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2)화 (2/152)

“가주요?”

“그래, 가주.”

외숙부가 확신에 가득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루미나가 다음 랑슈스 백작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루미나 본인마저도 말이다.

“진짜 정통성을 갖고 있는 후계자는 너지. 그 꼬맹이가 아니라.”

“꼬맹이라면…….”

“엔디미온인가 뭔가 하는,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녀석 말이다.”

외숙부가 이복동생인 엔디미온을 가차 없이 폄하했다.

“이대로 그 꼬맹이한테 자리를 넘기면 너는 어찌 될 거 같으냐? 클로이 누님이 죽자마자 널 업신여겼는데 이젠 얼씨구나 하면서 너부터 처리하려 들 게 분명하다.”

루미나는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충분히 타당한 얘기였기 때문이다.

외숙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루미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비쩍 말라서 꼴이 말이 아니구나. 하늘에 있는 클로이 누님께서 이 모습을 보면 슬퍼할 거다.”

그가 눈물까지 그렁그렁 단 채로 루미나의 처지를 안쓰러워했다.

“나는 조카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당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원래 네 자리를 찾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나서는 거니 편하게 생각하렴.”

“……숙부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겠어요. 하지만 제 마음대로 결정되는 일이 아닌걸요.”

열두 살짜리 아이한테 가문을 좌지우지할 힘이 있을 리 없었다.

루미나가 제 딴에는 최선의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외숙부의 마음에는 썩 차지 않는 대답이었다.

“너는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의 뭘 믿고?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외숙부는 달콤한 말로 자꾸만 루미나를 부추겼다.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아니면 이대로 당하기만 할 거냐?”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이제껏 루미나는 실패작이었으며 죽은 어머니의 그림자에 갇혀 살아야 했다.

그러니 자신만이 할 수 있다는 얘기가 제법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그래, 잘 결정했다! 넌 그냥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니 걱정 말렴.”

외숙부, 조제프는 루미나를 내세우며 랑슈스의 일부 방계들과 결탁했다.

엔디미온은 백작의 친자였지만, 반은 평민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탐탁지 않아 하거나 조제프의 계획을 듣고 한 몫 챙기려고 한 이들이 모였다.

목적이야 어찌 됐든 순조롭게 랑슈스를 집어삼킨 조제프는 루미나를 행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루미나에게 외숙부를 만난 건 불운이었다.

***

루미나에게는 포상처럼 많은 것들이 쥐어졌다.

계속 써도 마르지 않을 것만 같은 금전, 쏟아지는 관심, 무엇이든 해도 상관없는 자유.

무너진 둑처럼 갑자기 쏟아진 것들에 루미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를 노려 외숙부, 조제프는 루미나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도박장에 데리고 다녔다.

루미나는 조제프의 의도대로 순식간에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그때부터였다. 루미나가 환청에 시달리며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날이 많아진 것은.

스스로가 망가지는 줄도 모르고 하루하루를 보내게 됐다.

이후 엔디미온이 어떻게 됐는지, 가문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런 문제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루미나가 성인이 되었다.

그리고 랑슈스 가의 사정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

“결혼을 하라고요?”

“그래, 네게도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루미나의 혼기가 차자마자 조제프는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너도 알다시피 요즘 상황이 좋지 않잖니. 아,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결혼이면 모두 해결될 일이니까.”

랑슈스의 방계들과 조제프가 합심해서 진행하던 사업이 망했다.

가세가 기울자 조제프는 가장 먼저 루미나를 이용하려고 했다.

언제나 그렇듯,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흐지부지 넘어가려는 외숙부의 태도에 루미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대답했다.

“싫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하라니. 이건 깊게 생각할 것도 없는 제안이었다.

루미나가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루미나…….”

“이제 가주는 저예요. 성인이 되면 정식으로 가주 자리를 제게 넘기기로 한 거, 똑똑히 기억하시죠?”

방계들이 개입하는 건 어디까지나 임시였다.

성인이 되면 가주 자리를 받기로 약조했던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럼, 알고 말지. 그래서 하는 말인 거다.”

조제프가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네가 쓰는 돈이 땅을 파서 나오는 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테지.”

루미나가 쓰는 돈도 돈이지만 무엇보다 조제프와 방계들이 진행한 사업이 쫄딱 망한 게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줬다.

그렇지만 조제프는 제게 불리한 사실을 쏙 빼놓고, 모든 것이 루미나의 탓인 듯 몰아갔다.

“네 말대로 이제 랑슈스의 가주는 너다. 가주가 됐으면 그 지위에 맞는 책임을 져야지.”

조제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루미나를 달랬다.

