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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56화 (156/164)

156화

“자백을 받았다고? 그럼 정말 펠리 스 후작이 범인이란 건가?”

리하르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자백’이란 말에 동요하며 자신에 대한 의심을 품기 시작하자, 레이모어도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크리스티안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리하르트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황과 레이모어의 이야기를 알게 되며 레이모어에 대한 불신이 생겼으나, 그렇다고 해서 리하르트에 대한 오랜 악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티안은 레이모어에게 물었다.

“펠리스 후작, 공작이 후작의 자백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대가 정말로 반역을 저질렀나?”

“궁지에 몰린 죄인이 무슨 말인들 못 하겠습니까?”

레이모어는 리하르트의 말을 헛소리라 일갈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크리스티안은 다시 리하르트를 쳐다보았다.

“후작은 아니라고 하는군. 그 자백’이라는 걸 입증할 증거라도 가지고 온 건가, 루벨린 공작?”

“어찌 확실한 증거도 없이 죄 없는 이를 모함하겠습니까.”

그 말은 실질적인 증거 없이 리하르트를 모함했던 레이모어와 크리스티안을 꼬집는 말이기도 했다.

리하르트는 설핏 일그러진 레이모어와 크리스티안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크리스티안은 그것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르골?”

리하르트가 안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오르골이었다.

레이모어도, 재판을 지켜보던 귀족들도 오르골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리하르트는 오르골의 태엽을 감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단순한 오르골이 아니라, 진리의 탑의 학자들이 오랜 시간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만들어 낸 마도구입니다.”

“…….”

“이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면, 태엽이 풀리는 동안 들은 소리를 기억합니다.”

리하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태엽이 완전히 풀어지며 우뚝 멈췄다.

“그리고 오르골을 열 때마다 그 소리를 들려주죠.”

리하르트는 오르골의 뚜껑을 닫았다가 열었다. 그러자 오르골에서 리하르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건 단순한 오르골이 아니라, 진리의 탑의 학자들이 오랜 시간 연구하고 실험한 끝에 만들어 낸 마도구입니다. 이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면, 태엽이 풀리는 동안 들은 소리를 기억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접목한 아이템을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란 건 크리스티안과 레이모어도 마찬가지였다.

리하르트는 안주머니에서 또 다른 오르골을 꺼냈다.

조금 전 사용했던 오르골은 며칠전 진리의 탑에서 동대륙의 서적을 해석한 내용과 함께 온 새로운 오르골이었고, 이번에 꺼낸 오르골은 진리의 탑에서 브랜든이 처음으로 주었던 것이었다.

리하르트는 오르골의 뚜껑을 열었다.

[“그대가 죽였나? 황제 폐하.”

“예.”

“왜 죽였지? 그래도 그대가 반평생을 바쳐 따른 주군이지 않나.”

“그 말은 이제 쓸모를 다 했으니까요.”

“쓸모라………. 이대로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말이 아닌가?”

“말을 버려야 할 때 버리지 못하면 게임에서 지게 되지요. 체스를 시작하는 초보들이 흔히 말려드는 수법입니다.]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레이모어의 눈빛이 거세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레이모어는 그제야 눈치챘다.

‘진짜 목적은 내 자백을 받아 내는 거였어…….’ 리하르트가 루벨린의 기사들을 풀어 증거를 찾게 한 것도, 직접 자신을 찾아와 떠보았던 것도 진짜 목적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별다른 의심하지 못하도록, 방심하도록 연기한 것일 뿐.

“그럼 펠리스 후작이 정말로…….”

“어떻게 그럴 수가…….”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귀족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0년 전 선황제 독살 사건의 이야기를 듣고도 여전히 레이모어보다는 리하르트를 의심하던 크리스티안 역시 동요한 눈빛으로 레이모어를 보고 있었다.

상황이 레이모어가 생각한 것과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레이모어는 평소 그답지 않게 격노하며 소리쳤다.

“저것은 조작입니다!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요사스러운 물건으로 전하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리하르트는 무심한 눈으로 그런 레이모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죄인은 자백을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증인을 본 법정에 소환하겠습니다.”

