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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최애는 나 (3)화 (3/152)

***

루미나는 수그리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정통으로 뺨을 맞게 된 발레스 부인은 더없는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파들파들 떨었다.

“너, 지금 부모가 죽었으니 네가 가문을 이어받을 거라 생각해서 이러는 거니? 그런 거라면 생각이 참 짧구나!”

“그렇다고 고모님께서 가문을 이끌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네요.”

더는 랑슈스의 성을 쓰지 않는 그녀는 가문 외의 사람이었다.

이제 와서 이혼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가문을 직접적으로 다스릴 리 없다.

“따지고 보면 가주가 될 가능성은 고모님보다는 제가 더 높지 않을까요.”

“…….”

“아, 물론 제 짧은 생각으로 내는 의견이니 아닌 거 같으면 대충 흘려들으세요.”

루미나가 덧붙인 말을 듣자마자 발레스 부인의 혈압이 실시간으로 오르는 걸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반박은 하고 싶은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으니 비웃을 수도 없는 것이다.

얼굴을 벌겋게 붉힌 발레스 부인이 외쳤다.

“우리 도움 없이 얼마나 잘 사나 보자. 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내게 무릎을 꿇고 빌어도 도와주지 않을 거다!”

“고모님께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 살 거예요. 그러니 끝까지 지켜봐 주세요!”

다소 발랄하게까지 느껴지는 루미나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은 발레스 부인이 팽 하고 몸을 돌렸다.

그들의 다툼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 또한 충격에 휩싸인 듯, 입을 가린 채로 저들끼리 빠르게 속삭였다.

“랑슈스 백작님이 괜히 딸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떨었던 게 아니네요.”

“방금 말대꾸한 거 보셨어요? 어린애가 정말 독해요.”

나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듯한데 전부 루미나의 귀에까지 닿았다.

쏟아지는 악의적인 시선, 저들끼리 옮기는 부정적인 말.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채로 루미나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녀의 목적지는 바로 이복동생, 엔디미온의 앞이었다.

마차 사고를 겪은 소년은 다리를 다쳐서 부목을 대고 있었다.

“엔디미온.”

아까는 고모의 뺨을 때리더니 이번에는 엔디미온인가?!

그런 시선으로 다들 마른침을 삼켰다.

이복동생을 부르는 목소리가 제법 나긋했다.

하지만 저 목소리 톤으로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발레스 부인에게 말대꾸하지 않았던가.

고모의 뺨도 때려봤는데 이복동생의 뺨은 더 쉬울 거다.

모두가 자신의 추측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주먹을 쥐고 있던 루미나가 손을 내밀었다.

주먹을 펼친 채로.

“앞으로 잘 지내보자.”

엔디미온이 살갑게 인사하는 루미나를 묘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데면데면하던 이복누나가 갑자기 친한 척하니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뒤늦게 인사를 나누기에는 상황이 썩 좋지 않지.’

평소 루미나는 얌전한 아이였다.

아니, 계모의 압박에 강제로 얌전한 아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제껏 엔디미온한테 먼저 말을 건 적도 없는데 부모가 다 죽고 나서 잘 지내보자니?

엔디미온에게는 선전포고로 느껴질 여지가 있었다.

‘나한테는 썩 좋은 부모가 아니었지만, 본인한테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절한 부모였겠지.’

엔디미온은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아직 열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인 데다 사고 현장에 있었으니 크게 상심한 상태일 거다.

그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 루미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빙긋 웃었다.

서로의 사정을 뻔히 아는데 괜히 마음에도 없는 애도를 했다가는 더 의심만 살 뿐이었다.

엔디미온이 루미나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시선은 제게 내밀어진 손으로 옮겨갔다.

“네. 누님.”

짧게 대답한 엔디미온이 루미나의 손을 잡았다.

얼굴에는 여전히 ‘수상해’라고 적어놓은 채였다.

‘애는 애라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굴에 훤히 적어놓고 다니니 말이다.

루미나는 자신을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삼켰다.

당장은 이른 부탁이었다.

‘차차 알아가겠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엔디미온한테는 가족으로서 도리를 지킬 테니까.’

루미나는 전생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조제프의 간계로 손발이 묶인 채 어딘지 모를 곳으로 이동했을 때였다.

***

덜컹-.

마차에 싣고 가는지 몸이 덜컹거렸다.

루미나는 무력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싼 값에 팔린 무능한 레기온에 대한 얘기는 루미나 또한 익히 알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산다고 했다.

‘레기온이라고 해도 태생은 인간인데 돈 주고 사는 것만 봐도 제정신인 변태는 아니지.’

깜깜한 시야만큼이나 암울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게 점점 실감이 났다.

그때였다.

“습격이다! 다들 멈춰……. 으악!”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들렸다.

쿵!

갑자기 마차가 멈췄다.

루미나는 빠르게 눈을 굴렸다.

‘뭔가 잘못됐어.’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직접 나서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력하게 마차 안에 있을 뿐.

끼익-.

곧이어 마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 안대를 풀어줬다.

어둠을 가르고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엔디미온?’

