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18. Happily ever after
그로부터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 풀 내음이 묻어났다.
어느덧 녹음이 가득한 5월이었다.
저녁을 먹고 목욕을 마친 리하르트는 집무실로 와 뒤늦게 영지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낮에 처리했을 일이었지만, 요즘 그는 매일 밤마다 영지의 업무를 보고 있었다.
레이모어가 폭주한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크리스티안이 사망하며 황위가 빈 까닭이었다.
그의 유일한 자식이자, 가문의 힘을 가진 정당한 황위 계승자 리온이 있었지만 리온은 너무 어렸다.
황위는 마땅히 리온이 이어야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살 아이에게 정사를 돌보라고 할 순 없었다.
섭정이 필요했다.
“누구에게 섭정의 자리를 맡기는 것이 좋겠소?”
귀족들은 섭정의 자리에 누가 앉을 것인지에 대해 토론했다.
“황후…… 아니, 황태후께서는 저리되셨으니 국정에 관여할 수 없……”
로제는 호적상 리온의 모친이 되었으나, 감히 황손을 해하려 한 중죄인이 되어 모든 권한을 박탈당했기에 국정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럼 지당히 황손 저하의 조모이 신 태황태후께서 섭정을 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크리스티안의 모친이자 리온의 할머니가 되는 태황태후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남편과 아들을 보름 간격으로 잃은 충격으로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내가 섭정의 자리를 맡지.’
그런 상황에서, 리하르트가 섭정의 자리를 맡겠다 나섰다.
‘말도 안 됩니다. 루벨린 공작가는 황실과 척을 진 가문이 아닙니까?
그런 가문의 수장이 이 황실과 제국을 이끌다니요? 먼 친척이나마 우리가 있는데!’
태황태후의 친정에서는 그에 반발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황태자 크리스티안과 황제 로암이 한 번에 죽을 정도로 위험했던 이번 사건을 정리한 것이 엘리사와 리하르트라는 사실을 모든 귀족들이 알고 있었으니까.
귀족들은 리하르트가 섭정의 자리를 맡는 것에 동의했다.
그에 따라 섭정의 자리는 루벨린 공작가에게 맡겨졌다.
황제와 크리스티안의 장례식은 리하르트의 지휘하에 치러졌다.
그리고 이제 국가적 행사는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리온의 즉위식이었다.
“에떼떼!”
리하르트가 영지의 업무 서류를 거의 다 처리했을 즈음, 그의 품에 안겨 있던 하네스가 조그마한 손으로 책상을 탁탁 두드렸다.
조금 전까진 장난감을 빠는 데에만 열중이더니, 금세 질린 모양이었다.
“으부부!”
하네스는 리하르트의 책상을 때리며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는 그 조그마한 머리가 움직이는 것을 눈치챘으나, 짐짓 모른 척 서류만 쳐다보았다.
조금 전, 하네스와 놀아 주려 했으나 장난감에게 밀려 거절당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평소 같으면 제 목소리에 곧장 반응해 주던 아빠가 반응이 없자, 하네스가 리하르트를 빤히 올려다보며 옹알거렸다.
“아쁘아.”
저를 부르는 것이 명백했지만, 리하르트는 모른 척했다.
‘좀 전에 아빠라고 불러 달라고 할 때는 엄마만 찾더니.’
하지만 금세 태도를 바꿔 아빠를 찾는 아들이 귀여워서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빠가 웃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한 하네스는 아빠를 애타게 불렀다.
“아빠! 아빠빠!”
리하르트는 애타게 저를 부르는 하네스의 목소리가 귀여워 좀 더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아무것도 모르는 하네스가 서러워할 것 같았다.
못 이기는 척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자, 그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던 하네스의 커다란 눈과 눈이 마주쳤다.
“아빠!”
커다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어트리며 꺄르륵 웃는 아이를 본 리하르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하네스의 뺨에 입을 맞췄다.
“미안, 하네스, 네가 귀여워서 못들은 척했어.”
“꺄히!”
하네스가 리하르트의 얼굴을 때리며 기쁨을 표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엘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하르트, 여기 있어?”
“음마?”
방금까지 리하르트와 장난치던 하네스는 엘리사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문 쪽을 돌아보았다.
“음마! 음마!”
하네스의 목소리를 들은 엘리사는 곧장 집무실로 들어섰다.
“하네스, 아빠랑 같이 일하고 있었어?”
“음마!”
엘리사가 오자, 하네스는 언제 아빠에게 관심을 가졌냐는 듯 엘리사에게로 관심을 쏟았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하네스의 뺨을 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물었다.
“엄마만 있으면 아빠는 뒷전이야?”
“아빠도 많이 좋아하지만, 엄마가 아주 쪼금 더 좋은 거예요. 그렇지, 하네스?”
“우웅.”
엘리사는 장난기 어린 어투로 섭섭함을 토로하는 리하르트를 달랬다.
하네스는 그런 엘리사의 말에 답하듯 리하르트를 쳐다보며 방 웃었다.
그 미소에, 리하르트는 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하네스를 안고 아이의 방으로 왔다.
엘리사는 하네스를 요람에 눕히며 소곤거렸다.
“하네스, 내일 리온 형 즉위식이니까 일찍 자자. 형 축하해 주러 가야지.”
“으에?”
