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리하르트?”
엘리사는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성력으로 만든 정화의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의 가슴을 날카롭게 파고든 정화의 힘은 그의 심장으로 스며들어 영혼을 정화했다.
그러자 황궁과 하늘을 덮고 있던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혼돈의 힘에 잠식되어 날뛰던 몬스터들도 잠잠해졌다.
그와 동시에 공허하던 리하르트의 눈에 감정이 채워졌다.
언제나처럼, 그녀를 향한 감정들로.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엘리사……….”
검이 꽂힌 그 자리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의 가슴에 꽂힌 정화의 단검을 본 엘리사의 손이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덜덜 떨렸다.
“아…… 안 돼. 안 돼…….”
그가 신목의 숲으로 떠나기 전부터 안주머니에 무언가를 지니고 다니던 것이 떠올랐다.
엘리사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제 죽음을 준비해 왔다는 것을.
‘나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혼자 둘 일은 만들지 않을 거니까.’
이렇게 죽음을 준비해 놓고서는, 제게 그런 말을 속삭였다.
‘내 심장을 네게 줄게, 엘리사.’
“……..”
“네가 죽는 날까지 지켜보다가, 장례를 치른 후에 널 따라갈게.”
‘…….,난 네가 허락할 때까지는 죽지 않을 거야.’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놓고서 불안에 떠는 그녀를 달래 주었다.
누구보다 불안했을 사람은 그 자신일 텐데도, 매 순간,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자신이 없는 미래를 생각했을 그를 떠올리자 엘리사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살고 싶었을까.
스스로를 죽여야 하는 이 순간에도, 얼마나…….
“안 돼, 리하르트. 안 돼…….”
엘리사는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리하르트를 받쳐 안았다.
그에게서 빠져나온 뜨거운 피만큼 몸이 차가워져 가고 있었다.
귓가에 들리는 그의 숨소리도 차츰 옅어졌다.
이윽고, 그의 숨이 멎었다.
힘없이 늘어진 그의 몸이 그녀의 심장을 아프게 짓눌렀다.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내가 더 많이 사랑할 테니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날 사랑해 줘.’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이제야, 네가 떠나고 난 후에야.
그와 동시에 엘리사의 입에서 울음섞인 절규가 터져 나왔다.
“리하르트, 안 돼. 안 돼……….”
아리엔이 자신을 위해 죽은 것을 알게 된 제네이드의 마음이 이랬을까.
네가 없는 세상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지 마, 리하르트…”
가지 마.
제발 나만 두고 이렇게 가 버리지 마.
그 무엇으로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공허함과 슬픔이 차올랐다.
엘리사가 그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던 그때였다.
눈물에 잠긴 그녀의 두 눈에 호수가 보였다.
‘그대의 선조, 아리에 세리어트가 만든 것이라네.’
아리엔이 제네이드를 위해 자신의 신성력을 쏟아부어 만들었다는 호수였다.
멍하니 그 호수를 바라보던 엘리사는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그녀의 선조, 아리에 세리어트는 정화의 힘과 더불어 치유의 힘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만약, 황제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제 품에 안긴 리하르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엘리사는 이내 결의에 찬 눈으로 호수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리하르트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
엘리사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호수로 집중했다.
그러자 호수의 물이 거대한 해일처럼 높게 솟더니, 이윽고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휩쓸어 갔다.
호수에 잠긴 엘리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호수에서 강한 마나가 느껴져.’
아마 아리엔의 힘이리라.
엘리사는 먼저 리하르트의 심장에 꽂힌 정화의 단검을 흡수하여 없앴다.
그리고 다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자, 아직 그의 안에 남아 있는 검은 영혼이 보였다.
하나로 합쳐진 검은 영혼이.
‘리하르트가 이 상태로 다시 살아난다면, 또 한 번 폭주하겠지…….’
하지만 이 영혼을 정화하면, 그의 영혼은 완전히 소멸될 터였다.
엘리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망설이고 있던 그때였다.
‘어?’
합쳐진 영혼 사이로, 아주 작은 점이 보였다.
그의 영혼 반쪽을 떼어 낼 때 보았던 것보다 더 작은 틈이.
그것을 발견한 엘리사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희망이었다.
‘내가 떼어 낸 영혼의 반쪽을 레이 모어가 갖게 되어 문제가 된 거야.
그러니 이번엔 반쪽을 완전히 정화해 소멸시키면 되지 않을까.’
리하르트는 영혼의 반쪽만 가지고도 이십 년 넘게 살아왔다.
영혼의 반쪽이 없어진다 한들, 그 그의 생명에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엘리사는 눈을 감고 리하르트의 영혼에 집중했다.
그리고 미세한 작은 틈에 신성력을 주입했다.
하지만 전보다 강한 힘으로 달라붙은 바깥쪽의 영혼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엘리사는 안간힘을 다하여 영혼의 틈을 벌렸다.
그리고 바깥쪽의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 남은 힘을 모았다.
“하아……’ 한계에 다다르는 힘을 사용한 것인지, 엘리사의 의식이 차츰 흐려져갔다.
