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1)화 (1/152)

“독한 것.”

중년의 여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소녀를 비방하며 뺨을 때렸다.

짝-.

거친 소리와 함께 작은 소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열두 살 남짓 되는 소녀는 앙상하게 말라서 절로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게다가 순진한 인상을 하고 있어 외모만 보면 ‘독하다’는 여인의 표현은 잘못된 것처럼 느껴졌다.

“저분은 발레스 부인 아닌가요? 저 작은 애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저러신대요?”

어머, 어머.

깜짝 놀란 여자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가벼운 대꾸가 돌아왔다.

“모르죠.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둬요. 저 애, 랑슈스의 첫째 딸이잖아요.”

“아. 저 애가. 그랬군요.”

랑슈스의 첫째 딸이라는 얘기를 듣자마자 질문한 사람은 바로 동정심을 거뒀다.

루미나 랑슈스.

랑슈스 백작가의 장녀.

백작의 첫째 부인에게서 본 딸이자…….

‘마음 없는 정략혼의 부산물.’

그러니 친모의 죽음 이후 구박데기 신세가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친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계모를 들였고, 루미나는 자연스럽게 가문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건 친부마저 죽은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저러다가 애가 울면서 도망치겠죠. 아직 어린애잖아요.”

그들의 말대로 루미나는 어린아이였다.

중년의 여인을 기세 좋게 상대할 만한 기세도, 삶의 연륜도 없는 것이다.

다들 잠깐의 소란으로 그칠 거라고 생각했다.

당장만 해도 루미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으니까.

“네 어미의 장례식 때부터 알아봤지만, 너라는 아이는 악독하기 짝이 없구나. 어미를 닮아서 말이야.”

중년의 여인은 사람들의 방관이 자신을 옹호하는 뜻이라고 해석한 듯했다.

기세를 등에 업고 독설을 쏟아냈다.

수위가 점점 높아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물론 루미나를 걱정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장례식 도중인데 너무한 거 아닐까요?”

“경건해야 할 장례식에 품위가 없네요.”

랑슈스 백작과 그의 두 번째 부인.

그러니까 루미나에게는 친부와 계모인 두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하던 도중이었다.

고요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식이 진행돼도 모자라건만.

평민들이 볼 법한 통속 소설 같은 상황이 벌어지니 귀족들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진 않은지, 루미나와 중년의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살짝 눈을 내리깔고 있는 루미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눈물이 고인 눈가는 붉었고, 하얀 뺨에는 새빨갛게 손자국이 났다.

당장이라도 억울함을 호소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아이가 심약해서 그러지 못하고 있다고 다들 지레짐작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실수로 볼 안쪽 살을 씹어버렸잖아. 나이도 어느 정도 드신 분이 힘은 왜 이렇게 센 거야.’

루미나는 지금 중년 여성의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듣고 있었다.

“얘! 너 내 말을 듣고 있는 거니?”

전혀 딴 생각을 하던 루미나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큰 고함을 듣고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고모님이었던가.’

여인은 고인이 된 랑슈스 백작의 손윗누이였다.

친가 쪽 사람이었으니 그럴 거다.

“부인. 그래도 장례식 도중인데 소란은 자제하는 편이…….”

보다 못한 남자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나섰다.

남자의 한마디를 듣고 고모가 톡 쏘듯 외쳤다.

“이 아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나 봐요? 제 부모가 죽었는데 잘 죽었다고 하는 아이예요. 이런 되바라진 애는 맞아야 정신을 차리죠.”

잘 죽었다.

그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그 말의 주어는 부모님이 아니었다. 본인이었지.

루미나는 표정 없는 얼굴로 화끈화끈한 한쪽 뺨을 쓸었다.

고모의 충격 요법은 반은 제대로 먹혔고 반은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일단 한 대 맞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 건 사실이었다.

꿈인가 싶었는데 진짜 현실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다만 그녀가 원했던 것처럼 순종적으로 변했냐고 묻는다면 전혀 아니었다.

‘뺨 맞았다고 사람이 바뀔 수 있으면 오른쪽 뺨 맞을 때는 착한 사람, 왼쪽 뺨을 맞을 때는 나쁜 사람이 되게.’

그렇게 사람을 개조할 수 있다면 참으로 편했을 거다.

태평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미나와 고모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그녀는 루미나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때였다.

루미나가 그녀에게 한 발자국 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짝-.

이번에는 고모의 뺨이 돌아갔다.

루미나가 그녀의 뺨을 망설임 없이 때린 것이다.

고모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순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했다.

“너, 너 지금 이게 무슨……!”