“너도 여기서 소비를 더 줄이고 싶지 않겠지?”

조제프는 루미나와 한 약조를 지킬 거다.

비록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뿐인 가문을 받게 돼도 가주는 가주 아니던가.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루미나 또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두통 탓에 그럴 여력이 없었다.

당장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만으로 만족한 루미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과의 결혼이 진행되었다. 상대의 얼굴은 알 수 없었다.

딱히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상태가 된 루미나는 다시 도박장을 전전했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그 얘기 들었어?”

“아, 그거?”

도박장에서는 별의별 소문이 돌았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루미나의 근처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평소처럼 제국의 크고 작은 사건을 떠들었다.

“하트 공자가 폭주해서 죽었다지?”

“그 레기온?”

레기온.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강력한 이능을 발현하는 존재를 일컫는 명칭이었다.

레기온은 혈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가리지 않고 레기온이 될 수 있었다.

극소수만 각성하는 힘이기에 특별하지만.

각성한 레기온이 국가에 등록을 마치면 전투병기로서 활약한다.

여기까지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레기온 중에서도 유명한 인물이 몇 있었다.

그중 한 명이 하트 공작이었다.

오늘 도박장에서 술안주처럼 언급될 인물은 그의 아들인 하트 공자였고.

“제 힘에 잡아먹혀 죽다니. 꼴사납기도 하지.”

“힘을 쓰면 쓸수록 인간에서 멀어진다고 하잖아. 그래서 그런지 레기온 중에서도 강한 놈들은 신체나 정신이 이상한 경우가 많고.”

“그렇다 해도 나는 부자가 레기온인 경우를 처음 봐서 폭주까지는 하지 않을 줄 알았지.”

“그러게 말이야. 레기온으로 태어났으면 그 능력으로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제대로 지키고 갈 것이지. 이래선 무능한 레기온과 별반 다를 게 없잖아.”

평소 레기온은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일상생활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능력을 쓸 때 인간과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피부에 비늘이 돋아난다거나 동물의 귀와 꼬리가 생긴다거나 날개가 생기는 등의 외형적 변화였다.

그리고 그 특징은 개인마다 상이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포커를 치며 유명인물들을 한창 물고 씹던 도중이었다.

우당탕탕-.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을 모두 쓸어버리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좀 조용할 줄 알았는데 랑슈스의 미친년이 또 소란을 피우는구나.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으로 고개를 돌린 사람들이 의식을 잃은 채로 바닥에 쓰러진 루미나를 보자마자 눈빛을 바꿨다.

놀람, 당황 그리고…….

“레기온.”

“레기온이야!”

탐욕을 담은 눈빛이었다.

***

“레기온이라고?”

소식을 전해들은 조제프가 눈을 빛냈다.

한창 도박을 즐기던 루미나가 쓰러졌다고 한다. 나비 같은 날개를 드러낸 채로.

날개는 곧 사라졌다고 하지만 도박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감시역을 붙여놔서 다행이지. 그러지 않았다면 그 망할 도박꾼들에게 루미나를 빼앗겼을지도 몰랐다.

“그 아이와 몇 년을 지냈지만 아무런 능력도 나타난 적이 없었지.”

레기온은 보통 다섯 살 이전에 능력이 발현된다.

“그렇다면…….”

무능한 레기온.

그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어쭙잖은 집안과 결혼시켜버리는 것보다 다른 방식으로 팔아치우는 게 더 비싸게 받겠어.”

레기온의 능력이 워낙 강한 탓에 일반인들은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마저 두려워한다.

하지만 드물게 무능한 레기온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들은 레기온 특유의 파괴적인 능력은 없지만, 외양적인 특징만은 고스란히 가졌다.

일반적인 레기온과 달리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각성한 이후 재채기하듯 외양적 특징이 불쑥 튀어나왔다.

평범한 인간인 줄 알았던 동료가 알고 보니 무능한 레기온이었다더라.

그런 목격담이 괴담처럼 종종 퍼졌다.

그리고 무능한 레기온들은 희귀한 걸 좋아하는 부호들에게 비싼 값으로 암암리에 거래됐다.

“따로 능력이 없는 데다 그동안 잘 길들여놨으니 가만히 앉아서 공돈을 굴리게 생겼군! 하하, 역시 신은 내 편이야!”

조제프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쓸모가 넘치는 조카를 뒀다고 생각하며.

***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하지만 루미나가 입게 된 건 웨딩드레스가 아니었다.

“놔! 놓으란 말이야!”

덩치 큰 장정들이 루미나의 양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루미나가 반항했지만 저보다 덩치가 두 배는 더 큰 남자였다.

