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4)화 (4/152)

늦은 밤.

무사히 일과를 마친 루미나는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다락방은 이 넓은 저택에서 루미나를 위한 유일한 공간이었다.

사생아도 아닌 그녀가 다락방에서 지내는 건 불합리한 처사였다.

그렇지만 백작 내외는 전 부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그녀와 관련된 물건을 모두 처분했다.

그리고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루미나는 구석으로 밀려났다.

널찍했던 루미나의 방은 날이 갈수록 점점 좁아지더니 끝내 다락방으로 옮겨졌다.

‘사실상 이곳이 날 위한 쓰레기통인 셈이야.’

물론 명목이 있었다.

루미나가 부족한 아이라서 훈육이 필요하다.

그런 말 몇 마디면 모든 일이 정당화됐다.

‘종이, 종이랑 펜을 어디 놨더라. 어두우니까 촛불도 켜야겠다.’

쓸고 닦는 것마저 하인이 아닌 루미나의 몫이었다.

그 탓에 모든 것이 완벽한 저택 내에서 이 방은 유일하게 어수선했다.

이곳저곳을 뒤지던 루미나가 종이와 펜을 겨우 찾아냈다.

그리고 종이 위에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적힌 이름은 바로 하트 공작이었다.

풀 네임은 루키우스 폰 하트.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레기온이면서 공작 위에 앉은 사람.

그리고…….

‘한때 대학살을 저지른 장본인.’

평범한 사람이면 절대 만나고 싶지 않고, 만나서도 안 될 자였다.

별별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그를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나라면 그 사람의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거라고 했지.”

어느새 루미나의 손등에 빛으로 된 나비가 내려앉았다.

상처가 없기 때문인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빛 무리는 루미나의 뜻대로 움직여 줬다.

‘어릴 때는 레기온의 흉내만 낼 줄 아는 무능력자인 줄 알았는데.’

생모 또한 그렇게 생각해서 랑슈스 백작에게 딸이 ‘무능한 레기온’이라는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

어쩌면 하자 있는 딸을 낳았다는 사실로 남편에게 미움받을까 봐 함구했을 수도 있었다.

‘진실이야 어찌 됐든 이젠 나밖에 모르는 비밀이야.’

어릴 적에 몇 번 나비를 불러낸 적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아마도…….’

이제껏 누군가를 살리고 싶어 했던 적이 없는 탓이라고 짐작됐다.

본인도 몰랐던 굉장히 쓸모 있는 능력이었다.

만일 하트 공자의 폭주를 막아주겠다고 하면 하트 가문은 루미나를 위해 무엇이든 해줄 것이다.

‘내가 레기온이라는 사실을 황실에 알릴 수도 있지만, 썩 좋은 방법은 아니야.’

레기온으로 각성하면 황실에 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면 국가 소속 레기온으로 활동하며 국가의 비호를 받게 된다.

게다가 레기온으로서 작위를 수여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상당히 귀찮아진다.

‘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하며 전쟁터를 전전해야 하니까.’

돈이나 명예가 필요하면 레기온으로 각성하자마자 황궁으로 달려가는 편이 나았다.

레기온의 수로 그 국가의 군사력을 가늠할 정도니 극진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루미나에게는 돈도, 명예도 필요 없었다.

‘아니, 돈은 필요하지. 조금. 아주 조오그으음.’

어른이 돼서도 동생한테 손을 벌리는 나쁜 누나는 되기 싫었다.

무사히 독립하려면 사재를 차곡차곡 모아둘 필요가 있었다.

‘미래를 대강이라도 알고 있어서 다행이야.’

미래에 대한 확실한 정보는 돈이 되니까.

이런저런 계획을 글로 써서 정리하던 루미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엔디미온은 친척들에게서 얘기를 듣고 쫓아왔을 테니 자신을 구해 준 게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트 공작은 어째서 그 장소에 있었을까. 도통 알 수 없었다.

‘지나가는 길이라고도 할 수 없었지. 인적이 드문 숲길이었어.’

“살고 싶나? 그렇다면…….”

문득 죽음에 다다랐을 때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게 네 심장을 다오.”

“레기온의 심장…….”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과거로 되돌아온 건 어쩌면 하트 공작 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지만 레기온은 특별하니 그 심장을 취해서 무슨 짓을 했을 수도 있었다.

하트 공작이 시간을 되돌렸을 가능성? 그 또한 미래를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꼬이는 여러 가지 가정을 끄적거리다가 그 위에 줄을 좍좍 그었다.

어떤 변수가 있더라도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루미나는 곧 활자가 빼곡히 채워진 종이를 촛불에 갖다 댔다.

화르륵-.

흔적도 남기지 않고 종이가 타들어 갔다.

***

늦은 오후, 루미나는 엔디미온의 방 문을 두드렸다.

“엔디미온, 들어가도 될까?”

엔디미온을 불렀건만. 어째서인지 문 너머에서 “루미나?!” 하는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님이 먼저 와 계셨네.’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지 대충 짐작이 갔다.

들어오라는 허락을 듣고 루미나가 문을 열었다.

“그래. 내 말 허투루 듣지 말고 회복하는 동안 잘 생각해 보거라.”

“네, 알겠습니다.”

루미나의 등장으로 고모는 엔디미온과 나누던 대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찌릿.

루미나를 노려본 고모가 더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인사할 틈도 주지 않고 걸어가는 그녀를 뒤로하고, 루미나가 생글생글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방해한 걸까?”

“아닙니다. 대화가 끝나가던 참이었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필요 이상으로 각이 잡힌 존댓말. 열 살짜리 소년이 쓸 말투는 아니었다.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게 된 사람이 루미나가 아니라 엔디미온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보다…….”

