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
마을 광장에서 황궁까지 날아온 리하르트는 상공에서 주위를 살폈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혼돈의 힘…….’
조금 전부터 황궁에서 혼돈의 힘이 뻗쳐 나오더니, 이내 황궁 전역을 장악했다.
그때, 상공에 떠 있는 리하르트의 등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재빠르게 뒤를 돌아보며 기척의 주인을 긴 다리로 걷어찼다.
“키에엑!”
그 기적의 주인은 새와 인간, 드래곤의 모습을 합친 듯한 몬스터 가고 일이었다.
지상으로 추락하는 가고일의 뒤로 어느새 잔뜩 몰려온 비행형 몬스터떼가 보였다.
‘일단 적당히 정리하고 시작할까.’
리하르트는 상공에 구름을 모아 거대한 먹구름을 만들었다.
그리고 지상으로 내려가려는 몬스터들을 향해 연이어 낙뢰를 날렸다.
“캬아악!”
“키에엑!”
낙뢰를 정통으로 맞은 몬스터들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지상으로 추락했다.
하지만 꽤 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했음에도, 몰려드는 몬스터들의 수가 더 많았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군.’
폭풍을 일으켜 전부 날려 버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겠지만, 이 아래는 황궁이었다.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고, 폭풍의 피해는 그들에게도 돌아갈 터였다.
폭발이 끝나지 않은 건지 곳곳에서 폭발음이 들리고, 그 사이로 혼돈의 힘에 먹힌 이들의 비명이 언뜻 들려 왔다.
신성력을 가진 엘리사나 에이든이라면 저 힘을 직접적으로 저지할 수 있겠지만, 루벨린의 힘은 혼돈의 힘에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서둘러 원흉을 찾아 제거해야 한다.’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이 누구인지는 분명했다.
‘레이모어 펠리스.’
리하르트는 그 얼굴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분명 엘리사가 정화했던 그때, 그의 영혼의 반쪽은 사라졌었다.
어떻게 그 힘을 사용하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힘을 쓸 만한 인물은 레이모어뿐이었다.
‘반역죄인이니 분명 황궁의 지하감옥으로 데려갔겠지. 그러니 지하감옥으로 가는 길을 훑어보면……….’
황궁의 지하 감옥은 황궁의 가장 외진 곳, 황실 기사단이 기거하는 건물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리하르트는 재판이 열린 그레이트홀에서 지하 감옥으로 향하는 길을 훑으며 그쪽으로 향했다.
지상을 살피며 가던 리하르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하 감옥과 황실 기사단의 거주지가 가까워질수록, 혼돈의 힘에 먹힌 것으로 추정되는 시신들이 많아졌다.
리하르트의 예상대로 지하 감옥에서 이 사태가 처음 벌어졌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혼돈의 힘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진다.
이 사태의 원흉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폐허가 된 지하 감옥으로 다가가던 리하르트는 마침내 레이모어를 발견했다.
혼돈의 힘에 휩싸인 레이모어는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리하르트가 협곡 너머에서 보았던 영혼의 응집체처럼.
리하르트는 불시에 낙뢰를 쳐 레이 모어를 공격하며 그에게 다가섰다.
하지만 레이모어는 그 공격을 가뿐하게 피했다.
애초에 기습을 노린 공격이 아니었기에, 리하르트는 감흥 없는 눈으로 레이모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완성작 소리를 그렇게 하더니, 결국 본인이 그 ‘완성작’이 되었군.”
리하르트의 등장을 알아챈 레이모어가 리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오셨군요.”
리하르트는 그에게 비아냥거리듯 물었다.
“그토록 염원하던 ‘완성작이 된 기분은 어떤가?”
“세상이 제 것이 된 것 같군요. 세상 모든 것들이 너무도 약하고, 가소롭고, 우습게 느껴집니다.”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상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아직은 완성이 아닙니다.”
