 물감을 희석할 순 있다는말. 그 말대로 내 힘을 정화하는 건 어떨까.”

엘리사는 그제야 리하르트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물론 검은 물감에 계속 물을 섞다보면 물에 가깝게 희석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영혼을 건드리는 일이야. 자칫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거다.

에이든은 그것이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엘리사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안 돼. 그건 너무 위험해.”

“하지만 지금 해 볼 수 있는 건 그 방법밖에 없잖아.”

늘 그녀의 뜻을 따르던 리하르트도 이번엔 완고하게 나왔다.

엘리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가 위험해지는 건 상상만으로도 싫었다.

“그래도 싫어. 난…… 네가 위험해지는 게 싫어.”

“이대로 두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아니, 분명 더 위험해지겠지.

그걸 알면서도 가만히 손 놓고 볼수는 없어.”

“…….”

“엘리사. 네가 나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야.”

엘리사는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맞으니까.

하지만 그 반대로도 생각할 수 있었다.

“리하르트, 네가 나였으면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는 방법을 시도했을까?”

엘리사의 물음에 리하르트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울 듯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를 안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아니. 세상을 버리고 널 선택했겠지.”

이번에도 그는 그녀에게 졌다.

하지만 엘리사는 자신의 승리가 마냥 기쁘진 않았다.

“내일 아버지께 가서 가능성이 있는 다른 방법이 없는지 한번 여쭤볼게.”

“그래. 그러자.”

리하르트는 대답과 동시에 엘리사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처음부터 그 자리가 제 자리인 것처럼 맞붙은 입술은 서로의 호흡을 탐하며 진득하게 숨을 얽었다.

리하르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엘리 사를 안아 들고 침대로 향했다.

그러다 번뜩 정신을 차린 엘리사가 파드득 몸을 떼며 그를 밀어냈다.

“리, 리하르트, 우리 우선 목욕부터 하고….”

그 순간, 그의 가슴팍에 닿은 손에 길쭉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벨테인 후작가의 별장에서부터 그의 옷에 들어 있던 것인 듯했다.

엘리사가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는 순간, 리하르트의 발걸음이 움직였다.

여전히 그녀를 안은 채로.

엘리사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씻으러 가자.”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에 짙은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엘리사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서로 잠시 떨어질 때마다 저가 그의 온기를 찾듯, 그 역시 제 온기를 찾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하는 순간순간이 너무도 애틋하고 소중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시도 때도 없는 거 아니냐고!’

이 대낮에, 욕실에서!

두 사람이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사용인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냔 말이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리하르트, 이따, 저녁에-”

하지만 엘리사의 가벼운 저항은 그의 입맞춤으로 제압되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서 살짝 입술을 뗀 채로 속삭였다.

“도망치려고 하면 복도에서도 입맞춰 버릴 거야.”

이 문만 나서면 하녀들과 하인들이 있을 것이다.

귀여운, 그러나 달콤 살벌한 협박이었다.

자신이 단호히 거부하면 강제하지 않을 그를 알았지만, 엘리사는 새치 름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의 입술을 피할 뿐 발버둥 치진 않았다.

“몰라. 마음대로 해.”

그녀의 허락을 받은 리하르트는 피식 웃고는 곧장 욕실로 향했다.

*

저녁 식사가 끝나고 손님을 맞기엔 늦은 시간.

황제의 침실에 달갑지 않은 방문객이 찾아왔다.

“폐하, 펠리스 후작 각하께서 뵙기를 청합니다.”

황궁 후원에서 아스트리드 후작을 소개해 준 이후로는 자신을 찾지 않고 몸을 사리던 레이모어였다.

황제는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았으나, 한편으로는 이제 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인지 호기심이 일기도 했다.

“들라 하지.”

문이 열리고 레이모어가 침실로 들어섰다.

어쩐지 전보다 그의 얼굴에 그늘이진 듯했다.

황제는 가운 차림으로 그를 맞이했다.

“어쩐 일인가, 후작.”

레이모어는 그에게 다가와 예를 갖추며 말했다.

“떠나기 전, 폐하께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자 왔습니다.”

황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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