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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54화 (154/164)

154화

*

다음 날, 크리스티안은 루벨린 공작가로 서신을 보냈다.

일주일 후 황실에서 주관하는 재판이 열릴 것이니, 필히 참석할 것을 명하는 황태자의 칙서였다.

레이모어는 그와 동시에 증거와 증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렌시아의 제국민, 특히 귀족이라면 루벨린과 황실의 갈등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의 대립 관계를 아는 이들이라면 어설픈 증거 하나, 위증인 하나에도 리하르트가 벌인 일이라며 크게 동요할 것이다.

진실과는 무관하게,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 그러하기에.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 가고 있다.’

레이모어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듯, 며칠 후 리하르트가 먼저 펠리스 후작저를 방문했다.

레이모어의 요청 없이 그가 먼저 레이모어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공사다망한 와중에 이리 먼저 찾아 주시다니, 기쁘군요.”

레이모어는 접견실로 들어서는 리하르트를 한 번도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넸다.

시선은 테이블 위, 체스판에 고정한 채로, 체스판은 주력의 말 몇 개만 남은, 고전이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아. 누구 덕분에 갑자기 아주 바빠졌지.”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리하르트는 그의 대각선에 앉으며 이죽거리듯 답했다.

그제야 체스판에 향해 있던 레이모어의 시선이 리하르트에게로 향했다.

리하르트는 목을 축일 틈도 없이 곧장 본론부터 던졌다.

“그대가 죽였나? 황제 폐하.”

“예.”

숨길 생각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왜 죽였지? 그래도 그대가 반평생을 바쳐 따른 주군이지 않나.”

“그 말은 이제 쓸모를 다 했으니까요.”

레이모어는 말 하나를 집어 들어 체스판 밖에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블랙 퀸.

리하르트는 그가 내려놓은 블랙 퀸을 바라보다 물었다.

“쓸모라……. 이대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말이 아닌가?”

“말을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면 게임에서 지게 되지요. 체스를 시작하는 초보들이 흔히 말려드는 수법입니다.”

“……..”

“큰 말을 지키려다, 게임에 말려지게 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지요.

진짜 목표는……….”

레이모어는 체스판 위의 검은 체스말들을 전부 체스판 밖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블랙 킹만이 남겨졌을 때, 블랙 킹이 화이트 킹을 찍어 넘어트렸다.

“목표는 최대한 많은 말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말을 버려야 할 최적의 타이밍을 알아채고,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지요.”

리하르트는 그렇게 말하는 레이모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껏 그가 보여 준 행보와 정확히 일치하는 말들이었다.

레이모어는 체스판 위에 블랙 킹홀로 내려놓는 것으로 게임을 마무리했다.

리하르트는 그에게 물었다.

“네놈의 계획엔 내가 필요한 게 아니었나? 내게 반역죄를 뒤집어씌우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텐데. 무슨 꿍꿍이지?”

대강 짐작 가는 바가 있었으나, 리하르트는 짐짓 모르는 척 레이모어의 의중을 떠보았다.

하지만 레이모어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이고는 대답을 모호하게 회피했다.

“글쎄요.”

“네놈이 바라는 게, 전쟁인가?”

이번엔 에두른 질문이 아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리하르트의 예리한 물음에 찻잔을 기울이던 레이모어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칫했으나, 이내 태연하게 수긍했다.

“아주 많은 피와, 절망적인 죽음들과, 끝없는 혼돈을 원합니다.”

어차피 리하르트가 알게 된다 한들,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

피와 죽음, 혼돈을 언급하는 레이 모어의 눈에 지독한 갈망과 염원으로 점철된 광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듣자 하니, 각하의 기사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이래저래 움직이고 있는 것 같더군요. 오늘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것도 떠보기 위함인 듯하고.”

의도를 정확히 간파당한 리하르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레이모어는 그 찰나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못을 박았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도 바뀌는 건 없을 겁니다. 전부 헛수고니, 이만 포기하시지요.”

“…….”

“저는 이 게임에서 반드시 승리할 테니까요.”

자신이 질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오만한 목소리였다.

리하르트는 한기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가 승리할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

그 시각, 엘리사는 약속 장소에 나가기 전에 단장을 하고 있었다.

엘리사의 머리를 만지는 하녀들의 손길이 분주했다.

엘리사는 초조한 표정으로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며 괜스레 손을 만지작거렸다.

시선은 거울 속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으나, 정신은 온통 펠리스 후작저로 간 리하르트에게로 쏠려 있었다.

리하르트 쪽은 잘 해결됐을까? 잘 해결됐어야 할 텐데…….

초조해하던 그때, 앤이 마지막 머리핀을 고정했다.

“다 됐어요, 마님.”