레이모어는 그렇게 덧붙이며 리하르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혼돈의 힘으로 온통 검게 뒤덮인 몸에서 유일하게 또렷이 보이는 눈이,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눈을 희번덕이며 리하르트에게 다가섰다.
“남은 반쪽도 제게 주시지요.”
그와 동시에 그에게서 뻗어 나온 혼돈의 힘이 다짜고짜 리하르트를 삼킬 듯 공격했다.
리하르트는 재빠르게 힘을 피했다.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힘이라 해도 위험했다.
‘지상은 혼돈의 힘이 뻗쳐 위험하니 상공에서 공격을 ……….’
리하르트는 상공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바람을 일으켰다.
그때였다.
쿵!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 들며 순간적으로 의식이 흐려졌다.
마치, 몸 안의 무언가가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큭….”
그 느낌과 함께 찰나의 순간, 숨이 멎었다 돌아왔다.
그 감각은 한 번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그의 숨통을 조이고, 의식을 흩트렸다.
그에 리하르트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레이모어는 그런 리하르트를 보며 웃었다.
“느껴지십니까? 나뉜 두 영혼이 서로 공명하는 것이.”
“…….”
“더 강해진 쪽에 붙어 하나가 되려 하는군요.”
레이모어는 흐려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버티고 있는 리하르트의 곁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무소불위의 영웅이 무너진 모습이라……. 그 누구도 보지 못했을 아주 진귀한 모습이군요.”
“…….”
“버텨 봤자 소용없는 짓입니다. 당신의 영혼은 곧 제게 흡수될 테니.”
그는 근처에 뒹굴던 기사의 장검을 리하르트의 앞에 내려놓으며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면, 저를 죽이십시오.”
“…….”
“저를 죽이고, 당신이 멸망한 세계의 왕이 되는 겁니다.”
리하르트는 레이모어가 제게 검을 준 의미를 알아채고 이를 으득 물었다.
리하르트가 레이모어의 손에 죽든, 레이모어가 리하르트의 손에 죽든, 어느 쪽이든 레이모어가 원하는 결말이 된다는 뜻이었다.
“자, 어서 선택하십시오.”
리하르트는 교활한 미소를 짓는 레이모어를 노려보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네놈 뜻대로는, 절대 안 돼.”
리하르트의 대답에, 레이모어는 웃음을 터트렸다.
광기에 어린 그의 웃음소리가 리하르트의 귓가에 시끄럽게 울렸다.
“안타깝군요. 당신이 그 ‘완성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
“당신의 뜻이 그러시다면…”
레이모어는 언제 웃었냐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리하르트의 팔을 붙잡았다.
“제가 죽여 드리는 수밖에.”
레이모어는 리하르트를 향해 혼돈의 힘을 뻗쳤다.
혼돈의 힘이 리하르트의 심장에 가까워지자, 리하르트는 영혼이 더욱 더 거세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엘리사에게, 돌아가야 해.’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 얼굴이 떠올랐다.
긴 전쟁에서도, 그가 자신을 놓아버릴 뻔했던 그 수많은 순간에도, 저를 다시 삶으로 끌어올리고 악착같이 버티게 했던 그 얼굴이.
리하르트는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마나를 모았다.
하지만 혼돈의 힘은 리하르트가 반격할 틈도 없이 빠르게 그를 덮쳐왔다.
그때였다.
바닥에서 물의 기둥이 솟아오르며 혼돈의 힘과 리하르트의 사이를 차단했다.
그것을 본 레이모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 남편한테서 손 떼.”
레이모어가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자, 그곳엔 싸늘한 표정을 한 엘리사가 서 있었다.
레이모어는 가소롭다는 듯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애석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왕의 영혼은 내 영혼에 흡수되기 시작했으니.”
“그전에 내가 당신의 영혼을 정화해 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엘리사는 그와 동시에 거대한 신성력의 파도를 일으켜 레이모어를 덮쳤다.
“……귀찮게 하는군. 진즉에,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하지만 레이모어는 가볍게 신성력의 벽을 뚫고 엘리사를 공격해 왔다.
