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거대한 마력이 충돌하며 일으킨 파장은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에이든에게까지 미칠 정도로 강력했다.
“엘리……… 큭!”
몸의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엘리사를 본 에이든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찰나의 순간, 충돌의 파장이 에이든의 방어 마법까지 깨트렸다.
에이든은 비틀거리는 몸의 균형을 잡고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리하르트가 쓰러지는 엘리사를 받아 안고 있었다.
“리하르트………?”
마력의 충돌에 놀랐던 엘리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엘리사. 괜찮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걱정으로 살짝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외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몸을 훑으며 그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안도했다.
하지만 엘리사는 아직 안도할 수 없었다.
엘리사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영혼이 보였다.
엘리사는 그의 영혼을 살폈다.
‘사라졌어.’
검은 영혼의 반쪽은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 반쪽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자리엔 엘리사가 조금 전에 채워 넣은 신성력의 응집체가 대신 남아 있었다.
엘리사의 계획대로, 영혼 조각의 반쪽을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됐어…….”
이제 이 세계가 멸망할 것이란 걱정도, 그를 잃을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그와 남은 평생을 함께 살수 있다.
그 안도감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그간 그의 앞에선 숨기려 애썼던 걱정과 두려움, 불안감이 한꺼번에 북받친 까닭이었다.
엘리사는 울먹이며 리하르트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울며 웃으며 제게 안겨오는 엘리사에게 속삭였다.
“걱정시켜서 미안해, 엘리사.”
애틋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에이든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공터 옆, 울창한 숲 사이로 그런 그들을 지켜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있었으나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그날 밤, 먼저 목욕을 마친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데리고 리온의 방으로 왔다.
하네스를 먼저 재우려고 했으나, 하네스가 도통 잘 생각을 하지 않아서 결국 리온을 먼저 재우러 온 것이었다.
리온은 리하르트에게 동화책을 내밀었다.
“이거 읽어 조.”
리하르트는 리온이 건네는 동화책을 건네받았다.
『파르의 모험』
신목의 숲에 갈 때도 가지고 갔던 동화책이었다.
“너 이거 열 번도 더 읽었잖아.”
“또 읽을 고야! 또! 리온이는 이동화책이 젤 조아.”
리온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의 동화책임에도 또 그걸 읽겠다고 우겼다.
본인이 좋다니 별수 없었다.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리온의 침대한쪽에 내려 주었다.
“하네스, 너도 형이랑 같이 동화책듣자.”
“으부부.”
하지만 하네스는 동화책에 관심이 없는 듯, 가져온 오뚝이를 가지고 노는 데 푹 빠져 있었다.
리하르트는 리온의 요구대로 동화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파르는 별의 숲에 사는 아기 드래곤이에요. 파르한텐 가족도 친구도 없어요.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요.”
“그래서 파르는 외로워서 친구 구하러 갈 고야.”
리온은 자신이 기억하는 대목이 나오자, 리하르트가 읽어 주기도 전에 먼저 다음 내용을 말해 버렸다.
리하르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재미있어하는 리온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잠자코 읽어 주었다.
다음 이야기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이 기대하는 이야기가 곧 나올 것이 아이를 더 즐겁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파르는 앵무새 무무와 친구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여행을……….”
저도 모르게 몰입해서 동화책을 읽던 리하르트는 고른 숨소리를 듣고 말을 멈췄다.
조금 전까지 뒷이야기를 조잘거리던 리온이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그런 리온을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피식 웃었다.
낯선 곳에서 금세 적응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며 성장해 가는 아이가 새삼 기특하게 느껴졌다.
리온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 하나 기댈 곳 없고 어디 하나 마음 편히 몸 누일 곳 없던 제 어린 시절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잘 자라, 꼬맹이.”
리하르트는 리온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배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때, 옆에서 하네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떼떼떼떼!”
하네스는 아직도 오뚝이와의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조그맣고 통통한 손으로 죄 없는 오뚝이를 찰싹찰싹 때리다가 제 입으로 가져가 쭙쭙 빨았다.
그만큼 놀고도 아직 졸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리하르트는 졌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며 오물거리는 하네스의 뺨을 콕찔렀다.
“하네스, 형은 이제 자는데 넌 언제 잘래?”
“으브브!”
“네가 빨리 자야 아빠가 엄마랑 놀지.”
