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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57화 (157/164)

157화

무너지는 황궁을 바라보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설마, 펠리스 후작이 벌인 짓인가….’

마지막 미소의 의미가 이런 거였나.

리하르트는 이를 으득 갈며 마차에서 내렸다.

엘리사는 그런 그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리하르트?”

“엘리사, 넌 곧장 저택으로 돌아가.

난 황궁에 가 볼게.”

“나도 같이 가.”

엘리사는 황궁으로 날아가려는 리하르트의 팔을 다급히 붙잡았다.

걱정 어린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리사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그 눈을 바라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내가 파이란 왕궁에 혼자 쳐들어간 건, 내 힘이 아군까지 다치게 할까 봐 걱정이 돼서였어. 네가 같이 가면 내 힘을 제어하느라 제대로 공격하기 힘들 테지.

“하지만….”

“살아서 네 곁으로 돌아오겠다는 생각만으로 그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왔어.”

“이번에도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

금방 다녀올게.”

그리고 그녀의 작은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맞대었다. 약속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엘리사는 여전히 걱정 어린 표정을 하고서도 그를 차마 말리진 못했다.

“톰슨, 공작저로 돌아가서 기사들을 끌고 황궁으로 와라.”

“네, 각하.”

리하르트는 호위차 동행한 톰슨과 기사들에게 명령한 후, 날아올라 황궁 쪽으로 향했다.

“마님, 이만 마차에 오르시죠.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공작저까지 빠르게 모시겠습니다.”

멀어지는 리하르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엘리사는 톰슨의 종용에 못 이겨 돌아섰다.

그리고 마차에 오르려던 그때였다.

“저게…… 뭐지?”

엘리사를 에스코트하고 돌아서던 톰슨이 무심코 황궁 쪽을 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사는 그에 의아해하며 황궁 쪽을 바라보았다.

그와 동시에 엘리사의 눈도 놀라 커졌다.

‘저건…….’

황궁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넘실 거리고 있었다.

엘리사는 저것과 같은 기운을 본적이 있었다.

아니,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리하르트가 가지고 있던 검은 힘이야….’

하지만 시간상 리하르트는 아직 황궁에 도착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 위험한 힘을 사용하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은, 신성력을 가진 자신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톰슨과 기사들에게 다급히 지시했다.

“어서, 황궁으로 가요.”

*

폭발이 있기 직전의 황궁.

재판이 끝난 직후 레이모어는 황궁의 지하 감옥으로 압송되었다.

그 자리엔 크리스티안도 함께했다.

레이모어를 압송한 기사들과 크리스티안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거기서 크리스티안의 발걸음이 멈췄다.

감옥까지 내려가진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에 기사들이 레이모어를 데리고 감옥을 내려가려던 그때였다.

“왜 그랬지?”

이곳에 오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던 크리스티안의 첫 마디였다.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가 풀어 줄수 있었는데.”

레이모어를 바라보는 크리스티안의 눈빛에 원망과 증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레이모어는 그런 크리스티안의 감정을 읽고는,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께서는 감히 이해하실 수 없는, 그런 큰 이상을 품었답니다.”

“이상, 이라고….…?”

콰앙!

크리스티안이 되물음과 동시에 가까운 곳에서 폭파음이 들려왔다.

기사들과 크리스티안은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 레이모어를 바라보았다.

레이모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상을 이룰 때가 왔군요.”

그의 손엔 음산한 검은 빛으로 빛나는 영혼의 반쪽이 들려 있었다.

*

점심 먹기 전, 리하르트와 엘리사를 기다리던 리온은 좋아하는 동화책을 품에 안은 채로 잠들었다.

‘내일 황궁에 갔다 오면 마저 읽어줄게.’

리하르트가 황궁에서 돌아오면 동화책을 읽어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읽을 장면은 주인공 파르가 친구들과 함께 악당을 물리치는 내용이었다.

리온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꿈속에서 주인공 ‘파르’가 되어 악당을 물리치는 단잠에 빠져 있던 그 때였다.

쾅!

멀리서 들려온 굉음에, 단잠에 빠져있던 리온이 눈을 떴다.

그 소리를 들은 하네스도 잠에서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흐에에엥!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잠든 리온의 곁을 지키고 있던 앤이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옆에 있던 하녀에게 물었다.

그 소란을 듣고 마침 창밖을 살피던 하녀가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 황궁이……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뭐?”

하녀의 이야기를 들은 앤과 하녀들이 창문가로 다가갔다.

정말로 황궁이 부서지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앤과 하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떡해! 아직, 각하와 마님이 황궁에서 돌아오지 않으셨는데……….”

“기사님들이 뭔가 대책을 세우시겠지?”

“내가 가서 물어보고 올게.”

발을 동동 구르던 하녀 하나가 상황을 살피러 방을 나갔다.

뒤이어 폭발음이 이어졌다.

거리가 제법 되는데도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거대한 굉음은 소리를 듣고 있는 모두의 마음에 불안을 지폈다.

그 불안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 가장 약하고 어린 하네스였다.

“으에에엥!”

“아유, 도련님. 자다 깨서 많이 놀라셨죠?”

유모는 놀라 울음을 터트리는 하네 스를 얼렀다.