엘리사는 앤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리하르트가 레이모어와 만나 그의 의중을 떠보는 동안, 엘리사는 이번 재판의 중요한 증인이 될 수도 있을 사람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더 막막하게 느껴졌던 리하르트의 힘에 관한 문제도 해결되었다.

그것을 떠올리면, 지금 직면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엘리사는 거울 속 제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돼.’

그런 그녀의 눈빛이 언제 불안했냐는 듯, 결의에 어려 있었다.

엘리사는 곧장 방을 나섰다.

*

그로부터 며칠 후, 재판 당일이 밝았다.

리하르트는 드레스 룸에서 옷을 입고 있었다.

느긋하게 커프스단추를 채우는 그의 표정은 황족 시해 혐의를 받은 자의 표정이라기엔 지극히 무심했다.

리하르트는 크라바트를 매고 단정히 매만진 후, 프록코트를 걸쳤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제 입었던 겉옷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입고 있는 겉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깨닫고 중얼거렸다.

“아………. 이제 필요 없지.”

엘리사가 그의 영혼의 일부를 분리한 이후, 더 이상 혼돈의 힘을 사용 할 수 없었다.

그의 힘이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그전까지 아카로아 외곽에 출몰하던 몬스터들도 그날 이후 더 이상 출몰하지 않았다.

이제 ‘최후의 보루’는 필요 없었다.

리하르트가 다시 그것을 꺼내려던 그때였다.

“리하르트?”

드레스 룸 밖에서 그를 찾는 엘리 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는 꺼내려던 것을 재빠르게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쓸모없어진 물건이지만, 그래도 엘리사가 봐서 좋을 것이 없었다.

‘오늘까지는 그냥 지니고 다녀야겠군.’

리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드레스 룸을 나왔다.

드레스 룸 앞엔 단장을 마친 엘리 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갈까?”

리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 사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이.

*

오전 10시 50분.

선황제 로암 카이로트를 독살한 반역자에 대한 재판을 10분 앞둔 시간.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황궁에 방문한 귀족들로 황궁이 시끌벅적했다.

아카로아의 모든 귀족들은 황제의 신하로서, 그리고 본 재판의 수많은 재판장 중 한 명으로서 자리에 참석할 의무가 있었다.

재판은 황궁의 그레이트 홀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막 도착한 귀족들은 저마다 짝을 지어 그레이트 홀로 들어섰다.

홀은 먼저 도착한 귀족들로 붐비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은지라 공석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대부분은 도착한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피고인의 자리와 재판을 주관한 크리스티안의 자리가 아직 비어 있었다.

귀족들이 의아해하던 그때, 그레이트 홀의 옆문이 열리고 크리스티안이 들어섰다.

귀족들은 평소와 달리 사뭇 굳은 표정을 한 크리스티안을 보며 수군거렸다.

“황태자 전하의 옥안이 며칠 새 많이 수척해지신 것 같군그래.”

“그럴 만도 하지. 하루아침에 부황을 잃고, 모후마저 그 충격으로 쓰러지셨으니……….”

“그나저나 루벨린 공작 각하는 이대로 불참하는 건가?”

재판이 시작되기 5분 전.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자리는 아직 공석이었다.

재판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두 사람의 불참 여부에 관심을 가졌다.

재판에서 피고인의 불참은 재판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고가 자신의 혐의에 대해서 어떤 주장을 하고 어떤 증거를 제기하든, 이의를 표하지 않겠다는 의미니까.

그 때문에 사람들은 피고의 불참을 ‘본인의 혐의를 인정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곧 피고에게 유죄 판정을 내리는 지름길이 되었다.

재판 시작까지 2분이 남은 상황.

‘도망을 갔을 리는 없는데……. 재판에 참석하지 않고 뭔가 다른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두 사람의 불참에 의심을 품은 크리스티안이 옆에 있던 기사단장을 불러 명을 내렸다.

“루벨린 공작 내외가 무슨 일을 꾸미는지 공작저로 가서 알아봐라.”

“예, 전하.”

기사단장은 크리스티안의 명을 받고 곧장 그레이트 홀을 나갔다.

‘이제 1분.’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끝내 참석하지 않으면, 이번 재판은 리하르트의 유죄로 돌아가게 될 터.

크리스티안은 아버지를 죽인 장본인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재판을 준비하기 위해 오른손을 들어 좌중을 정숙시켰다.

고요한 가운데, 크리스티안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렌시아 제국력 2495년 4월 13일. 선황제 로암 카이로트를 독살한 혐의를 받고 있는 리하르트 루벨린에 대한 재판을 -”

그때였다.

크리스티안이 재판의 시작을 알리기 직전에, 굳게 닫혀 있던 그레이트 홀의 문이 열리고 리하르트와 엘리사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본 재판의 피고인, 참석합니다.”

리하르트와 엘리사의 시선이 크리스티안, 레이모어의 시선과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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