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시종장과 황궁의 기사들이 돌아간 후, 엘리사는 놀란 리온을 데리고 방으로 올라왔다.
“자다가 깨서 많이 놀랐지, 리온?”
“우웅……. 아까 그 아조씨들은 누구야?”
“그 아저씨들은 황궁에서 온 사람들이야.”
엘리사의 대답에 리온은 흠칫하더니,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 그롬 리온이 황궁에 가야 대?
완쟈님인 거 들켜써?”
“아니. 누나가 마법을 써서 아저씨들이 모르게 했어.”
리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나, 엘리사는 마음이 불편했다.
‘리온과 크리스티안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엘리사가 본 미래에서 크리스티안은 리온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껄끄러워했다.
황제가 게으르고 못 미더운 크리스티안보다는, 가문의 힘을 이어받은데다 총명하기까지한 리온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했으니까.
지금 크리스티안이 리온을 찾는 이유도 혈육의 정 때문이 아닌, 루벨린을 황제 독살범으로 단정 짓고 증거를 갖다 붙이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리온의 마음은?’
아무리 부족하고 자격 없는 아비라도, 한 번은 제대로 만나고 싶지 않을까?
‘물론 황궁에 리온을 보내기엔 위험 요소가 많으니 보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리온의 의사는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리온이 원한다면, 리온의 신분을 숨긴 채 크리스티안을 만날 수 있도록 해 줄 수는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엘리사는 리온에게 물었다.
“리온. 리온은 아빠 보고 싶지 않아?”
‘아빠’란 단어에 리온은 눈을 깜빡거렸다.
엄마가 살아 있을 때, 아빠에 대해서 물어보면 엄마는 ‘아빠는 아주 멀리 여행을 떠났다고 했었다.
하지만 엘리사는 리온이 왕자님이라고 했다.
그 인과 관계를 생각하던 리온이 되물었다.
“리온이 아빠는 왕님이야?”
‘황제’라는 단어를 몰라서 동화 속왕자님의 아빠를 떠올리고 ‘왕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은 아니지만 곧 왕님이 될 사람이야.”
“아빠 만나면 누나 못 만나………?”
“아니. 리온이 황궁에 가기 싫으면 왕자님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만나면 돼.”
“오옹.”
“리온이는 아빠 만나고 싶어?”
리온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엘리사는 그런 리온에게 조곤조곤 이야기했다.
“사실 리온은 아빠랑 전에 만난 적이 있어.”
“언제?”
“작년에, 신전에서 리온이 씻기 싫다고 도망가다가 흙 묻혔던 사람 기억나? 머리가 리온처럼 빨간 남자.”
엘리사는 크리스티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은 숨기고, 리온이 스스로 크리스티안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알려 주었다.
아빠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크리스티안을 만났다간, 오히려 더 큰 상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특히나 크리스티안의 언행에 화가 나서 가문의 힘까지 쓰려고 했던 아이니까.
리온은 잠시 기억을 더듬다, 크리스티안을 떠올린 듯 표정을 굳혔다.
“그 아조씨 나뿐 아조씨야. 엄마랑 리온이한테 나뿐 말 해써.”
“그 아저씨가 리온이 아빠야.”
리온은 적잖이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 아조씨 시러. 만나기 시러.”
아마 그 사람이 자신의 아빠라는 걸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크리라.
아직 아이에겐 좀 더 자랄 시간이 필요했다.
엘리사는 리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독였다.
“알겠어. 그럼 만약에, 나중에 리온이 마음이 바뀌어서 아빠가 만나고 싶어지면 말해 줘.”
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사는 리온을 눕히고 아이가 잠들 때까지 지켜보았다.
낮잠 시간이 지난 리온은 엘리사의 품에 안겨 잠시 꼼지락거리다, 금세잠들었다.
엘리사는 잠든 리온의 배를 토닥이며 조금 전, 시종장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황제 폐하께서…… 독살당하셨습니다.’
레이모어는 그 범인으로 리하르트를 지목했고, 증거로 리온을 내세웠다고 했다. 황손인 리온을 내세워 황가를 위협하려는 의도라고.
물론 정황상 진범은 레이모어일 확률이 높았다.
황가와 루벨린의 갈등을 증폭시킬 속셈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그가 얻는 게 뭐지?’
보통의 예상이라면 황실과 루벨린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황실의 신임을 얻으려 일을 벌이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을 벌인다 해도 황제를 죽이는 건 너무나 극단적이다.
황실과 루벨린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방법은 그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라도 충분히 많을 테니까.
‘그가 정확히 무슨 속셈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몰라도, 분명 위험한 징조야.’
엘리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방문이 열리고 리하르트가 들어왔다.
엘리사는 리온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리하르트, 좀 전에 황궁에서 사람이 다녀갔어.”
“응. 크리스티안이랑 펠리스 후작이 우리 쪽으로 왔었어.”
엘리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전개였다.
“범인은 역시…… 펠리스 후작이겠지?”
“아마도.”
“그 사람, 도대체 목표가 뭐지? 황실의 신임이나 권력을 바라고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닐 텐데.”
리하르트는 서늘히 침잠한 눈으로 크라바트를 풀며 대답했다.
“전쟁.”