리하르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레이트 홀의 옆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홀 안으로 들어섰다.

증인의 얼굴을 본 귀족들과 크리스티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면, 그 얼굴을 본 레이모어의 표정은 굳어졌다.

“로제, 네가 어떻게……!”

로제는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며 평소와 달리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하지만 레이모어를 바라보는 눈빛엔 아비의 죄를 고발하는 자의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자신을 사지로 민아비에 대한 경멸이 어려 있었다.

귀족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에, 황태자비 전하가 증인으로 나서다니.”

일반적으로 가족이라면 가족의 혐의를 감싸거나 덮으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로제까지 증인으로 나섰다는 건, 그만큼 레이모어의 죄가 명백하다는 방증이었다.

여론은 로제의 증언을 듣기 전부터 레이모어의 죄를 확신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 가운데, 로제는 천천히 증인 석으로 가서 섰다.

로제는 증인으로서 입을 열기 전, 엘리사가 제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 재판이 끝난 후 네가 어떻게 될지는, 온전히 네 선택에 달렸어.’

그녀를 이 자리에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엘리사였다.

*

황제가 죽고, 황후가 충격으로 쓰러진 후 로제는 황태자비로서 다시 황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시 돌아오길 고대하던 제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로제의 마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듯 초조했다.

‘아버지가…… 황제 폐하를…….’

얼마 전, 모친의 기일 때 후작저에서 엿들었던 레이모어의 이야기와 지금의 정황을 생각해 보면 범인은 그였다.

불안해진 로제는 시녀에게 레이모어에 대한 소식을 알아 와 보고하도록 시켰다.

그렇게 시녀가 전해 온 소식은 로제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후작님께서 루벨린 공작 각하가 황제 폐하를 독살했다는 증거로 공작저에서 키우고 있는 아이를 언급하셨다고 해요.”

“뭐……?”

“그래서 그 아이와 황태자 전하 사이에 친자 검사까지 했는데, 아니었다고 하더군요.”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로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온의 정체가 탄로 났다면, 엘리 사는 로제가 리온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밝혔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제 역시 위험에 처했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레이모어가 몰랐을 리 없다.

즉, 그는 제 딸인 로제를 사지로 몰아넣으려 한 것이다.

‘아버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거지?’

로제가 종잡을 수 없는 레이모어의 행동에 불안해하고 있던 그때, 서신이 왔다.

엘리사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친우로서 보내는 편지야.

네 아버지와 함께 반역자로 묶여 처형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약속장소로 와.]

‘처형’이란 단어가 로제의 두려움을 자극했다.

로제는 엘리사의 말대로 약속 장소에 나갔다.

일전에 로제가 리온을 데려가려 했을 때, 엘리사를 불러 냈던 그 카페였다.

엘리사는 약속 장소에 나타난 로제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로제가 레이모어가 벌인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이 자리에 나왔을 리 없다.

이미 사람들은 황실과 오랜 적대 관계였던 루벨린의 수장, 리하르트를 독살범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로제의 입장에선 엘리사의 서신이 가소로워 보였어야 한다.

‘하지만 로제가 이 자리에 나왔다는 건, 레이모어가 벌인 일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는 뜻이지.’

엘리사는 본론부터 꺼냈다.

“네 아버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미안하지만, 난 아버지를 배신할 마음 없어. 네가 또 무슨 헛소리를 할까 궁금해서 들어 보러 온 것뿐이지.”

로제는 레이모어를 배신할 마음이 없다며 잡아뗐으나, 엘리사는 알아했다.

로제가 이 자리에 온 것부터가 그녀의 마음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임을.

“아니지. 넌 불안해서 이 자리에 온 거잖아.”

“…….”

“딸의 안위를 무시하고, 황손의 안위를 폭로한 아버지가 너를 버릴까 불안해서.”

정곡을 찌르는 엘리사의 말에, 로 로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엘리사는 그 기세를 몰아 말을 이었다.

“나는 후작이 저지른 만행의 증거를 잡았고, 너에게 기회를 주려고 부른 거야. 다가오는 재판에서 네가 아는 대로 증언해.”

