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
루벨린 공작가 주위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일렁이며 공작저로 접근하는 몬스터들을 막아 냈다.
하지만 지상형 몬스터의 공격은 막을 수 있어도, 비행형 몬스터들의 공격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루벨린의 기사들은 활을 들고 비행형 몬스터에 맞섰다.
“전방에 가고일 무리가 접근 중!”
“궁수들, 전군 대기!”
톰슨의 직속 부하 서트가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자, 루벨린 공작가의 기사들은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고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조준했다.
이윽고 활을 쏘라는 수신호가 내려졌다.
날아간 화살은 달려드는 몬스터들에게 적중했고, 기사들은 화살에 맞고 떨어지는 몬스터들을 속전속결로 처리했다.
그동안 리온의 불꽃이 지상형 몬스터의 침공을 막아 준 덕분이었다.
리온이 힘들지 않도록 품에 안고 있던 아가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힘들진 않으십니까, 저하?”
“웅. 갠차나요. 근데 저하가 머예요?”
“저하는…….”
아가일이 호칭에 대해 설명해 주려던 그 순간, 공작저 바깥쪽에서 절 박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주세요!”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몬스터들이 여자들을 해치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리온이 바둥거렸다.
“아조씨, 저 누나들 도와조야대!”
“예? 어떻게………?”
눈앞에 리온이 키워 둔 불길이 무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공작저로 들어올 수도 없지만, 마찬가지로 공작저의 일원들이 공작저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아가일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던 그때, 철문 주위의 불꽃이 일시적으로 사그라들었다.
“내가 불 꺼써! 빨리, 빨리!”
리온의 재촉에, 아가일은 리온을 내려 두고 옆에 있던 기사들과 함께 철문으로 다가갔다.
기사들은 뜨겁게 달궈진 철문을 힘겹게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갔다.
늑대형 몬스터가 여자들 중 하나를 짓누른 채 침이 뚝뚝 흐르는 입을 벌리고 있었고, 다른 여자는 몬스터를 향해 양동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꺄악! 살려 주세요!”
“저리 꺼지라고!”
하지만 어설픈 공격은 몬스터에게 겁을 주긴커녕, 자극만 한 모양이었다.
몬스터는 목표를 바꾸어 양동이를 든 여자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 루벨린의 기사들이 활을 쏘아 몬스터를 맞혔다.
“크르륵!”
몸통에 화살을 맞은 몬스터가 고통에 멈칫한 동안, 루벨린의 기사들은 몬스터를 처치했다.
그사이 아가일은 여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우선은 저희와 같이 공작저에 머무시죠.”
“가, 감사합니다……….”
기사들은 여자들을 데리고 공작저로 돌아갔다.
아가일과 나머지 기사들도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공작저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아가일 경, 하늘이 왜 저렇죠?”
옆에 있던 기사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하늘을 쳐다본 아가일도 미간을 찌푸렸다.
하늘이 온통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검은 기운은 황궁의 상공에서 뻗어 나오는 듯했다.
마치 맑은 하늘에 검은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각하와 마님께선…… 무사하시겠죠?”
아가일은 굳은 표정으로 검은 기운에 휩싸인 황궁 쪽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하실 겁니다. 워낙에 강하신 분들이니.”
그때, 가까운 곳에서 또 다른 비명이 들려왔다.
아가일은 그쪽으로 다가서며 덧붙였다.
“우리는 그때까지 이 저택을 지키죠.”
두 분이 무사히 돌아오실 수 있도록.
*
같은 시각, 신목의 숲 아공간.
거대한 신목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라르딘은 조용히 눈을 떴다.
늘 무심하던 그의 미간이 설핏 일그러져 있었다.
‘혼돈의 힘이…….’
혼돈의 힘이 이 세계 곳곳에 뻗어 있는 신목의 뿌리까지 잠식하여 생명을 흡수하려 하고 있었다.
제도에서 신목의 숲까지 거리가 멀어 아직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신목과 하나가 된 그에게는 혼돈의 힘이 선명히 느껴졌다.
라르딘은 굳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늘 빛으로 가득하던 하늘이 검은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라르딘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엘리 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저는… 아니, 우리는 그 운명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우리만의 답을 찾겠어요.’
라르딘은 점점 더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만의 답을 찾길 바라, 아리에.”
*
“리하르트………?”
엘리사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리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눈앞의 그는, 자신을 사랑하던 그 다정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결국 라르딘이 우려하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것을.
‘지금은 영혼이 완전히 융합되지 않은 상태라 버티고 있지만, 곧 이 지를 잃고 살육을 탐하는 마왕이 될 거다……..’
‘너도, 네 아이도 알아보지 못할 테지.’