힘으로 몰아붙인다 해서 제대로 먹힐 리 없었다.

하지만 불길함을 느낀 루미나는 초인적인 힘을 끌어 모아 할 수 있는 모든 저항을 시도했다.

그 결과, 남자의 손을 거세게 깨물고 있는 채로 계단에서 질질 끌려갔다.

그리고 조제프와 마주하게 됐다.

“이거 참. 랑슈스의 최고의 보석인데 조심히 다뤄야지. 흠집이라도 나서 값을 깎으면 어쩌려고 그래!”

“숙부님.”

루미나가 인상을 와락 찡그린 채로 조제프를 노려봤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죠.”

“네가 가주의 책임을 다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 말대로 하는 중이지.”

“전 분명 결혼을 한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 이건 납치가 아닌가요?”

“납치라.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그런데 말이다, 루미나. 네가 레기온이더구나.”

“……!”

“역시 너도 알고 있었구나.”

루미나의 동요를 읽은 조제프가 씩 웃었다.

“누님은 이런 중대한 비밀이 생기면 동생인 나한테 째깍째깍 알려주셨어야지. 말도 안 하고 죽다니.”

“…….”

“가장 크게 한탕 할 수 있는 방법이 눈앞에 있는데 눈먼 장님처럼 살았잖아.”

조제프의 눈동자가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래서 지금 나를 팔아넘기겠다고?”

숙부고 뭐고.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 존대를 해 줄 가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신부로서의 결혼 생활이나 무능한 레기온으로서의 삶이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널 더 값비싸게 넘긴 내게 고마워해라.”

“지금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 조용히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아?! 나는 가주야! 가주라고!”

“그래. 가주지. 허울뿐인 가주도 가주라고 부를 수 있나 싶지만.”

“…….”

“친척 모두가 동의한 일이다. 네가 사라진다 해도 널 걱정하거나 신경 써주는 사람은 없을 테니 안심해라.”

그럴 리 없어.

루미나가 눈을 홉떴다.

“배신자! 어떻게 조카한테 이런 짓을 할 수 있어! 혈연이잖아!”

조제프가 어떤 비난을 들어도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내 덕에 아주 좋은 교훈을 배워가는구나. 원래 가족의 정 같은 건 다 허울뿐이다. 그런 걸 믿다니. 너도 어리긴 어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지만.

루미나는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조제프와 대화하는 동안 제 양팔을 붙잡은 장정들이 방심한 걸 눈치채고 거세게 그들을 밀어냈다.

‘도망쳐야 해. 밖에 나가서 도움을 요청하면…….’

그렇지만 희망은 빠르게 사라졌다.

털썩-.

몇 걸음 가지 않아서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제프는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루미나를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그간 네게 약을 먹여놓기 잘했어. 제 몸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주제에 아등바등하는 꼴이 제법 재밌네.”

“…….”

“변수가 없도록 제대로 처리해.”

루미나의 양팔과 다리가 포박됐다. 장정들이 그녀를 질질 끌고 갔다.

“최대한 빨리 옮기도록. 의뢰인은 그다지 성격 좋은 사람이 아니니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가려졌다.

어둠이었다.

***

“……한없이 연약한 인생을 긍휼히 여기옵소서. 지금 저희는 신의 품으로 떠난 랑슈스 백작 내외의 장례식을 거행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죽은 이후 눈을 떠보니 백작 내외의 비보를 들었던 열두 살의 그날이었다.

과거로 돌아온 것이다.

외숙부를 따르기로 했던 결정은 모두 없던 일이 되었다.

“잘 죽은 거야.”

최선이라 믿었던 선택이 모두 잘못됐다.

그런 삶은 없는 편이 나았다.

루미나는 자신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고모를 봤다.

처음 눈을 떴을 때만 해도 전생을 겪은 게 아니라 단순히 꿈을 꾸고 일어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꿈에서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의 연속이었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어서 고모에게 뺨을 맞게 되자 절대 꿈일 수 없다는 확신이 생겼다.

‘원래는 이 상황에서 아버지와 계모가 잘 죽었다고 했다가 뺨을 맞았었지. 개꿈이면 이렇게까지 똑같을 리 없잖아.’

자신이 겪은 일이 전생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루미나는 제 뺨을 후려친 고모의 뺨을 똑같이 올려붙였다.

“이 미친년!”

“와, 어떻게 아셨어요? 제 별명이 미친년이라는 거요.”

어리숙한 자신의 결말이 그런 식이라면.

“그러게 제가 미친년인 걸 알면 알아서 피했어야죠.”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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