“난 상관없으니 편하게 있어.”

엔디미온은 어색하게 침대에 앉아 있었다. 왠지 고모와 있을 때보다 더 불편해하는 듯했다.

‘엔디미온은 마차 사고 이후 치료 중이었지.’

장례식 전에 어찌어찌 정신을 차렸지만, 아직까지 거동이 불편했다.

그래서 제게 집적대는 친척들을 튼튼한 다리로 요리조리 피하는 루미나와 달리 엔디미온은 그들의 방문을 일일이 받아들여야 했다.

“…….”

“…….”

어색한 침묵 속에서 루미나는 주변을 훑어봤다.

문고리가 닳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친척들이 오갔는지 이질적인 물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생화가 꽂힌 꽃병만 해도 여럿이고, 평범한 열 살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이나 간식도 있었다.

그러다가 쿠키 통을 발견했다.

“먹어도 될까?”

외숙부 조제프는 루미나와 대화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그런 그를 피해 다니느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한 탓에 공복이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워낙 받은 선물이 많아서 한두 개쯤 먹어도 티가 나지 않을 것 같아 물었다.

엔디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미나는 초콜릿 칩이 잔뜩 박힌 쿠키를 한 입 먹었다.

‘윽.’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엔디미온이 먹지 않고 쌓아두기만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고모님도 그렇고, 친척분들께서 네게 신경을 많이 쓰시나 봐.”

“네, 자주 찾아오십니다.”

엔디미온이 숨김없이 깔끔하게 대답했다.

엔디미온은 그런 아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무뚝뚝하고 어른스러웠다.

그렇다고 진짜 어른인 건 아니지만.

루미나는 엔디미온을 빤히 쳐다봤다.

묻고 싶은 질문이 많았다.

어째서 넌 나를 외면하지 못했니?

나는 너를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넌 왜 죽음을 각오하면서까지 도리를 지킨 거야?

열 살의 엔디미온은 대답하지 못할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열었을 때는 전혀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넌 가주가 되고 싶어?”

“……잘 모르겠습니다.”

빙빙 돌지 않고 본론을 훅 치고 들어오자 엔디미온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소년이 얼떨떨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았으니 바로 대답하기 어렵겠지.”

루미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엔디미온은 이상한 걸 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장례식에서 보여줬던 그 표정이었다.

“그런데 네가 가주가 돼야 한다고 친척들이 부추겼을 텐데 정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어?”

루미나와 엔디미온.

두 사람 중 누가 가주가 된다 해도 친척들에게서 완전히 독립할 수 없었다.

‘내가 열다섯만 됐어도 친척들을 아예 무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열두 살과 열 살.

보호자가 필요하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 나이였다.

“그걸 어떻게…….”

“네가 고모님께 받은 제안을 나는 외숙부한테 받았으니까.”

“…….”

“친척들은 지금 누굴 자신의 꼭두각시로 내세울지 계산하느라 바빠. 우리같이 어린 애들은 다루기 쉬우니까 좋은 먹잇감이라고 생각하겠지.”

평균 열한 살의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치고는 어두운 얘기였다.

하지만 루미나는 엔디미온이 대화 주제를 회피하거나 멍청하게 입만 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들 영재라고 칭찬할 만큼 똑똑한 아이였으니까.

“아, 나는 외숙부의 제안을 거절할 거야. 다른 친척이 비슷한 제안을 해도 마찬가지고.”

엔디미온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 또한 고모의 제안을 거절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라고 받아들인 듯했다.

“일단 나는 그럴 거니까 너는 네 마음대로 해.”

“고모님의 제안을 수락하라는 의미입니까?”

“그것도 네 마음이지.”

루미나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가뜩이나 루미나를 싫어하는 고모님인데 한편이 돼도 상관없다니.

엔디미온은 루미나의 속내를 도통 읽을 수 없는 듯했다.

“왜 이런 얘기를 제게 하는 겁니까. 누님께서는 저를 싫어하지 않습니까.”

루미나가 직진으로 나오니 엔미디온 또한 굳이 돌려 얘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모양이다.

순간 목이 꽉 막힌 루미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만약 내가 네 친모여도 그렇게 말할 거니?”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계모는 꼭 그런 식으로 루미나의 말문을 막았다.

“너한테는 함부로 말을 못 하겠구나. 무슨 말을 해도 한번 꼬아서 받아들일 테니까.”

언제나 다그치기만 하던 계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한 번 죽기 전에는 그 목소리가 떠올라서 저도 모르게 장례식장에서 ‘잘 죽었다’라고 했었다.

“싫어하지.”

가족을 믿지 않았다.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꼭 계모뿐만 아니라 친모도 마찬가지였다.

“루미나, 내가 널 품고 있었을 때도 네 아비는 곁을 지켜준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더러운 집으로 기어들어갔지.”

“…….”

“결혼은 나와 한 거야!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 엄마.”

“너와 나보다 언제나 그 자식들이 먼저였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내가 먼저 널 낳았는데!”

살아생전 친모는 루미나의 어깨를 으스러질 정도로 잡으며 윽박질렀다.

그러다가 제 힘에 부쳐서 “넌 왜 그이를 닮지 못한 거니.”라고 흐느꼈다.

그런 기억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외숙부와 친척들에게 뒤통수를 맞을 운명이니까.

가족에 대한 불신만 가득 찬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대가 풀어졌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스미던 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더는 존재하지 않는 일이 됐다 하더라도.

“우린 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진짜 가족이니까. 더는 미워하지 않기로 했어.”

루미나는 한 번만 더 가족을 믿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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