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164화 (완결) (164/164)

164화

해가 중천에 뜰 무렵에야 겨우 일어난 로제는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에 하녀가 가져다 둔 수프와 빵이 식어 가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곳에서 끊임없이 네 죄를 뉘우치며,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아봐.”

엘리사는 그렇게 말했지만, 로제는 죄책감을 느끼기보다는 자신의 불행에 매몰되었다.

죽음이 두려워 아비의 죄를 고발했지만, 과연 평생 유폐되어 사는 것이 죽음보다 나은 삶일까?

로제는 공허한 눈으로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오색의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었으나, 그 어떤 것도 그녀에겐 감흥을 주진 못했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로제가 곁에 두었던 수족들이 아닌, 엘리사가 새로 뽑은 하녀들이었다.

“태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의 방문에, 공허하던 로제의 눈에 당황한 빛이 어렸다.

왜… 나를 만나러 왔지?’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아닌가.

리온은 자신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으니,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아직 어려서 그 사실이 와닿지 않는 건가.’

리온은 아직 어려 아무렇지 않을지라도, 로제는 아이를 마주하기가 껄끄러웠다.

재판 내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바라보던 그 눈망울을 피하고 싶었다.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전해.”

하녀는 공허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로제를 무심히 보았다.

로제는 그저 허울뿐인 태후다.

황제가 죄인을 만나러 온 것이니, 로제에게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로제의 상태를 보니, 어린 황제에게 좋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하녀는 리온에게 적당히 이유를 둘러대어 두 사람을 못 만나게 할 생각으로 방을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하녀는 여전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로제에게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선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침대 옆 협탁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것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협탁에 놓인 것은 연고가 든 통이었다.

“태후 폐하의 손등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고 가져왔다며 주셨습니다.”

리온의 말대로 로제의 손등에 상처가 있었다.

레이모어가 황궁을 폭파하고 폭주한 그 날, 황후궁으로 돌아가던 로제 역시 혼돈의 힘에 휩쓸려 위험에 처했었다.

그때 넘어지면서 생긴 상처였다.

로제는 리온이 주었다는 연고 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럼, 재판에서 나를 빤히 보던 이유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해수군거리고, 죄인의 얼굴을 감상할때.

아이는 자신의 죄가 아닌, 자신의상처를 보고 있었다.

“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제야 실감이 났다.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 했던 것인지.

그간 저지른 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이었는지.

세상이 외면한 제게 내밀어진 유일한 온기를 없애려고 했던 것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음과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미안해….”

로제는 차마 전할 수 없는 말을 되뇌며 그렇게 한참을 흐느꼈다.

*

5월의 어느 화창한 봄날.

엘리사와 리하르트는 하네스와 리온을 데리고 강변으로 소풍을 왔다.

언젠가 아이들을 데리고 봄 소풍을 가자던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처럼 시간을 낸 것이었다.

네 사람은 먼저 점심부터 먹기로 했다.

점심 메뉴는 빵을 좋아하는 리온을 위한 크루아상 샌드위치였다.

“마시따!”

“많이 있으니까 많이 먹어, 리온.”

“웅!”

“너무 급하게는 먹지 말고, 체할라.”

엘리사는 잘 먹는 리온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빠빠!”

옆에서 이유식을 먹고 있던 하네스가 숟가락을 흔들다가 떨어트렸다.

리하르트는 재빨리 숟가락을 받아 다시 하네스에게 쥐여 주었다.

하지만 하네스는 이유식을 먹을 생각이 없는 듯, 이유식에 손을 담그고 뭉그러트렸다.

“하네스, 그러지 말고 냠냠 먹어야지. 냠냠.”

엘리사가 숟가락을 들고 먹는 시늉을 해 보였다.

하네스는 그런 엘리사를 멀뚱히 바라보다, 숟가락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이유식 범벅이 된 제 손을 입에 넣고 빨아 먹기 시작했다.

리하르트는 그런 하네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재밌으면 됐다.”

한참 이유식을 빨아 먹던 하네스는 빵을 먹는 리온을 빤히 쳐다보았다.

“우웅! 얌.”

하네스가 입맛을 다시며 리온이 든 빵을 향해 손짓했다.

그 모습에, 엘리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네스, 넌 아직 이거 먹으면 안돼. 먹으면 아야 할지도 몰라. 조금 더 크면 먹자.”