두 눈을 크게 뜬 고모가 목소리를 높였다.

루미나가 얌전해 보이는 얼굴로 전혀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면서요. 고모님께서도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는 거 같아서요.”

“미쳤니? 네가 정녕 제정신이 아니구나!”

루미나가 얌전히 맞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게거품을 물 듯이 흥분했다.

요란한 고모와 달리 루미나는 여유로웠다.

“저는 제정신인데 고모님께서는 아직 정신이 들지 않으세요? 그러면 한 대 더 때려드릴까요?”

언뜻 상냥하게까지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고모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 미친년!”

“와, 어떻게 아셨어요? 제 별명이 미친년이라는 거요.”

루미나가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말했다.

“그러게 제가 미친년인 걸 알면 알아서 피했어야죠.”

순진한 열두 살이었다면 저보다 나이가 몇 배나 많은 친척에게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당하기만 했을 거다.

‘실제로도 그랬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 편 하나 없는 집안에서 고분고분하게 굴어봤자 얕잡아 보이기만 할 뿐이야.’

루미나는 조금 전까지 생생했던 첫 번째 삶을 떠올렸다.

친척들에게 잔뜩 이용만 당하다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강제로 결혼하는 삶이었다.

‘오직 돈만 보고 한 정략혼이었지. 정작 그 돈은 친척들의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건데.’

친척들은 루미나가 자신들의 말을 거스르지 못하도록 천천히 길들였다.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고모님께서는 일찍이 결혼해서 가문에 적을 두고 있지 않지만, 언제나 가문의 재산을 호시탐탐 노렸어. 그러니까 나의 죽음에도 개입했을 거야.’

이곳에 있는 어른들 모두가 돈에 눈이 멀어 있었다.

열두 살 여자애의 인생을 나락으로 보내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만큼.

그러니 죄책감 같은 건 들지 않았다. 심지어 먼저 뺨을 때린 사람은 고모님이 아니었던가.

마음을 다잡은 루미나는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힘주어 두 손을 오므려 쥐었다.

‘그런 끔찍한 삶은 한 번이면 족해.’

한 번의 비참한 죽음 이후 찾아온 기회를 허망하게 놓칠 수 없었다.

***

루미나는 랑슈스 백작가의 적통이며 엄연한 후계자였지만 사생아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그 불운의 시작을 알린 건 친모의 죽음이었다.

랑슈스 백작은 부인이 죽자마자 재혼했다.

계모는 루미나보다 두 살 어린 남동생과 함께였는데, 백작이 어려졌대도 믿을 만큼 백작을 쏙 빼닮은 아이였다.

남동생, 엔디미온은 백작이 지난 결혼 생활에 충실하지 않고 사통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들은 누구보다 떳떳하게 굴었다.

엔디미온의 어머니가 평민이 아니었다면. 루미나의 어머니가 돈을 빌미로 결혼을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만약 그랬다면 랑슈스 백작이 루미나의 친모와 결혼할 일은 절대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루미나의 어머니는 사랑의 방해물이었으며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고.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악역은 루미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악역의 딸인 루미나가 새로운 가족과 함께 행복해지려고 하는 건 염치없는 짓이었다.

출가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구박데기 신세는 의외로 일찍 끝나게 됐다.

랑슈스 백작이 재혼한 지 오 년이 흘러, 루미나가 열두 살 때.

불의의 마차 사고로 랑슈스 백작 내외가 사망했다. 마차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목숨을 건진 건 엔디미온뿐.

“……한없이 연약한 인생을 긍휼히 여기옵소서. 지금 저희는 신의 품으로 떠난 랑슈스 백작 내외의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친인척이 모두 모인 장례식이었다.

루미나는 어서 식이 끝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장례식이 거의 끝나갈 때쯤…….

“루미나.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한 남자가 잃어버린 딸을 찾은 것처럼 감격 어린 표정을 하며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안았다.

“……누구세요?”

“클로이 누님이 죽고 교류가 끊긴 탓에 바로 떠올리지 못하는구나. 네 외숙부다. 네가 갓 태어났을 때 잠깐 본 적이 있는데 그새 깜빡했나 보구나!”

상식적으로 갓 태어났을 때 잠깐 본 사람을 이제껏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을 외숙부라고 주장한 남자가 과장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런. 수척한 걸 보니 마음고생이 심했나 보구나. 하긴 부모가 죽었는데 마음이 편할 자식이 있을 리 없지.”

그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잠깐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할까?”

고개를 끄덕인 루미나는 뜻밖의 제안을 받게 됐다.

“루미나, 나는 네가 가주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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