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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51화 (151/164)

151화

제도 외곽, 루벨린의 기사들과 황궁의 기사들은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대치 중이었다.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였다.

그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친자 검사를 위해 루벨린 공작저로 보냈던 황궁의 기사들과 시종장이었다.

크리스티안은 시종장이 말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답을 채근했다.

“친자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됐지?”

서둘러 증거를 잡아 부황을 죽인 리하르트에게 합법적으로 죄를 묻고 싶은 마음이었다.

옆에 있던 레이모어 역시 같이 온 부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어째서 황손 저하를 모셔오지 않았나?”

리온이 황손이란 사실이 밝혀진 이상, 더 이상 루벨린 공작가에서 리온을 데리고 있을 명분이 없었다.

만약 루벨린 공작가에서 그것을 거부한다면 죄만 더욱 가중될 뿐이다.

하지만 시종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전하. 검사 결과 그 아이는 황손이 아니었습니다.”

“뭐?”

크리스티안은 그럴 리가 없다는 듯 시종장에게 되물었으나, 시종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크리스티안은 레이모어를 돌아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장인어른? 그 아이가 내 피를 이은 아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상치 못한 결과에 혼란스러운 건 레이모어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크리스티안의 사생아를 데리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로제가 그런 것을 거짓말할 리가 없는데……. 그럼 그 아이 말고 다른 아이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리온이 에이든과 엘리사의 손에 길러지기 시작한 시기가 너무도 공교로웠다.

레이모어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제대로 확인한 것이 맞는가?”

“세 번이나 검사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시종장의 대답은 같았다.

옆에 선 부기사단장 역시 시종장의 대답에 동의하듯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들의 반응에, 조금 전까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레이모어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이 자신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레이모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리하르트는 당연히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레이 모어를 마주 보았다.

엘리사는 아무런 대책 없이 리온을 공작저에 데려온 게 아니었다.

*

한 시간 전, 루벨린 공작저.

리온의 머리카락과 크리스티안의 머리카락 위로 시약이 떨어졌다.

시종장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시약의 반응이 오기까지 늦어도 5분.’

5분 안에 시약이 푸른색으로 변하면 두 사람이 부자지간이란 뜻이고, 시약이 굳으면 혈육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엘리사와 루벨린 공작가의 일원들은 물론이고, 시종장과 황궁의 기사들 역시 긴장한 채 시약의 반응을 기다렸다.

째깍, 째깍, 째깍……….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서서히 시약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종장과 부기사단장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시약이 굳어진 것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레이모어는 분명 리온이 크리스티안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시종장은 굳어진 시약과 머리카락들을 당황한 눈으로 바라보다, 옆에 있던 기사에게 지시했다.

“다른 머리카락으로 한 번 더 해보십시오.”

하지만 두 번째 검사 결과도, 믿을 수 없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한 세 번째 검사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지켜보던 엘리사는 리온을 데리고 있는 황궁의 기사에게 다가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몇 번이고 검사해 봤자 결과는 바뀌지 않을 듯한데, 이만 아이는 돌려주시죠.”

예상치 못한 결과에 황궁의 기사가 어물거리는 사이, 엘리사는 그에게서 리온을 빼앗듯 데려와 품에 안았다.

그리고 겁먹은 채 웅크린 리온을 다독거렸다.

“얌전히 잘 있었어, 리온. 이제 괜찮아.”

“웅….”

엘리사는 제게 안겨 오는 리온을 감싸 안으며 시종장과 기사단장을 쏘아보았다.

“이제 내 말을 믿을 건가요?”

시종장은 굳어진 시약과 머리카락을 쳐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던 부기사단장이 바닥에 떨어진 리온의 가발을 발견하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그런데 그 아이, 가발은 왜 쓰고 있었던 겁니까?”

조금 전까지 엘리사를 죄인 취급하며 반말을 하던 그의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엘리사는 조소하며 대답했다.

“하녀가 아이의 머리카락을 잘라주다가 실수로 너무 짧게 잘라 버렸거든요. 아이가 너무 속상해하기에, 가발을 하나 장만해 주었어요.”

엘리사의 말대로, 리온의 앞머리 한쪽이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성하게 잘려 있었다.

“이왕이면 아이의 마음에 드는 색 깔로 골라 주고 싶어 물었더니, 금발을 원한다고 했고요. 그게 문제가 되나요?”