“이빨 나면 형아가 빵 마니 사 주께.”

저도 형이라고 동생을 달래는 리온의 모습에, 리하르트는 귀엽다는 듯 피식 웃었다.

엘리사는 그런 하네스와 리온을 흔흔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선선한 봄바람이 네 사람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엘리사가 쓴 모자가 펄럭거렸다.

그 모자를 리하르트가 붙잡아 주었다.

그 손길을 느낀 엘리사가 문득 그를 돌아보았다.

다정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의 등 뒤로, 푸른 하늘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아름다운,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아름다운 풍경.

간절히 바라 왔던 행복의 풍경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엘리사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리하르트.”

그런 엘리사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하르트가 그녀의 모자를 벗겼다.

그리고 서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마침내, 두 사람의 입술이 닿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아가는 언제 생겨?”

샌드위치를 먹으며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던 리온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엘리사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애, 애들 앞에서!’

그와 눈이 마주친 아주 잠깐, 세상에 둘만 있다고 착각할 뻔했다.

엘리사는 한숨을 내쉬는 리하르트를 슬그머니 밀어내며 리온에게 물었다.

“리, 리온은 아가가 또 생겼으면 좋겠어? 하네스 있잖아.”

“더 많이 생겼으면 조케써! 리온이가 다 놀아 줄 고야.”

“황제 폐하가 아니라 보모가 되겠는데.”

리하르트가 리온의 통통한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저를 귀여워한다는 것을 눈치챈 리온은 히죽 웃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마차로 쪼르르 가더니 무언가를 가져왔다.

또 다른 동화책이었다.

“이거 읽어 조!”

“…이제 파르 이야기는 끝났어?”

“웅! 이건 눈의 나라 이야기야.”

리하르트는 기대에 찬 리온의 눈을 바라보다, 졌다는 듯 책을 펼쳤다.

그런 그에게 엘리사가 소곤거렸다.

“우리 남편, 이제 구연동화 장인이 되겠는걸?”

저를 놀리는 엘리사의 장난기 어린 말에, 리하르트는 기습 입맞춤으로 응수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동화책을 다 읽은 리하르트가 책을 내려놓자, 하네스와 리온이 잠든 모습이 보였다.

저가 읽어 달라고 조르더니 먼저 잠든 리온의 모습이 우스웠지만, 덕분에 이제 엘리사와 단둘만의 시간이 생겼다.

리하르트가 엘리사를 돌아보자, 옆에서 경청하고 있던 엘리사가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예전엔 되게 뻔하고 재미없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는데…”

“…….”

“요즘은 그 뻔하고 재미없는 결말, 아주 마음에 들어.”

엘리사는 그렇게 말하며 리하르트를 향해 빙긋 웃었다.

리하르트는 그런 엘리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엘리사는 리하르트의 큰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잡았다.

“우리 행복하게 살자, 리하르트.”

영원히, 아주 오래오래.

엘리사는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속삭였다.

“사랑해, 리하르트.”

그런 엘리사를 빤히 바라보던 리하르트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숙여 엘리사의 입술로 다가왔다.

조금 전, 리온의 방해로 하지 못했던 입맞춤이었다.

천천히 다가온 그의 입술은 가볍게, 그러나 애틋하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의 입술이 닿은 순간 잠시 눈을 감았던 엘리사는 다시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리하르트, 그래서 우리 둘째는 언제 가질까?”

엘리사의 물음에, 다가오던 리하르트가 멈칫했다.

출산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엘리사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듯,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난 네가 고생하는 거 싫어.”

“난 잘생긴 우리 남편 닮은 딸도 낳고 싶은데…….”

엘리사는 다가오는 그에게서 슬그머니 입술을 떼어 내며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닿을 듯 닿지 않는 그녀에게 애가 탄 리하르트는 못 이기는 척 대답했다.

“……그래도 앞으로 3년은 안 돼.”

나름의 협상을 타결한 엘리사는 빙긋 웃으며 그의 입술에 먼저 입을 맞췄다.

리하르트는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윽고, 다시 두 입술이 겹쳐졌다.

웃으며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주위로 봄바람이 스쳤다.

봄바람은 펼쳐진 동화책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햇빛이 마지막 문장을 비추고 있었다.

(악당 남편과 이혼하려는데, 아이가 생겼다) Fin.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