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무게 중심이 앞으로 기울었다.
그대로 상대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루미나는 어리둥절해졌다.
“한참을 너만 찾아다녔잖아.”
“……누구?”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는 탓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목소리나 전체적인 체격을 보면 루미나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소년이었다.
그리고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었다.
열두 살의 루미나가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나를 아는 척하는 거지?’
루미나가 어떻게든 상대의 얼굴을 보려고 후드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소년이 루미나의 뒤통수에 손바닥을 갖다 대고 부드럽게 밀어냈다.
얼떨결에 소년의 가슴팍에 또다시 코를 박게 된 루미나는 당혹스러웠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고개 들지 마.”
소년이 낮게 속삭였다.
누가 오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외숙부, 조제프.
그를 가리키는 거다.
혹여나 조제프가 목소리를 알아들을까 봐 숨조차 죽였다.
뚜벅, 뚜벅.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로 주변이 시끄러운데 누군가의 구두 굽 소리만큼은 선명했다.
흠칫.
루미나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자 소년이 힘주어 안아주었다.
그리고 씩씩대며 근처를 지나가던 조제프가 두 사람을 힐끔거렸다.
‘생긴 것도 얌전하고 고분고분 굴길래 별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도망을 쳐?’
얌전한 고양이가 먼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갑자기 루미나가 사라졌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무작정 주변을 돌아다니던 조제프는 밀색 머리카락을 봤다.
저보다 큰 소년에게 폭 안겨 있어서 얼굴은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복장도 비슷한 듯했다.
‘설마?’
직감이 외쳤다.
루미나라고.
유심히 보려고 하자 후드를 뒤집어쓴 소년이 날카롭게 그를 노려봤다.
저보다 훨씬 어린 아이와 시선이 마주친 것뿐이었다.
그런데 오금이 저렸다.
본능적으로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걸 느낀 조제프는 결국 루미나일지도 모르는 아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갔어?”
조제프가 떠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전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있는 채였다.
“이제 안 보여.”
루미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소년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조제프는 보이지 않았다.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너무 두리번거리지 마. 주변에서 수상하게 여기니까.”
소년은 자연스럽게 루미나의 어깨 위에 팔을 얹었다. 루미나는 소년과 바싹 붙게 됐다.
퍽 친근해 보이는 행동이었다.
초면인 사람한테 당하기에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얼빠진 표정 하지 말고 아는 사이인 척해. 너도 쫓기는 몸 아니었어?”
“아.”
루미나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문득 머리 위로 등이 번뜩인 기분이었다.
“그러니까 너도 쫓기는 몸인데 들키지 않으려고 아무나 붙잡은 거지? 지금 우리는 일종의 동업자 관계인 거네?”
“……그래. 비슷한 처지인 것 같아서 도와줬어.”
“고마워. 의도야 어찌 됐든 덕분에 살았어.”
루미나는 언제 어리숙했냐는 듯이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깔끔하게 정리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면 되는 거야?”
소년과 더없이 친한 사이인 것처럼 굴면서 루미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일단 네가 가야 하는 곳으로 가 봐.”
명령처럼 오만한 말투였다.
순간 뭐 하는 녀석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쪽도 상황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니었기에 루미나는 순순히 목적지를 향해 걸어갔다.
동업자도 있으니 아주 든든했다.
‘아직까지는 순조로워.’
우연히 만난 소년 덕에 무사히 위기를 넘긴 걸 포함해서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왠지 앞으로도 잘될 것 같다고 생각한 루미나는 소년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보고 싶으면 훔쳐보지 말고 당당하게 쳐다봐.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참지 말고 하고.”
너무 쳐다봤나 보다.
결국 한마디를 듣고 말았다.
“너는 어디로 가는 길이었어?”
한 번 보고 말 사이였다.
이름을 알려달라거나 얼굴을 보여달라는 부탁은 눈치껏 하지 않았다.
다만 어디로 도주 중이길래 마음대로 가도 된다고 하는지 궁금해졌다.
“아무데나.”
대화 몇 번으로 소년이 싹퉁머리 없는 성격이라는 걸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대답은 유독 성의가 없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은 없으니까. 그 사람 근처만 아니면 돼.”
그 사람?
순간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볼 뻔했다.
하지만 단발적인 만남인 만큼 서로 깊게 파고드는 건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난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여기서부터는 따로 가지.”
소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언제 친했냐는 듯이 루미나가 후다닥 거리를 벌렸다.
루미나의 빠른 태세전환에 소년이 짧게 웃은 것도 같았다.
“고마워. 너도 하는 일이 잘 해결되길 바랄게.”
루미나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 소년이 루미나를 붙잡았다.
“잠깐.”
“응?”
소년은 단단히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서 루미나에게 씌워줬다.
문제는 시야가 가릴 정도로 후드를 꽁꽁 씌워준 탓에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토르티야에 잘 싸인 부리토가 된 기분이야.’
후드를 쓰기 직전, 소년의 얼굴을 잠깐 볼 수 있었다.
스치듯 봤어도 제법 기억에 남을 만한 미모였다. 어른이 되면 여럿 여자들이 가슴앓이를 할 만한.
그렇지만 눈 한 번 깜짝하지 않은 루미나가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너도 쫓기는 몸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나한테 겉옷을 줘도 되는 거야?”