엘리사는 간발의 차이로 얼음의 장벽을 세워 혼돈의 힘을 막았다.
얼음을 뚫으려는 혼돈의 힘이 창처럼, 그를 막아서려는 신성력이 방패처럼 서로에게 맞섰다.
레이모어는 엘리사를 한 번에 처리하기 위해 황궁 전체에 뻗쳐 있는, 혼돈의 힘이 닿는 반경을 더욱 넓혔다.
생명체에게서 빨아들인 생명은 곧, 혼돈의 힘의 마나나 다름없었으므로,하지만 혼돈의 힘은 장벽에 부딪혔다.
‘반경이…… 더 넓어지지 않는다.’
레이모어는 그제야 깨달았다.
혼돈의 힘이 더 뻗치지 못한 것은 엘리사가 만든 신성력의 장벽 때문임을.
힘이 미치는 반경에 더 이상 흡수할 수 있는 생명이 없으니, 이 이상의 힘을 쓰는 것은 힘들었다.
“제법 강수를 두셨군요. 하지만…….”
엘리사의 장벽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레이모어는 비릿한 미소를 띠며 웃었다.
그의 힘을 막아서며 거대한 장벽을 유지하고 있는 엘리사 역시 지금이 한계였다.
“부인께서도 정화할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군요.”
그 말과 동시에 레이모어에게서 뻗어 나온 혼돈의 힘이 엘리사의 얼음장벽에 부딪혔다.
미세한 균열이 있던 장벽은 기습을 막아 내지 못하고 파스스 깨졌다.
단번에 장벽을 뚫고 들어온 혼돈의 힘이 엘리사의 몸을 휘감았다.
마치 거대한 덩굴처럼 변해 엘리사의 숨통을 조였다.
“흣…..”
가시덩굴의 가시가 파고들 듯, 혼돈의 힘이 사방에서 엘리사의 몸을 파고들었다.
엘리사가 가진 신성력이 그에 저항하자, 레이모어는 황궁 전역에 뻗쳐 있던 혼돈의 힘을 거두어 엘리사를 공격하는 힘에 더욱 마나를 실었다.
그와 동시에 황궁 전역을 보호하고 있던 엘리사의 방어막도 깨졌다.
레이모어는 흥미가 식은 눈으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엘리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의 운명을 바꿀 기회는 많았지. 이 지경이 되기 전에 왕을 죽이거나, 아니면 네가 희생해서 왕의 힘을 봉인하거나.”
“…….”
“어리석은 실패작이군.”
레이모어는 이제 저항이 거의 멎은 엘리사의 생명을 거두기 위해 마지막 힘을 주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지직!
강력한 낙뢰가 정확히 레이모어를 관통했다.
그와 동시에 레이모어의 몸이 경직되며, 그의 힘이 일순 약해졌다.
레이모어는 뻣뻣해진 몸을 가까스로 돌려 뒤를 보았다.
그곳엔 무너진 벽을 붙잡고 가까스로 선 리하르트가 마법을 시전하고 있었다.
이윽고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위력의 낙뢰가 레이모어에게 연속으로 내리꽂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마침내, 레이모어의 몸이 무너졌다.
엘리사의 숨통을 조이고 있던 혼돈의 힘도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의 몸도 무너졌다.
“하아………. 하아……….”
잠시 후, 엘리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막혔던 숨이 다시 들어오며 폐부가 아플 정도로 채워졌다.
조금 전 그 낙뢰, 리하르트가 의식을 되찾은 엘리사는 제일 먼저 리하르트부터 찾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리하르…….”
그가 있던 곳을 바라본 엘리사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렸다.
황궁의 곳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온 거대한 검은 기운이 하늘까지 집어삼킬 듯 커져 가고 있었고, 상공에 가득한 몬스터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그 아래에, 리하르트가 있었다.
평소의 다정함은 오간 데 없이, 감정 한 자락 담기지 않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