시종장과 부기사단장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여전히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증거가 없으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엘리사는 그런 그들을 보며 겉으론 언짢은 기색을 비쳤으나, 속으론 안도했다.

‘미리 대비해 놓길 잘했어..’

엘리사는 리온을 데려온 후,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대책을 세워 두었다.

리온의 신분이 밝혀지면 로제의 만행을 밝히면 된다.

그렇게 되면 루벨린이 곤란해지진 않겠지만, 문제는 리온이었다.

리온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황궁으로 끌려가 황태손으로 책봉될 것이다.

하지만 리온이 황궁에서 과연 행복 할까.

그래서 엘리사는 리온이 만에 하나라도 들킬 수 있는 확률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했다.

친자 검사는 보통 피나 머리카락으로 진행된다.

두 사람의 피 혹은 머리카락을 같이 놓고 시약을 떨어트리면, 시약이 피 혹은 머리카락에서 각각의 마나를 추출했다.

추출된 마나가 서로 비슷한 종류라면 푸른색을 띠며 융합되었지만, 서로 다른 마나를 지녔다면 시약이 굳어지는 식으로 친자를 판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감히 황태자의 몸에, 그리고 황태손의 몸에 상처를 낼 순 없을 터.

리온이 크리스티안의 사생아로 의심받게 되면, 친자 검사는 머리카락으로 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마나를 조작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엘리사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가진 신성력으로 얇은 막을 만들어 머리카락을 감싸면 어떨까?’

시약은 액체이니, 머리카락에 물의 힘을 사용해 아주 얇은 보호막을 만든다면 겉보기엔 마법을 썼다는 것이 티 나지 않을 것이다.

엘리사는 자신의 가설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하네스의 머리카락과 보호막을 씌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시험해 보았다.

아주 미세한 막을 형성하는 작업이라 꽤 난이도가 있어 몇 번 실패했으나, 몇 번의 연습 끝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엘리사의 예상대로였다.

신성력으로 만든 보호막은 머리카락에서 마나가 추출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혹시라도 보호막에 틈이 생겼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습격은 무사히 막아 냈으니, 이번에 반격에 나설 차례였다.

엘리사는 진정이 된 리온을 하녀들에게 보내고 시종장과 부기사단장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다짜고짜가택 침입에, 무력을 행사하여 공작가의 사병과 아이를 건드리기까지………. 정말이지, 무례하기 짝이 없군요.”

“그건 황태자 전하의 명-”

“설마하니 황제 폐하께서 오랜 벗인 루벨린을 이리 박대하라고 하시진 않으셨을 터.”

엘리사는 황실의 명이라 변명하려는 부기사단장의 말을 자르며 일부러 ‘오랜 벗’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비록 루벨린과 황실이 서로를 견제하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긴 하나, 표면적으로는 선대 때부터 이어져 온 오랜 친우 사이였다.

여기서 만약 루벨린 공작가에 무단으로 침입하고, 무력을 행사한 것이 황실의 명이었다는 핑계를 대면 황실은 ‘오랜 벗을 욕보이게 한 무례한 가문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시종장과 부기사단장이 임의로 공작저에 무단 침입한 것이라 하면, 고스란히 그 책임을 지게 될 터였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는 뜻인데…….”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인 시종장과부기사단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엘리사는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이 저택, 루벨린 공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대들의 무례에 대한 책임을 묻겠어요.”

“…….”

“우선은 내가 묻는 물음에 답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엘리사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엘리사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군가요? 이런 거짓된 정보로 루벨린과 황실을 이간질한 자가.”

*

리하르트는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인 레이모어와 크리스티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제가 정말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루벨린의 기사들을 굳이 아카로아로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니.”

만약 그가 반역을 일으킬 마음을 먹었다면, 괜히 꼬리 밟힐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실력을 자신함과 동시에 황궁의 병력을 얕잡아 보는 말이었으나, 그 누구도 그에 반박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전하께서 아카로아의 치안을 강화할 병력만 동원해 준다면 당장이라도 돌려보내겠습니다.”

“…….”

“그리고 폐하의 일은 매우 통탄스럽군요. 루벨린도 진범을 찾는 데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하르트의 서늘한 시선이 레이모어에게로 향해 있었다.

레이모어는 낭패감에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일이 그의 예상과는 아주 다른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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