“지금 나더러… 아버지를 배신하라는 거야?”

“아버지가 먼저 딸을 버리는 패로 내던졌는데, 딸이라고 아비를 그리하지 말란 법은 없지.”

부정할 수 없는 말에, 로제는 입술을 짓씹었다.

“후작이 원하는 건 전쟁, 그리고 수많은 죽음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불사하지 않을 사람이지.”

물론 그 ‘어떤 것’에는 로제의 안위도 포함이라는 것을, 로제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면, 너도 같이 묶일 거야.”

가뜩이나 황실 내에서 입지가 불안한 로제이니,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네가 아비의 만행에 대해 증언하면, 아비를 버리고 황가에 충성한 네게 자비를 베풀겠지.”

엘리사는 불안에 떨리는 눈으로 저를 쳐다보는 로제를 향해 말했다.

“이 재판이 끝난 후 네가 어떻게 될지는, 온전히 네 선택에 달렸어.”

*

로제는 두려움과 분노, 슬픔 등 여러 감정이 혼재된 눈으로 레이모어를 바라보다, 크리스티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머뭇거리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 저는 어머니의 기일을 챙기기 위해 본가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어요.”

그레이트 홀의 모두가 로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가운데, 로제는 말을 이어 갔다.

“기체형 독에 관한 이야기였죠. 동대륙에서 건너온 것이며, 어느 정도가 치사량인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지?”

로제의 증언을 듣던 크리스티안이 물었다.

원망과 비통함이 공존하는 목소리였다.

“그 독을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어떻게든 아버지를 말렸을 거예요.”

로제의 증언까지 끝나자, 여론은 레이모어의 유죄를 믿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리하르트는 지금까지의 증거와 증언을 정리하여 말했다.

“이러한 증거와 증언을 들어, 레이 모어 펠리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바입니다.”

크리스티안 역시 더는 레이모어의 죄를 부정할 수 없었다.

믿었던 이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힌 크리스티안이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레이모어 펠리스, 죄인은 본인의 죄를 인정하는가?”

대답이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레이모어는 대답 대신 크리스티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이 죽인 남자의 아들을 보고 있는 눈엔 일말의 죄책감이나 두려움, 미안함조차 없었다.

그 눈이 크리스티안을 더욱 분노케했다.

늘 감정이 앞서 섣부른 행동을 하던 크리스티안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분노 앞에선 어찌할 줄 몰라 거친 숨만 내쉬었다.

크리스티안은 마침내 형을 선고했다.

“…반역자 레이모어 펠리스를 극형에 처하겠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 쪽을 바라보았다.

그가 혹시나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으나,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레이모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만, 저를 바라보는 리하르트를 물끄러미 볼 뿐.

“죄인을 압송하겠다.”

기사들이 레이모어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하르트가 돌아서려는 그 순간, 레이모어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스쳤다.

조금 전, 초조해하던 모습을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뭐지……?’

그에 섬뜩한 예감을 느낀 리하르트가 다시 레이모어를 보았으나, 레이 모어는 이미 기사들에게 붙들려 홀을 나간 뒤였다.

*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마차를 타고 공작저로 향했다.

홀가분한 표정을 한 엘리사와 달리, 리하르트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표정은 뭐였지.’

좀처럼 불길한 예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 왜 그래?”

“아…. 미안. 아무것도 아냐.”

기분 탓이겠지.

레이모어는 가문의 힘을 가진 자도 아니니, 황궁의 감옥에 갇히면 빠져나오기도 힘들 터였다.

리하르트는 불길한 예감을 떨치려 엘리사의 손을 붙잡았다.

그때였다.

콰앙-!

귀가 먹을 듯한 엄청난 굉음과 동시에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읏!”

“엘리사!”

리하르트는 그 반동으로 비틀거리는 엘리사를 본능적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고 창문을 가리고 있던 커튼을 걷었다.

창밖의 광경을 바라보는 엘리사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게 무슨…….”

조금 전 두 사람이 나온 황궁이 굉음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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