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두 사람의 등장에, 수군거리던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리하르트와 엘리사는 그 시선들을 가로질러 그레이트 홀 중앙에 섰다.
죄가 있다고 의심받아 참석한 자리 임에도, 두 사람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담담했다.
그 모습이 크리스티안의 심기를 거슬렀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들을 바라보던 크리스티안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재판을 시작하겠다.”
재판봉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레이트 홀에 울림과 동시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크리스티안은 원고의 자리에 선 레이모어를 쳐다보았다.
“본 원고는 선황제를 독살한 범인으로 리하르트 루벨린을 지목했다.
맞나?”
“그렇습니다.”
“그 의심에 합당한 증거 및 증인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그 첫 번째 증인으로 황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 시안 경을 소환합니다.”
레이모어의 말이 끝나자, 기다리고 있던 부기사단장이 앞으로 나섰다.
레이모어는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안 경. 경은 몇 주 전부터 피고의 움직임이 의심스럽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해 주겠나?”
부기사단장은 리하르트 쪽을 슬쩍 바라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서거하시기 몇 주전, 루벨린 공작은 루벨린의 기사들을 제도로 불러 모았습니다. 제도 외곽에 주둔한 그 모양새가 여간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병력을 물리라했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
“아카로아는 엄연히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수호하시는 도시입니다. 그런 곳에서 사사로이 사병을 움직이다.
니……. 다른 의도가 있다고밖에 보이지 않는 행보입니다.”
루벨린 기사들의 주둔 사실을 몰랐던 귀족들은 부기사단장의 증언에 대해 수군거렸지만, 크리스티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였다.
“다음 증인.”
다음 증인은 황제의 주치의였다.
“황제 폐하의 시신을 확인한 결과, 기체형 독에 장시간 노출된 것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
“그에 쓰인 독은 동대륙에서 넘어온 기체형 독으로, 무형무색, 무취의 매우 위험한 독입니다.”
“…….”
“조사 결과, 황제 폐하의 침실에 있는 향초에서 해당 독이 검출되었더군요.”
주치의의 말이 설명이 끝나자, 레이모어가 설명을 덧붙였다.
“해당 독의 반입 경로를 추적해 보니, 한 달 전 루벨린 공작가에서 대량의 동대륙 물품과 함께 매입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여기, 상단에서 루벨린 공작가에 물품을 판매한 내 역입니다.”
시종은 레이모어가 건네는 내역서를 받아 크리스티안에게 전해 주었다.
그것을 확인한 크리스티안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귀족들 역시 크리스티안의 반응과 내역서를 보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루벨린 공작이 정말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인가?”
그들의 반응을 들으며, 레이모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내 예상대로군.
이미 그들의 기저에 깔려 있는 루벨린과 황가의 관계에 대한 인식 때문에, 몇몇 증거만으로도 리하르트를 범인이라 믿기 시작했다.
몇몇이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혼란스러워하던 귀족들도 그 생각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들의 의심에 못을 박을 때였다.
“마지막 증인으로, 황제궁의 하녀를 소환하겠습니다.”
레이모어의 말이 끝나자,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한 황궁의 하녀가 우물쭈물 앞으로 나섰다.
레이모어는 그녀에게 물었다.
“본 증인이 보고 들은 것을 소상히 고하라.”
“일이 있기 며칠 전, 폐하의 침실 정리를 맡은 하녀 제인이 황궁 밖에서 한 남자를 만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저는 친구 제인이 물건을 두고 간 것을 발견하고 전해 주러뒤따라갔다가 그 장면을 목격했고요.”
“그 남자가 누구였지?”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져서 보지는 못했지만, 남자는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기사 제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어느 가문의 문양이었나?”
하녀는 쭈뼛거리며 리하르트 쪽을 슬쩍 돌아보고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도 대답했다.
“루벨린 공작가의 문양이었습니다.”
“남자가 무얼 지시했지?”
“그것은 듣지 못했지만, 남자가 제 인에게 향초를 건네는 것은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제인이 폐하의 침소에 향초를 두었어요. 저는 그것이 단순히 향초라고 생각했지요.”
황제는 평소에도 여러 향초를 켜그 향을 즐기곤 했으니 다른 하녀들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으리라.
“그럼 그 제인이란 하녀는 어디 있지?”
“그날 이후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하녀의 증언까지 들은 귀족들은 다시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를 황제를 독살한 범인으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레이모어는 그 기세를 몰아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든 증언과 증거, 그리고 동기로 짐작해 볼 때 피고가 황제폐하를 독살하여 이 제국에 혼란을 일으킨 다음, 반역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
“이에 따라 피고의 유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레이모어가 리하르트의 유죄를 주장하고 돌아서던 그때, 잠자코 재판을 관망하고 있던 리하르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후작이 준비한 증언과 증거는 이게 전부인가?”
리하르트는 냉소적인, 그러나 저음의 차분한 어조로 레이모어가 준비한 증거와 증언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했다.
“부기사단장의 말은 그저 상황을 바탕으로 한 추측일 뿐이고, 물품거래 내역은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지.”
“또한 하녀의 증언은 협박을 해서 거짓 증언을 얻든, 아니면 애초에 그녀를 속일 생각으로 루벨린의 문양을 가져다 썼든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것이다.”