하지만 엄마와 아빠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하네스는 신이 난 듯, 팔다리를 바둥거리며 꺄르륵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잘 생각이 없다면, 아이를 놀아 주어 기운을 뺀 다음 잠들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엘리사는 하네스의 요람 옆에 있는 모빌의 버튼을 눌렀다.
서서히 모빌이 돌아가기 시작하자, 하네스의 관심이 자연히 모빌로 쏠렸다.
하네스는 모빌을 붙잡으려 통통한 팔과 다리를 바둥거렸다.
“으떼! 우웅!”
모빌을 잡는 데 한껏 집중한 듯, 작은 눈썹을 찡긋거리는 모습이 귀여웠다.
엘리사와 리하르트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그때였다.
가느다란 바람이 리하르트의 앞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을 느낀 리하르트의 눈빛이 흔들렸다.
‘설마…….’
리하르트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내려다보자, 그를 향해 조그마한 손을 바둥거리고 있는 하네스가 보였다.
“하네스, 너 방금… 가문의 힘을 썼어……?”
“으뿌!”
아빠의 물음에,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진한 눈망울을 휘어 트리며 꺄르륵 웃었다.
가문의 힘을 발현하는 경우는 두가지 경우가 있었다.
첫 번째는 드물지만, 생명의 위협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경우.
하지만 고작 이런 일로 하네스가 힘을 발현할 만큼의 간절함을 느꼈을 리는 없고.
두 번째는 가문에서 자신의 힘에 대해 배우고 자라, 스스로 그 힘을 다룰 수 있게 된 경우.
하네스의 경우엔 이쪽이 가능성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사용하는 것만 보고 저도 자연스럽게 사용하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유독 하네스 주위에 가문의 힘을 사용하는 사람이 많긴 했다.
아빠인 자신부터 엄마인 엘리사, 외조부인 에이든, 그리고 얼마 전까지 같이 지냈던 리온까지.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아직 태어난 지 1년도 안 된 아이가,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 가문의 힘을 사용하다니.
놀란 눈으로 하네스를 바라보던 엘리사가 경탄하며 하네스를 안아들었다.
“세상에, 하네스, 엄마 아빠 몰래 혼자 연습했어?”
“음마! 아빠!”
“오구, 내 새끼. 똑똑해라.”
“히이.”
“리하르트, 우리가 천재를 낳았나 봐.”
엄마 아빠가 저를 칭찬하는 걸 알아들은 것인지, 하네스가 신이 나서 팔다리를 바둥거렸다.
리하르트는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익숙하지만 소중한 풍경이었다.
*
그렇게 한참을 놀던 하네스는 겨우 잠들었다.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그제야 부부의 침실로 돌아왔다.
엘리사가 먼저 침대에 눕자, 뒤따라 침대에 올라온 리하르트가 그녀를 끌어당겨 안았다.
엘리사는 그의 품에 안겨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난 한 달간, 황궁과 제도 전역의상황을 수습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그가 죽음의 고비를 넘겨 제 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조차 깜빡 잊을 정도로, 엘리사는 언제나와 같은 다정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리하르트의 눈을 보다, 조심스레 그의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단단한 근육 너머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거세게 뛰고 있는 심장이 느껴졌다.
‘리하르트는 살아 있어..’
그 사실이 제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그는 알까.
제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엘리사를 마주 보던 리하르트는 제 가슴에 얹힌 엘리사의 손을 끌어와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손가락에서부터 손바닥, 손목 안쪽까지 차례로 입을 맞췄다.
뜨겁고 말캉한 입술이 여린 피부에 닿는 감각에, 엘리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발끝이 오므라드는 아찔한 감각이었다.
그런 엘리사를 열띤 눈으로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천천히 다가가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쪽.
가볍게 맞닿았던 입맞춤은 그녀를 담은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금세 짙어졌다.
“으응….”
달뜬 호흡이 가쁘게 얽혀들며 방안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리하르트는 자연스럽게 그녀를 제 품 안에 가두었다.
그에 놀란 엘리사가 동그래진 눈으로 리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리하르트는 엘리사의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 한 올마저 걷어 내며 속삭였다.
“먼저 유혹해 놓고 그냥 잘 생각이었어?”
그러고는 엘리사에게 도망갈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듯, 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겨우 다시 그의 입맞춤에서 풀려난 엘리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물었다.
“…내일이 리온의 즉위식인 거 알고 있지? 일찍 깨야 해.”
“글쎄, 모르겠는데.”
능청스러운 리하르트의 대답에 엘리사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입꼬리는 슬그머니 올라가고 있었다.
리하르트는 그녀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채 요구했다.
“키스해 주면 알려고 노력해 볼게.”
그의 귀여운 요구에, 엘리사는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졌다는 듯 그의 목에 팔을 감고 입을 맞췄다.
마침내 바라던 것을 얻은 리하르트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사를 안았다.
*
이튿날, 아렌시아의 모든 귀족들이 꼬마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위해 즉위식에 참석했다.
엘리사는 초조한 눈으로 홀 안에 가득 찬 사람들을 살폈다.
‘리온, 어제 연습한 대로 잘하겠지…?’
리온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 공식적으로 나서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일주일간 예행 연습을 했지만, 엘리사는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리온이 실수를 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그 실수로 인해 리온이 위축되는 것은 걱정이 되었으니까.
엘리사가 초조해하던 그때, 홀에 기사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