친부를 쏙 빼닮은 얼굴.

그래서 세월이 흘러도 결코 다른 사람과 헷갈릴 수 없는 그녀의 이복동생, 엔디미온이었다.

설마 외숙부와 한패인가?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척들 모두가 루미나의 처분에 동의했다고 했으니까.

그중 엔디미온이 껴 있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이런 가능성은 금세 불식됐다. 엔디미온이 제법 멀쩡한 루미나의 모습을 훑어보고 눈에 띄게 안도한 것이다.

“어서 도망치십시오.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선뜻 아무런 행동도 못 하고 눈만 깜빡였다.

“가족으로서 도리는 지킨 겁니다.”

가족이라니? 도리라니?

그렇지만 엔디미온은 루미나의 의문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엔디미온이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

루미나는 그제야 그를 제대로 살펴볼 수 있었다.

피를 뒤집어쓴 엔디미온에게 크고 작은 상처가 잔뜩 있었다.

“에, 엔디미온…….”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뺨을 더듬었다.

뺨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바닥을 적시는 온기를 느끼고 있자면 꼭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미 호흡이 멈춘 것과 달리.

멈칫한 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녀를 운송하던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엔디미온 혼자서 이들을 처리한 듯했다.

이곳에서 살아있는 사람은 루미나뿐.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루미나가 멍하니 입을 열었다.

“……왜?”

어째서?

“대체 왜 그런 거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선택했던 숙부에게는 배신당하고, 외면했던 이복동생에게 도움받았다.

“우린 가족이라고 할 수 없었잖아! 그냥 아버지가 같았을 뿐이라고!”

루미나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그 순간 루미나는 자신의 추악한 진심을 투명하게 들여다보게 됐다.

‘엔디미온을 미워했던 거야.’

그동안 크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마음 한편으로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이복동생을 미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엔디미온을 계모와 묶어서 같은 편이라고 여겼다.

그 탓에 제 편이 되어 줄 것만 같았던 외숙부의 손을 잡았던 거다.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

“네가 위험해도 도와주지 않았을 거라고. 그런데 넌…….”

루미나가 둑이 무너진 것처럼 진심을 쏟아냈지만 엔디미온에게서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안 돼. 내가 물었잖아. 그러니 어째서 날 도와줬는지 얘기해 줘야지.”

“…….”

“너만 진실을 알고 있는 채로 가는 거야?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

말도 안 되는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면서도 루미나는 엔디미온을 다그쳤다.

싸늘한 정적 속에서 루미나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루미나의 등에서 나비 날개가 돋아나더니 자그마한 나비들이 떼를 지어 엔디미온을 감쌌다.

반짝이는 나비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라졌다.

눈부신 빛 탓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던 루미나는 보게 됐다.

여전히 피범벅인 채지만, 상처가 모두 사라진 엔디미온을.

대신 루미나가 상처투성이가 됐다. 엔디미온의 상처가 모두 루미나에게로 옮겨진 것처럼 똑같은 자리에 상처가 남았다.

무능한 레기온.

조제프는 루미나를 보며 그렇게 표현했다.

실제로 루미나 또한 자신이 아무런 능력 없는 레기온이라 믿고 살았다.

하지만 능력이 없던 게 아니었다.

공격에 특화된 다른 레기온들과 달랐고, 그 능력이 너무 늦게 발현되었을 뿐이지.

“으윽.”

엔디미온에게서 상처만 옮겨진 것이 아니었다. 찌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죽음에 가까운 고통이었다.

‘그러고 보니 도망치라고 했지.’

하나 도망칠 수 없었다.

긴 시간 동안 외숙부가 복용시킨 독 때문에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조차 버거운데 도망치라니.

이겨낼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루미나가 힘없이 쓰러졌다.

그런데 머리 위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전설로만 남아 있던 치유의 레기온이 진짜 존재했군.”

누구?

흐릿한 시야로 언뜻 중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오랫동안 독에 노출됐나 보군. 원래라면 자가 치유 능력이 있어서 목숨은 건질 수 있었을 텐데.”

세로로 찢어진 동공.

엔디미온을 보지 못했다면 주변 사람들을 죽인 범인이 그라고 믿을 정도로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했다.

“이 정도 능력이면 내 아들을 살릴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모든 게 너무 늦었구나.”

남자는 루미나가 안식을 취할 수 있도록 커다란 손으로 눈꺼풀을 감겨줬다.

하지만 손을 치웠을 때, 루미나의 눈이 감겨 있지 않았다.

삶의 의지를 드러내듯 똑똑히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다.

“살고 싶나?”

루미나는 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였을 거다.

망할 조제프와 친척들이 의기양양할 거라고 생각만 하면 얌전히 두 눈을 감고 죽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서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그것이 생을 마감하기 직전, 루미나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그땐 그 남자가 누군지 몰랐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또렷한 정신으로 차분히 떠올려보니 그가 누군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하트 공작.’

강력한 레기온이자 고위 귀족인 그는 제 잇속을 채우기 바쁜 친척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가문을 지킬 수 있는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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