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의 솔직한 대답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한 채로 한참 침묵하던 엔디미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님께서는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고 싶지 않습니까?”
“별로. 그런 거에 흥미 없어.”
아무리 약 때문에 멍청해졌다고 하지만 조제프에게 제대로 휘둘리며 살았다.
껍데기뿐인 가주.
루미나에게는 최악의 기억이었다.
그런데 가주가 되겠다는 말이 선뜻 나올 리 없었다.
“앞으로 나는 절제와 청렴을 아는 사람이 되기로 다짐했거든.”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의 근원은 엔디미온이었다.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했지만, 웃음소리를 똑똑히 들은 루미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설마 웃긴 농담이라고 생각한 건가?
하지만 루미나는 진지했다.
사치를 부리다가 망했으니 더 이상의 사치는 사양이었다.
다만 열 살 엔디미온이 보기에 루미나는 한 번도 사치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새삼 절제를 외치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머쓱해진 루미나는 입맛에 맞지 않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으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엔디미온의 방은 사소한 것마저 다 최고로 꾸며놨네. 그런데 창밖 풍경이 별로야.’
객관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박한 평가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의 사치로 인해 눈이 잔뜩 높아져 성에 차지 않았다.
“누님의 말을 듣고 있자면 제가 어떻게 행동하든 결과는 정해진 것처럼 들립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엔디미온의 질문을 똑똑히 들었다.
그러나 루미나는 여전히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딴소리를 했다.
“일이 잘 풀리면 정원부터 갈아엎을까. 이제 보니 유행이 한참 지난 거 같아.”
“…….”
“한동안 치료에 전념하느라 멀리 나가지 못할 거 아냐. 그럴 때 정원이라도 화사하면 기분 전환이 될 거야.”
“방금까지 절제를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원을 갈아엎는 데 예산이 어마어마하게 들 겁니다.”
“나한테 쓰는 돈을 절제하겠다는 거지. 내 사람한테 쓰는 건 아끼지 않을 거야.”
“……제가 누님의 사람입니까?”
“응, 가족이잖아.”
고개를 돌려 엔디미온과 눈이 마주친 루미나가 싱긋 웃었다.
안타깝게도 열 살의 엔디미온은 루미나와 가족의 도리를 지키려는 마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여전히 믿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날 구해줬을 때 나도 저런 표정을 지었겠지.’
그러니 서로 비긴 거다.
***
장례식을 치르고, 어느 정도 정리가 됐지만 친척들은 저택을 떠나지 않았다.
고인을 애도하기 위해 며칠 더 남아 있겠다고 핑계를 댔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사람은 없었다.
루미나와 엔디미온을 어떻게 할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백작 내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유서마저 없으니 남은 건 탐욕스러운 친척들뿐이었다.
직접적인 상속권을 가진 두 아이가 미적거리니 친척들은 매일 물 밑에서 싸워댔다.
‘엔디미온은 환자라서 어른들을 상대하기 피곤할 텐데……. 예상보다 잘 버텨주고 있네.’
엔디미온에 비하면 루미나는 평온한 축에 속했다.
고모의 뺨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친가 쪽 사람들이 루미나의 그림자를 밟는 것마저 꺼려 한 탓이었다.
하지만 어디에나 끈질긴 사람은 있는 법.
“루미나, 이 숙부와 얘기 좀…….”
“루미……!”
“루……!”
바로 외숙부, 조제프였다.
“진짜 싫어!”
집착이 아주 스토커급이었다.
그는 루미나와 말 한 번 나누기 위해 집요하게 쫓아다녔다.
조제프와 비슷한 머리카락 색만 봐도 경기를 일으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대로라면 내가 외출할 때도 같이 가자고 하겠지.”
그리고 예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루미나, 어딜 그리 급하게 가려는 거냐?”