“음마?”
하네스는 ‘엄마’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듯, 입에 물고 있던 오뚝이를 떼어 내고 엘리사를 찾기 시작했다.
“음마. 음마!”
“엄마 좀 있으면 올 거야.”
리하르트는 혹여나 리온이 잠에서 깰까, 재빨리 하네스를 안아 달랬다.
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하네 스는 엘리사를 찾던 걸 그만두고 다시 오뚝이를 빨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가 실컷 빨던 오뚝이를 갑자기 리하르트에게 내밀었다.
“으뿌!”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로 리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아빠도 오뚝이를 빨아 보라고 하는 것처럼.
리하르트는 그런 하네스가 우스워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재밌는 걸 아빠한테 양보해 주다니 기특하네, 우리 아들.”
리하르트는 하네스가 건넨 오뚝이를 빠는 대신 가볍게 입을 맞췄다.
하네스의 통통한 우윳빛 뺨에도 마찬가지로 입을 맞췄다.
“꺄히!”
아빠의 애정이 담긴 입맞춤을 받은하네스가 흡족한 듯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하네스를 웃으며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하네스의 방 웃는 조그마한 입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웃음을 멈췄다.
“하네스, 너 이 났어?”
“으에?”
하네스의 입술을 살짝 들춰 보려 했으나, 통통한 혓바닥이 자꾸만 그의 손가락을 날름거려 보기가 쉽지 않았다.
리하르트는 하네스가 혓바닥을 움직일 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분홍빛 혓바닥 아래로 하얗고 앙증맞은 젖니가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어제저녁, 엘리사가 하네스에게 수유할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이었다.
엄마 아빠 몰래 자란 작은 이가 귀엽고 경이로웠다.
그것을 본 리하르트의 눈에 경탄이 어렸다.
“하네스, 너 그래서 요즘 많이 울었구나?”
그동안 순하게 잘 지내던 하네스가 한동안 자주 울고 보채기에, 어디 아픈 건 아닌지 걱정되어 주치의에게 물었더랬다.
아직 어린 하네스를 데리고 이곳저곳 많이 다녔던 차라 더욱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주치의는 뜻밖의 이야기를 했다.
‘도련님이 이앓이를 하시는 것 같네요. 아무래도 곧 이가 나시려나 봅니다.’
그래서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어쩐지 벅찬 기분이 들었다.
이제 엘리사와의 사랑의 결실인 이 사랑스러운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게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와 닿았다.
소중하고, 소중한 순간이었다.
이 순간을 엘리사와 함께하고 싶었다.
“엄마한테 자랑하러 가자.”
리하르트는 하네스를 안고 서둘러 리온의 방을 나왔다.
그와 동시에 때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던 엘리사와 마주쳤다.
그러자 엄마를 알아본 하네스가 엘리사를 향해 통통한 손을 바동거렸다.
“음마!”
“하네스,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엘리사, 하네스 이가 났어.”
리하르트는 엘리사에게 성큼 다가서며 소식을 전했다.
엘리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보자, 하네스, 엄마한테도 보여 줘.”
그리고 하네스의 귀여운 혀와 끈질긴 사투 끝에, 빼꼼 자란 귀여운 아랫니를 확인했다.
그것을 본 엘리사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어머나, 우리 아가 이가 났네! 아구, 귀여워라. 내 새끼.”
“으꺄!”
엘리사는 하네스를 안고 통통한 뺨에 연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은 하네스는 침 흘리는 열렬한 옹알이로 기쁨을 표했다.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그런 하네스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은 아이를 안고 하네스의 방으로 향했다.
하네스의 옹알이에 열심히 반응하며 대화하던 엘리사는 문득 생각난 듯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요즘 슬슬 날이 풀리는 것 같던데, 이번 일 끝나면 리온이랑 하네 스 데리고 소풍 갈까?”
“그러자. 둘 다 제대로 된 소풍은 처음일 테니.”
리하르트는 검지로 하네스의 뺨을 쓰다듬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려면 이번 일부터 빠르게 처리해야겠네.”
레이모어 쪽에선 어떻게든 증인과 증거를 조작해서 리하르트에게 혐의를 씌우려 할 것이다.
그에 반박하기보다는, 레이모어의 죄를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찾는 쪽이 빨랐다.
리하르트가 고민하고 있던 그때, 엘리사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계획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