엘리사는 떠오르는 라르딘의 말을 부정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자신을 잊어버렸을 리 없다.
“리하르트.”
엘리사는 리하르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는 싸늘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다가오지도, 전처럼 안아주지도.
그럼에도 엘리사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리하르트. 우리, 집에 돌아가자.
이제 다 끝-”
그 순간, 리하르트에게서 뻗어 나온 혼돈의 힘이 엘리사를 공격해 그녀를 뒤쪽의 벽면으로 날렸다.
“허억……!”
폐부가 터질 듯한 끔찍한 통증이 엘리사를 덮쳤다.
엘리사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며 등 뒤의 벽에 기대어 섰다.
그사이, 성큼 거리를 좁혀 온 리하르트가 커다란 손으로 엘리사의 가느다란 목을 움켜잡았다.
“흐윽….”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은 마치 혼돈의 힘에 홀린 몬스터의 그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공허했다.
그는 감흥 없는 표정으로 엘리사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엘리사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막힌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그를 불렀다.
“리…… 하….”
저를 대할 때마다 바람 불면 부러 질까, 놓으면 쓰러질까 조심스럽던 그 손길과는 달랐다.
저를 바라보는 무심하고 서늘한 눈빛도.
죽음의 문턱에 선 고통보다, 제게 그 고통을 주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라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거야……?’
간절히 피하고 싶었던, 그러나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숨이 막혀 발버둥 치던 엘리사는 자신을 움켜쥔 리하르트의 손목을 붙잡고 신성력을 사용했다.
그러자 엘리사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리하르트의 손이 순간적으로 느슨하게 풀어졌다.
엘리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신성력으로 리하르트를 공격했다.
“큭….”
그와 동시에 리하르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엘리사에게서 손을 떼고 떨어졌다.
온몸에 힘이 빠진 엘리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때, 엘리사의 드레스 주머니에서 오르골이 떨어졌다.
얼마 전, 진리의 탑에서 보내온 녹음기 중 하나였다.
몇 바퀴 굴러가던 오르골의 뚜껑이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네스, 엄마 해 봐. 엄. 마.”
“음마음마마.”
“오구, 잘했어요, 우리 아들. 이번엔 아빠 해 보자. 아. 빠.”
“아빠아빠! 우우웅.”
]
곧이어 엘리사와 하네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곧장 다시 엘리사의 목을 틀어잡으려던 리하르트의 손이 멈칫했다.
엘리사는 그 찰나의 망설임을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리하르트.”
“…….”
“우리 아기한테 돌아가자………”
우리 아기가 기다리는, 우리의 집으로.
하지만 리하르트의 망설임은 찰나였다.
잠시 멈칫했던 그의 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그녀를 틀어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한 힘을 실었다.
조금 전 자신의 흔들림을 부정하듯이.
그 흔들림의 원인을 서둘러 없애려는 듯이.
“흐으… …..”
엘리사는 숨통을 조이는 강한 힘에 괴로워하며 몸부림쳤다.
점차 숨이 막혀 오자, 정신이 흐려져 신성력을 사용하기도 어려워졌다.
가까스로 그의 손목을 잡고 신성력을 사용해 봐도, 그의 몸에서 혼돈의 힘이 흘러나와 막아 냈다.
“리, 하……르…….”
엘리사의 숨소리가 점차 멎어 들던 그때였다.
그녀를 집어삼킬 듯 흘러나오던 혼돈의 힘이 리하르트의 목에 걸려 있던 정화의 펜던트에 닿더니, 펜던트에 쩌적 - 금이 갔다.
그리고 마침내 펜던트가 깨지며 그 안에 응축되어 있던 신성력이 흘러 나와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와 동시에, 공허하던 리하르트의 눈동자에 일순 감정이 깃들었다.
눈앞의 상황에 대한 놀라움이 먼저, 그다음에 죄책감이 뒤따랐다.
덩달아 엘리사의 숨통을 조이고 있던 손의 힘도 느슨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큭….”
혼돈의 힘이 거세게 요동치며 스며든 신성력을 금세 밀어냈다.
그에 리하르트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목을 잡고 있던 손을 필사적으로 떼어 냈다.
엘리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리하르트……?”
리하르트는 엘리사를 다시 잡지도, 완전히 떼어 내지도 못한 채 손을 떨었다. 그 모습이 몹시도 힘겨워 보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강한 힘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다시 어둠에 잠식되어 가며 엘리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고통과 슬픔의 감정이 스치듯 지나갔다.
엘리사는 그 눈빛에서 불길한 예감을 직감했다.
“안..”
미처 말릴 틈도 없는 찰나의 순간, 리하르트의 안주머니에서 나온 단검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