슬금슬금 제게로 다가오는 조제프와 마주하자니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루미나는 조제프의 양 뺨을 한 번씩 때리고, 주먹으로 명치를 내리친 뒤 발로 뻥 차서 밀어버리고픈 충동에 시달렸다.
‘그랬다가는 숙부가 지금처럼 포섭하려 드는 게 아니라 강압적으로 나올 수 있어.’
다시금 집착당하고 나니 어떤 방법으로든 랑슈스 가를 집어삼키려는 조제프의 야욕을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아, 숙부님. 그게…….”
“세상에. 옷이 이게 뭐냐! 지나가는 비렁뱅이 옷을 빌려 입은 거 같구나.”
루미나가 말끝을 흐리자 조제프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루미나가 또 도망칠까 봐 서두른 것이다.
하지만 조제프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다. 다락방에서 지내는 만큼 옷도 꼬질꼬질했다.
“죄송해요. 있는 옷이 이런 것밖에 없어서. 그렇게 형편없나요?”
“누님이 죽고 대충 예상은 했지만 백작 내외께서 네게 영 신경을 안 쓰신 모양이구나.”
조제프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로 루미나의 손을 덥석 잡았다.
순간 생리적인 혐오감이 고개를 들었다.
‘실수로 양 뺨을 한 번씩 후려치고, 주먹으로 명치로 내려친 뒤에 발로 정강이를 걷어찰 뻔했잖아. 잘 참았다. 나!’
아무리 없던 일이 됐다고 하지만 기억이 선명했다.
조제프를 몇 대 때린다고 해서 해소될 원한이 아니었다.
‘나를 실컷 이용해먹었지. 그러니 나도 단물만 쪽쪽 빨고 버릴 거야.’
루미나의 속내도 모르고 조제프가 말했다.
“너만 한 딸이 있어서 네 또래 여자애들의 취향을 잘 알고 있지.”
“…….”
“마침 네게 할 얘기도 있으니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갔다 오자꾸나.”
“정말…… 그래도 될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둥글둥글하고 순한 루미나의 외모 덕에 한층 안쓰럽게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역시 장례식장에서 봤던 독기는 기우였군.’
아이의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서 충동적인 행동을 저질렀구나.
아직 어리니 그럴 수도 있지.
조제프가 보기에 루미나는 부끄럼이 많고 숫기 없는 아이였다.
한동안 저를 열심히 피해 다니던 것만 봐도 그랬다. 또한 세상 물정을 모르니 몇 마디 말에 금방 넘어오지 않는가.
“그럼, 괜찮고말고.”
드디어 기회를 얻은 조제프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동안 피해서 안달 나게 했더니 알아서 자리를 마련해 주네.’
저택 내에서는 아직 고인을 애도하는 분위기인 터라 외출하기 힘들었던 참이었다.
루미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이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요.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루미나가 조심스러운 태도로 드레스를 가리켰다.
루미나의 손짓에 따라 점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건 사치가 아니다! 나쁜 놈의 금고 탕진이다!’
질끈!
루미나가 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엔디미온에게 절제와 청렴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한 지 얼마나 됐다고 돈을 물 쓰듯 쓰고 있었다.
그 탓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던 세모난 양심이 데굴데굴 구르는 중이었다.
그 양심은 곧 동그라미가 될 예정이었다.
“꼬마 아가씨께서 안목이 참 좋으시네요.”
지켜보던 부티크의 직원이 칭찬처럼 한마디 했다.
막 고르는 것처럼 보여도 루미나가 값비싼 옷만 쏙쏙 골라서 집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에게 전혀 안 어울린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가격표가 달려 있어서 직접 확인하고 고른 건 아니었다. 귀족들이 오가는 부티크에 그런 게 있을 리가.
돈을 물 쓰듯 쓰다 보니 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가격이 보이는 능력이 생겼을 뿐.
차마 열두 살 조카 앞에서 돈에 쪼들린다는 얘기는 하지 못하고, 억지로 웃던 조제프의 얼굴 근육이 점점 마비되고 있었다.