그의 대답에 엘리사의 눈이 놀라 커졌다.
리하르트는 자신의 추론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이 힘, 내가 살의를 품을수록, 살생을 할수록 강해지는 것 같아.”
혼돈과 죽음의 힘.
힘의 본질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만약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자가 이 일을 벌인 이유와도 맞아떨어져.”
“그럼….”
“오랜 시간 루벨린과 악연을 쌓아 온 황가에선 그저 심증만으로도 날 범인이라 생각할 것이고, 난 당연히 그 사실을 부정할 테니까.”
“…….”
“그 갈등이 풀리지 않은 채 점점 심화된다면 루벨린과 황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겠지.”
그렇게 되면 가문의 수장이자,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리하르트는 원치 않는 살생을 해야 할 터였다.
그것이 바로 레이모어의 목적.
엘리사는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그의 뜻대로 되도록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리하르트는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곧 황제 독살의 진범을 가려내기 위한 재판이 열릴 거야. 펠리스 후작은 내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준비를 해 올 거고.”
“…….”
“재판 전까지 그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모아, 그 재판에서 죄를 밝혀야 해.”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를 위해서도,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무고하게 희생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전쟁만은 막아야 했다.
엘리사는 그러다 문득, 갑작스러운 황실 사람들의 방문에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전에 해결할 일이 있어,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의아한 눈으로 엘리사를 쳐다보았다.
엘리사는 조금 전과 달리 희망에 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힘을 멈출 방법, 알아낸 것 같아.”
*
다음 날,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제도 외곽의 공터로 나왔다.
공터에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에이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마차에서 내려 그에게 다가섰다.
“바쁘실 텐데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번거롭게 먼 길 오게 해서 죄송해요, 아버지.”
“천만에. 이 힘에 관한 일은 이 제국과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
세리어트의 힘을 이은 자라면 마땅히 나서야 할 일이니 미안해할 필요 없단다.”
에이든은 괜찮다며 엘리사를 다독이고 물었다.
“그럼 어제 네가 말한 그 방법대로 해 볼 생각이니?”
엘리사와 리하르트, 그리고 에이든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바로 리하르트의 힘 때문이었다.
엘리사가 생각한 가설대로, 그의 영혼이 두 개로 나뉘어 있다면 그중 하나를 분리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혹시라도 이 위험한 힘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경우를 대비해 인적이 드문 장소로 이동하고, 에이든까지 부른 것이었다.
엘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젯밤에 한 번 더 그 틈이 있는 걸 확인했어요.”
지난밤, 엘리사는 벨테인 별장에서 보았던 ‘틈’을 찾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리하르트의 영혼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틈이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했다.
‘전보다 그 크기가 더 작아진 것 같았지만….’
말 그대로 영혼 조각 사이의 틈이기에, 틈의 크기가 작아졌다는 건 융합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일 수 있었다.
그 방증으로 최근에 그의 힘이 미치는 영향력이 커진 것일 테고, 그러니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아버지는 근처에서 방어 마법을 시전해 주세요.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막아 낼 수 있도록요.”
“그래, 그러마.”
에이든은 엘리사, 리하르트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리하르트는 따라온 톰슨과 기사들에게 에이든의 방어 마법 밖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명령했다.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등 뒤로 다가서 손을 얹었다.
“리하르트, 뭔가 이상 증상이 느껴지면 바로 말해야 해.”
“그래.”
준비를 마친 엘리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온몸의 마나가 그의 몸속에 있는 영혼에 집중되자, 서서히 그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검고, 불길한 영혼, 그러나 엘리사에겐, 가장 사랑스럽고 마음 아리게 하는 영혼.
엘리사는 간절함을 담아 그의 영혼을 살폈다.
그때였다.
‘찾았다!’
검은 영혼 사이로 아주 미세한 틈이 보였다.
그 사이로 보이는 작은 빛이 마치 희망처럼 느껴졌다.
엘리사는 신성력을 흘려보내 영혼을 신성력으로 감쌌다.
그러자 두 개로 이루어진 영혼의 모양이 또렷하게 보였다.
좀 더 바깥쪽에 위치한 영혼 조각이 안쪽의 것에 붙어 있는 형상이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
엘리사는 영혼의 틈에 신성력을 채워 조금씩 벌렸다.
하지만 분리되긴커녕, 바깥쪽의 조각은 오히려 검은 기운을 뿜어내며 더욱더 붙으려 했다.
‘이대로는 분리가 안 될 것 같은데….’
잠시 고민하던 엘리사는 다시 영혼의 틈을 벌렸다.
그리고 그 틈에 두 영혼이 다시 붙을 수 없도록 신성력의 응집체를 만들어 바깥쪽 영혼의 자리를 메웠다.
좁은 공간에 많은 신성력을 주입하는 데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엘리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을 때였다.
‘어?’
내내 저항하던 바깥쪽의 영혼 조각이 크게 요동치더니, 검은 힘이 엘리사를 공격해 왔다.
“읏……!”
갑작스러운 공격에, 엘리사의 신성력이 반사적으로 검은 힘을 막아서며 힘끼리 강력한 충돌이 일어났다.
쾅!
그 충격으로 엘리사가 밀려나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