“그런 옷차림으로 혼자 돌아다니면 길을 잃은 귀족 아가씨라고 생각할걸. 헤어지자마자 잡히는 꼴을 보려고 여기까지 동행한 거 아니야.”
역시 싹퉁머리 없는 소년이었다.
“쓰고 다녀.”
“…….”
“별거 아니야. 친근한 연기를 훌륭하게 한 보답이라고 생각해.”
소년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목소리만 들었을 때, 쑥스러움이 느껴졌다.
‘타인한테 호의를 베푸는 데 익숙하지 않구나.’
투덜거리는 듯해도 결국 부담 갖지 말라는 의미였다.
제 몸보다 큰 망토를 입고 거대한 부리토가 된 루미나는 씨익 웃으며 “그래.”라고 대꾸했다.
***
딸랑-.
청명한 종소리와 함께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 뭐야. 꼬마잖아.”
주점과 여관을 같이 운영하는 주인은 오늘 처음으로 온 손님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실망했다.
돈은 제대로 낼 수 있을까 싶은 작은 체구였다. 절대 성인일 리 없었다.
깊게 눌러쓴 검은 후드를 벗자, 기다란 밀빛 머리칼과 반짝이는 분홍 눈동자가 드러났다.
제대로 못 먹고 자랐는지 삐쩍 마르긴 했지만 제법 순해 보였다.
깔끔한 걸 보니 사랑은 못 받고 자랐어도 돈깨나 있는 집안인 듯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무리 잘 쳐 줘봐야 열 살쯤 될 것 같은 어린아이였다.
“아이야, 부모님을 찾고 있니? 안타깝지만 이곳은 파리만 날려서 네 부모를 찾을 수 없단다.”
구석진 곳에 위치한 작은 가게인데 어떻게 찾아온 건지.
금방 흥미를 잃은 주인장이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하지만 주변을 쓱 둘러본 소녀는 당당하게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의자가 높은 탓에 조금 힘겨워 보이긴 했지만.
“칼바도스 씨를 만나러 왔어요.”
칼바도스.
사과주를 증류해서 만든 브랜디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아는 사람만 아는 하트 공작의 가명이기도 했다.
“칼바도스? 브랜디를 마시고 싶으면 부모님 허락 받고 와라.”
“그분께서는 직원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나 봐요. 평범한 사람이면 브랜디를 사람처럼 부르지 않죠. 그것도 이런 가게에서.”
어린아이답지 않은 여유였다.
외모 탓에 잠깐 방심했던 주인장이 경계했다.
“어디서 그 이름을 주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너 같은 애가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루미나가 주인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가 레기온이라면요?”
“그러면 제대로 된 절차를 밟고 등록하러 가야지.”
레기온이라는 말을 듣고도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레기온이 발에 채는 돌멩이도 아니고.
본인이 레기온이라는 주장을 모두 믿었다면 개나 소나 레기온이 됐을 거다.
“제가 레기온이라는 사실을 황실에 밝히고 싶지 않기 때문에 칼바도스 씨를 찾아온 거예요.”
“대체 그 이름은 어디서 들은 거니.”
“출처는 밝힐 수 없어요. 다만 그분께서 저 같은 레기온에게 관심이 많다는 얘길 듣고 찾아왔다는 것만 알아주세요.”
“레기온에 관심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번지수를 잘못 찾았구나. 누구의 사주를 받고 왔는지만 순순히 말하면…….”
“그리고 저는 치유 능력이 있는 유일한 레기온인걸요.”
주인장이 입을 다물었다.
치유 능력이 있는 레기온.
그 말을 듣고 그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루미나를 사기꾼 보듯 봤을 뿐이다.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생각이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난다고!’
바로 믿어 줄 리 없다는 건 예상했지만, 직접 보니 조금 상처였다.
“네가 그런 능력이 있는 레기온이라고?”
“네.”
“아휴.”
주인장이 의미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허리를 숙였다.
칵테일 바 밑으로 주인장이 사라졌다.
“어린아이한테는 나쁜 짓을 하고 싶지 않은데. 어쩔 수 없지.”
‘칼이라도 꺼내나?’
꿀꺽.
루미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곧이어 주인장이 무언가를 꺼내서 쾅! 하고 내려놓았다.
바로.
“유리구슬?”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유리구슬이었다.
“여기에 손을 얹어 봐.”
“이게 뭔데요?”
“간이 측정기야. 네가 레기온이면 반응하겠지.”
평범한 술집에 있을 법한 물건이 아니었다. 역시 제대로 찾아온 것이다.
“레기온이 아니면요?”
“아무런 반응도 없을 거고, 꼬마는 바로 쫓겨나는 거지. 레기온이라고 굳게 믿는 네 동심도 박살 날 거고.”
가게 주인은 “한참 꿈 많은 어린아이한테 이런 잔인한 짓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라고 중얼거렸다.
반면 루미나는 심각했다.
쫓겨난 후에 하트 공작이 자신의 뒤를 밟을 테니까.
‘뒷조사를 하겠지. 나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고모의 사돈의 팔촌의 할아버지까지 정보가 싹 다 털려서 하트 공작한테 넘어갈 거야.’
이곳까지 와서 ‘칼바도스’라는 이름을 꺼낸 이상 루미나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더는 지체하지 않고 유리구슬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주인장의 표정이 해괴하게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