“루미나, 이건 좀…….”
슬슬 한계라는 걸 느끼는 모양이었다.
조제프가 운을 띄웠다.
지금도 자존심 탓에 오래 버틴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조제프의 사정이었다. 벌써 조제프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루미나가 선수를 쳤다.
“앗, 설마 저 때문에 무리하고 계신 걸까요? 숙부님이랑 있으니 마음이 편해진 탓에 제가 그만 실례를 저질렀나 봐요.”
루미나가 애처롭게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계셨다면 이런 느낌일 거 같아서…….”
“…….”
“헉. 죄송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소리를.”
입이 방정이라는 듯, 루미나가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에 당혹감이 번졌다.
“네 마음은 이해한다. 고인이 된 사람한테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백작한테는 아쉬운 점이 많았겠지.”
라고 조카의 등을 쳐먹는 거짓말쟁이가 말했다.
“우린 가족이 맞으니 편하게 생각하렴.”
조제프의 입가에 절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현재 루미나의 태도는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아이의 환심을 사면 가문을 꿀꺽할 수 있는데 그깟 드레스 몇 벌 살 돈이 대수인가 싶었다.
“아버지한테 조르는 거처럼 사달라는 말도 마음껏 하고.”
아, 그러시겠죠.
‘내가 황금 동아줄로 보일 테니까.’
“정말요? 너무 기뻐요! 제겐 숙부님밖에 없어요!”
하하호호.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본 채로 웃으며 새카만 속내를 숨겼다.
***
‘외숙부의 지갑도 알차게 털어먹었고. 이제 슬슬 일어나볼까.’
출혈이 큰지 조제프의 낯빛이 살짝 창백했다.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딱 봐도 제 딸에게도 이만한 거금은 써 본 적이 없는 티가 났다.
“잠깐 자리를 비워도 괜찮을까요?”
부끄러운 척하니 눈치 빠른 부티크 직원이 화장실을 가고 싶어 한다는 걸 단번에 알아들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조제프는 루미나가 제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불만이었다.
그렇지만 화장실까지 졸졸 따라다닐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줬다.
쫄래쫄래.
루미나는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이 상황을 타개할 적절한 구실을 발견했다.
‘아, 저기 있다.’
복도를 장식한 화병이었다.
화병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루미나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며 그것을 밀쳐서 떨어뜨렸다.
와장창-.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화병이 깨졌다.
“어머, 괜찮으신가요?”
루미나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 조각에 손을 대려고 하자 직원이 황급히 저지했다.
“그러다가 손이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유리 조각은 제가 치울 테니 걱정 마시고, 일단 볼일부터 보고 오세요. 저쪽이랍니다.”
“네, 네.”
직원이 빠르게 사라지고, 루미나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며 우다다 후문으로 달려갔다.
‘몇 번 와 본 곳이라 후문 위치 정도는 이미 알고 있지.’
손쉬운 방법으로 외숙부 몰래 거리로 나왔다.
이제 문제는 다음이었다.
‘하트 공작을 찾아가야 해. 소문에 따르면 이 근방에서 그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 전에 자신의 도주를 눈치챈 조제프가 찾으러 올까 봐 걱정이었다.
그리고 걱정은 곧 현실이 됐는데, 험상궂은 남자들이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설마 외숙부가 고용한 사람들인가?’
곰곰이 떠올려보면 조제프는 불법적인 일에도 손을 댔다.
말로는 둘이서만 오자고 했지만 사람을 붙여놨을 수도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골목 사이를 요리조리 돌아다녔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루미나는 누가 봐도 자신을 찾고 있는 조제프를 발견했다.
헉.
헛숨을 들이쉰 루미나가 벽에 바싹 붙었다.
다행히 저쪽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조금만 더 가면 되는데! 이러다가 공작을 만나기 전에 외숙부한테 들키고 말 거야!’
루미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였다.
“찾았다.”
누군가가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