리온은 불안한 눈으로 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나랑 아조씨는?”

“마님이랑 각하는 괜찮으실 거예요. 워낙 강하신 분들이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리온은 저를 안심시키려 안아 주는 앤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눈치챘으나, 모른 척 얌전히 있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상황을 알아보러 갔던 하녀가 돌아왔다.

“기사님들은 바로 황궁으로 가신 대. 곧 출발하려나 봐.”

그 소식을 들은 하녀들은 한시름덜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하녀의 말대로 루벨린의 기사들이 대거 황궁으로 향했다.

하녀들은 엘리사와 리하르트의 무사 귀환을 빌며 기다렸다.

잠시 후 폭발음이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안심이 된 앤이 리온에게 물었다.

“도련님, 배가 고프진 않으세요?

마님이랑 각하는 조금 늦으실 것 같은데 간단하게 먹을 빵이라도 가져올까요?”

리온은 도리질했다.

“아니야. 누나 오면 먹을 고예여.”

배가 고프지 않기도 했고, 엘리사와 함께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내내 창밖의 상황을 살피던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대체 뭐지?”

“왜? 뭐가 있어?”

다른 하녀가 의아해하며 다가서자, 창밖을 보고 있던 하녀가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많은 새가 날아오고 있었다.

“저기. 새 떼는 아닌 것 같은데…….”

하녀들이 그것을 유심히 살피는 동안, ‘새 떼’로 보이는 그것들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습이 선명히 보였다.

‘새 떼’의 정체를 깨달은 하녀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세상에, 저건 몬스터잖아?”

저택에 남아 있던 루벨린의 기사들도 마을로 다가오는 몬스터들의 존재를 알아챈 것인지, 저택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곧이어 멀리 광장에서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몬스터의 울음소리 등이 뒤섞여 들려왔다.

그 소리는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하녀들은 패닉 상태가 되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아가일이 들어왔다.

“비행 몬스터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어 상층은 위험합니다. 도련님들을 모시고 지하 와인 저장고로 내려가죠.”

하녀들은 아가일의 지시에 따라 하네스와 리온을 데리고 지하실로 향했다.

지시를 내린 아가일은 검을 꺼내 들고 공작저 정문으로 향했다.

톰슨이 어느 날 ‘남자가 멋있어 보이려면 검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지.‘라며 준 검이었다.

평생 학문에 몰두하며 살아온 아가 일은 검술에 그다지 재능이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루벨린의 병력 다수는 이미 황궁으로 떠났고, 몬스터들은 공작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황이니.

“으에엥!”

하네스도 본능적으로 위기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겨우 그쳤던 울음을 다시 터트렸다.

리온은 몬스터들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저택 상층으로 올라가는 기사들과, 각자 무기를 들고 저택 정문으로 모이는 남자 사용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두 필사적으로 몬스터 무리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약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리온의 머릿속에 언젠가 엘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리온은 왕자님이라서 왕자님인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황궁에 가야 돼. 거기 가면 하기 싫은 공부도 많이 하고, 마음대로 놀 수도 없어.’

‘누나도 맘대로 못 만나.’

‘우웅…….’

‘그래도, 힘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지도 몰라. 어제처럼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싶을 때라든가.’

‘…….’

‘그때는 망설이지 마.”

지금의 리온에게도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었다.

작고 약한 하네스도, 제게 상냥하게 대해 주는 앤도, 이 저택의 모두를.

공작저 정문으로 나서는 아가일과 사용인들을 바라보던 리온은 지하실로 향하던 하녀들에게서 벗어나 저택의 현관으로 달려갔다.

혼란스러운 상황에 휩쓸려 한 박자 늦게 리온을 발견한 앤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도, 도련님!”

리온이 저택 현관을 나오자, 몬스터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리온은 긴장된 표정으로 몬스터들을 바라보며 제 앞을 막고 서 있는 아가일에게 소리쳤다.

“아조씨, 비켜 바!”

기사들의 방어 진영에 합류하려던 아가일은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란 그때였다.

공작저 주위에 거센 불길이 화르륵타올라 몬스터들을 공격했다.

“키에엑!”

갑작스럽게 번진 불길에, 몬스터들은 물론 기사들까지 놀란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빠른 속도로 번져 간 불길은 이내 공작저를 에워쌌다.

마치 공작저를, 이곳의 사람들을 보호하듯이.

‘이건, 대체………?’

믿기지 않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가일은 문득 제 옆의 작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눈치채고 돌아보았다.

그곳엔 리온이 있었다.

불꽃이 일렁이듯 결의에 찬 눈을 반짝이며.

아가일은 믿기지 않는 눈으로 리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이의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굳센 기세가 이 불꽃의 주인임을 증명했다.

아가일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마님. 도대체 누굴 숨겼던 겁니까….’

아가일은 엉거주춤 리온에게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황손… 저하를 뵙습니다.”

하지만 리온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아가일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조씨, 모해? 빤니 싸워!”

아가일은 리온의 말대로 불길을 넘어 들어오는 몬스터들에게 다가섰다.

그날 공작저에 생명을 태우는 불꽃이 아닌, 사람들을 지키는 불꽃이 타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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