“…….”
“하나같이 허술하고 조잡하기 짝이 없군.”
리하르트의 맹렬한 비판에, 레이모어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졌다.
하지만 리하르트의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하긴, 치밀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미 아렌시아의 모든 제국민이 루벨린과 황실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증거가 허술하여 증거 불충분으로 진범을 가려내지 못한 채 끝나더라도, 모두가 루벨린을 계속 의심할 테니까.
“그럼 다른 가능성을 비춰 보면 어떨까.”
리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레이모어를 바라보며 물었다.
레이모어는 불안함에 굳어진 표정으로 리하르트를 주시했다.
리하르트는 크리스티안을 향해 말했다.
“피고는 원고 레이모어 펠리스의 혐의를 주장합니다.”
크리스티안은 그런 리하르트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의심에 합당한 사유가 있나?”
“일전에, 폐하께서 제 아내 엘리사세리어트의 작위 승계를 인정하신 바 있습니다.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지요.”
그에 크리스티안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가며 반응했다.
그토록 루벨린과 세리어트를 경계하던 부황이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엘리사의 작위 계승을 인정했는지 궁금했던 것이었다.
리하르트는 말을 이었다.
“폐하께선 제 아내의 모친, 선대 세리어트 후작 부인께서 폐하의 형님이신 선황제 폐하의 독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아내의 작위승계를 불허하셨습니다.”
“그랬지.”
“저와 아내는 선대 후작 부인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20년 전 사건을 뒤지기 시작했고, 원고의 별장에서 당시 황궁의 하녀였던 해당 사건의 증인을 찾아냈습니다. 그녀는 대단한 ‘진실’을 품고 있었죠.”
“……진실?”
‘진실’이란 단어는 크리스티안은 물론, 귀족들의 호기심까지 자극했다.
모두가 그 진실을 궁금해했다.
그 진실을 알고 있는 레이모어만 제외한 채.
“황제 폐하의 형님이신 선황제 폐하의 독살 사건은, 선대 2황자 전하가 아닌 황제 폐하께서 사주했다는 진실을.”
그 이야기를 들은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럼, 그 소문이 진실이었단 말인가?”
로암이 막 황위에 올랐을 때, 일각에선 로암이 선황제를 독살하고 둘째 형에게 그 죄를 뒤집어씌웠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졌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그 소문의 진실을 파헤치려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소문으로 묻혔었다.
그 소문이 마침내 진실이었단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부황이 저지른 업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크리스티안은 당황스러움에 앞서 부정하고 분개했다.
“루벨린 공작.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고인을 능멸하는가?”
“고인을 능멸하고자 함이 아닌, 진실을 밝히고자 함입니다. 그 증인을 본 법정에 소환합니다.”
리하르트는 20년 전, 선황제 독살사건의 증인을 소환했다.
그레이트 홀의 옆문, 증인이 드나 드는 문이 열리고 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재판을 지켜보던 시종장은 증인석에 올라서는 레나를 보고는 흠칫했다.
황궁의 시종으로 살아온 반평생의 기억 중, 어렴풋이 기억나는 얼굴이었다.
시종장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크리스티안에게 증명했다.
“저 얼굴, 당시 선황제 폐하의 궁에서 일하던 하녀가 맞습니다.”
리하르트는 말을 하지 못하는 레나를 위해 설명을 덧붙였다.
“증인은 20년 전, 선황제 폐하의 독살 사건에 연루된 친구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당시 선황제 폐하의 측근이던 원고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원고는 변심했고, 증인의 혀를 자른 후 20년간 감금했죠.”
“…….”
“혹여, 자신의 주군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를 대비한 히든카드로 남겨 두기 위해서.”
크리스티안은 그제야 이해했다.
부황이 왜 갑자기 레이모어를 멀리 했는지.
리하르트가 왜 레이모어의 혐의를 주장했는지.
크리스티안은 차마 진실을 부정하지 못한 채 물었다.
“……증인은 피고의 말이 전부 사실임을 인정하는가?”
레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리하르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펠리스 후작이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었음을 알게 된 황제 폐하께선이 일로 펠리스 후작에 대한 신뢰를 잃었고, 그 결과 아스트리드 후작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스트리드 후작?”
“예?”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아스트리드후작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폐하께선 본인의 치부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펠리스 후작을 잘라 낼 준비를 하셨죠.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가 죽듯이.”
리하르트는 조금 전과 달리 잔뜩 굳어진 표정을 하고 있는 레이모어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고는 입지가 불안해지자, 이런 극단적인 계획을 세운 겁니다.”
“그 또한 그저 혐의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레이모어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리하르트의 주장을 받아쳤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그마저 예상한 듯했다.
“독살 사건은 본디 그 죄를 입증하기가 어렵지. 살해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사람 없이, 손에 손을 타고 전해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 누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 알 수가 없게 되니까.”
“독살 사건의 범인을 밝힐 가장 확실한 증거는 자백입니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황좌에 앉은 크리스티안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자백, 받아 왔습니다.”
레이모어는 미심쩍은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리하르트의 앞에서 황제를 죽였음을 시인하긴 했으나, 이 자리에서도 그것을 자백할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자백을 받았다니.
하지만 리하르트의 눈빛은 확신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