순간, 이 힘을 사용하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해도, 그를 포기할 순 없었다.
‘내 생명이 다하더라도.’ 엘리사는 이를 악물고 정신력으로 버티며 바깥쪽의 영혼을 정화하려 했다.
그러자, 바깥쪽의 검은 영혼이 달아나려 거세게 요동쳤다.
하지만 아리엔의 힘이 사방에 버티고 있는 탓에 전처럼 달아나지 못했다.
엘리사는 자신이 가진 정화의 힘을 전부 끌어모아 검은 영혼을 건드렸다.
그 순간, 강한 빛이 엘리사와 리하르트 두 사람을 감쌌다.
‘웃…!’
눈부신 빛에 눈을 감았던 엘리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리하르트의 영혼이 있었다.
분리된 반쪽 영혼은 신성력에 잠겨 바스러지더니, 이내 완전히 소멸되었다.
엘리사는 반쪽만 남겨진 리하르트의 영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의 힘과는 정반대의 힘을 가졌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이의 영혼이었다.
엘리사는 무심코 그의 영혼에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영혼의 기억이 그녀에게로 넘어왔다.
‘이건…… 리하르트의 기억.’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루벨린 본성에서의 기억들, 뒤이어 전쟁이 일어나기 전 아카로아에서 그와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펼쳐졌다.
잠든 어린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 리하르트의 눈빛이 다정했다.
‘그렇게 툴툴거리더니, 그때부터 날 좋아한 거였어.’
출전한 시간이 길었음에도, 그의 영혼에 전쟁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다음 기억은 그녀를 다시 만난 이후의 기억이었다.
본성의 발코니에서 다시 만났던 그날의 기억도, 차가운 계곡에 떨어져 예기치 않게 보내게 된 첫날밤의 기억도, 그녀의 임신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도, 하네스가 태어나던 그날의 기억도….
그의 기억 속엔 온통 엘리사뿐이었다.
그 기억들을 읽은 엘리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와 동시에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제 남은 건, 그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뿐이었다.
‘리하르트를 살려 줘요, 아리엔..’
아픈 과거를 반복하지 않게 도와줘.
그에게 행복한 기억을 더 만들어줄 수 있게 도와줘.
이윽고, 엘리사와 리하르트를 감싸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한계치의 힘을 사용한 엘리사의 의식이 차츰 흐려졌다.
그런 엘리사의 귓가에 라르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답을 찾아낸 것을 축하해, 아리 엔’그 ‘아리엔’이 자신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엘리사의 눈이 스르륵 감겼다.
곧이어, 엘리사의 숨이 멎었다.
*
“하아……. 하아……….”
엘리사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여기는…….”
엘리사가 쓰러져 있던 곳은 황궁호숫가였다.
‘리하르트……!’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린 엘리사는 제일 먼저 리하르트부터 찾았다.
다행히 그는 제 옆에 누워 있었다.
그의 상태를 살펴본 엘리사의 눈이 놀라 커졌다.
‘상처가, 사라졌어.’
가슴을 관통했던 상처도 모두 치유된 채였다.
하지만 엘리사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의 상처를 치유하기 전,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영혼이 아직 그의 안에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지만, 정말 그가 살아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엘리사는 초조한 표정으로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때였다.
굳게 감겨 있던 그의 눈꺼풀이 움직이더니, 이윽고 선명한 붉은 눈이 드러났다.
엘리사는 믿기지 않는 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깜빡이던 그의 눈이 이내 엘리사를 발견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두 눈에, 언제나와 같은 감정이 어려 있었다.
“…엘리사.”
“……”
“사랑해.”
그의 첫 마디에, 엘리사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의 눈가를 어루만지며 덧붙였다.
“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됐어.”
“…….”
“사랑해, 엘리사. 사랑해.”
죽음의 순간, 차마 전하지 못했던 감정을 쏟아 내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는 급기야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얼마나…!”
리하르트는 제 가슴을 때리며 울음을 터트리는 엘리사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떨리는 등을 토닥이며 그녀의 머리에 입을 맞췄다.
이제 다 괜찮다고, 불안해하는 그녀를 달래듯이.
“사랑해, 엘리사.”
리하르트의 품에 안겨 울던 엘리사는 그를 마주 안았다.
다시는 놓지 않을 온기였다.
*
하늘을 뒤덮고 있던 검은 기운이 사라지고, 세계 깊은 곳 신목의 뿌리를 건드리고 있던 혼돈의 힘 역시 사라졌다.
신목의 뿌리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라르딘은 리하르트가 살아나는 것을 보고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검은 기운이 걷히고 스며든 환한 빛이 라르딘의 눈을 찔렀다.
라르딘은 담담한 표정으로 빛이 내리쬐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아셨겠지요.”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당신의 창조는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승자의 오만보다는 듣는 이를 보듬는 듯한 어조였다.
그의 말에 답하듯, 내리쬐던 빛이 부드럽게 그의 주위에 내려앉았다.
마침내 얻은 평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