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7)화 (7/152)

루미나의 손이 닿자 유리구슬이…….

“레기온이라고 하지 않았나?”

잠잠했다.

주인장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려고 하는데 속마음이 드러났다.

봐봐, 그럴 줄 알았어.

누가 봐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든 안타까움도 표하고 싶어 해서 그 표정이 참 해괴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아? 일단 난 레기온이 맞는데!’

하다못해 유리구슬이 미세하게 움찔거리기라도 했다면 이렇게까지 동정받지 않았을 거다.

루미나는 이런 검사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차라리 능력을 보여주는 편이 얘기가 빠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감이 점점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쪼그라들던 그때였다.

파직-.

유리구슬에 금이 갔다.

그리고 번쩍이더니…….

“……깨졌는데요?”

“어? 그럴 리 없는데.”

“하지만 깨졌는걸요.”

현실을 부정해도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황급히 유리구슬에서 손을 뗀 루미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주인장을 쳐다봤다.

“잠깐, 잠깐만…….”

넋이 나간 그는 맨손으로 유리 조각을 잡았다.

“아야!”

곧바로 유리가 따끔하게 주인장의 손가락을 찌르며 피가 났다.

그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물리려고 했다. 루미나가 그걸 덥석 잡았다.

“잠깐만 얌전히 있어 보세요.”

전생이면 몰라도 지금은 실제로 사람을 치료해 본 적이 처음이라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웃음기 없이 말한 루미나가 능력을 썼다. 다행히 능력을 쓰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빛으로 된 나비가 상처 주변에 잔뜩 모였다. 잠시 후, 나비가 사라졌을 때는.

상처는 깔끔히 나아 있었다.

바로 앞에서 기적을 목도한 주인장은 얼마나 눈을 크게 떴는지, 당장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지지진짜 레기온?”

“네. 계속 말씀드렸잖아요.”

얼마나 말을 더듬는지 덜덜 떨고 있는 것 같았다.

주인장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게 말이 돼?”

그는 서둘러 가게 문을 닫으며 기다리라고 했다.

“그 자리는 의자가 높아서 불편하잖니. 저기 테이블 중에 아무 데나 앉아 있으렴.”

루미나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는 이제 루미나가 떠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의자에서 폴짝 내려온 루미나는 아까보다 앉기 훨씬 편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아, 그래. 좋아하는 음료는?”

“네?”

“우유라도 따뜻하게 데워서 줄까? 아가씨 입맛에 맞을 만한 차는 없고, 다 술뿐이라 그나마 있는 게 우유뿐인데…….”

“그러면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꿀도 잔뜩 넣어주지! 어디 가지 말고 마시면서 기다리렴.”

힐끔힐끔 루미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조금 전과 굉장히 상이한 태도였다.

“그러면 잠깐만. 아주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라. 어디 가지 말고!”

가지 말라는 얘기만 여러 번 들었다. 주인장이 헐레벌떡 나갔다.

순식간에 가게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흐음.”

루미나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주인장의 손가락에 있던 상처가 그대로 루미나에게 남았다.

“역시 봤던 대로야.”

엔디미온의 상처를 치유하자 그 상처가 모두 자신에게로 옮겨온 것처럼.

사실상 치유보다는 전이에 가까운 능력이라고 느껴졌다.

“이 정도 상처면 금방 낫겠지.”

제대로 못 먹고 자라긴 했어도 루미나는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였다.

상처가 났을 때 따로 연고를 바르지 않아도 남들보다 상처가 일찍 아물었다.

‘흔한 잔병치레도 없었으니까 작은 상처로 하트 공작을 만나게 된 건 완전 이득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맛을 볼 수 있을 만큼만 우유를 홀짝 마셨다.

“너무 달아.”

꿀을 얼마나 넣었는지 혀가 아릴 정도로 달았다. 우유보다 꿀이 더 많은 기분이었다.

인상을 찌푸린 루미나는 우유를 살짝 밀어냈다.

그리고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전생에서 봤던 것보다는 젊은, 아버지뻘 되는 남성이 가게로 들어왔다.

“너는.”

그리고 루미나를 보자마자 놀란 듯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크다.’

루미나는 제게로 다가오는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봤다.

180cm는 당연히 넘고, 대략 190cm는 되는 듯했다.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아우라만 놓고 보면 여러 사람들을 머리만 내놓은 채로 땅에 묻고, 좁은 상자 안에 넣어서 그대로 바다에 던져버릴 것 같았다.

한마디로 어느 범죄 조직의 대장을 맡고 있을 것 같다는 뜻이다.

그런 남자가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우유나 마시고 있는 소녀한테 다가간다?

열에 열은 무조건 겁에 질려서 ‘으앙!’ 하고 큰 소리로 울음을 터트릴 만한 일이었다.

하다못해 건장한 성인 남성마저 ‘히익!’ 기겁하며 뒷걸음질 칠 테니 말이다.

루미나의 바로 앞에 선 남자, 루키우스 폰 하트는 루미나를 유심히 살펴봤다.

뭔가 아는 눈치였다.

‘설마…….’

공작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허무맹랑한 가정이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빠르게 뛰던 그때.

드디어 루키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 옷은 어디서 났지?”

“옷이요? 친척분이 사줬어요.”

“아니, 그 옷 말고 겉옷.”

“이것도 받은 거예요.”

“누구한테?”

어째서인지 취조당하는 범죄자가 된 기분이었다.

실제로 범죄자 같은 인상은 루미나가 아닌 루키우스 쪽인데 말이다.

루미나는 머릿속으로 별별 가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예상하지 못한 터라 곧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차라리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은가?’라는 고전적인 멘트를 날렸다면 수월하게 대답했을 거다.

잠깐의 침묵으로 정신을 차린 건지 루키우스는 그만하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 아들이 딱 그만한 사이즈의 옷을 입어서 나도 모르게 물어봤군.”

“그런가요?”

“그래, 그래서…….”

쾅!

“네가 그 레기온이라고?”

‘깜짝이야.’

그냥 평범하게 레기온이냐고 물으면 될 것을 루키우스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테이블이 두 동강 났다.

검으로 내리친대도 이보다 더 깔끔할 수 없었다.

‘설마 입 한번 잘못 놀리면 나를 테이블처럼 대하겠다는 선전포고인가……?’

하트 공작의 성격이 좋지 않다는 것쯤은 익히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전생에서 만났을 때는 특수한 상황이었기에 그 성격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는 것 또한.

그렇지만 초면에 테이블부터 부숴버릴 줄 몰랐다.

“대장,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인데 과격한 행동은 자제하는 게…….”

‘대장?! 진짜 대장이었어?’

가게 주인이 뒤늦게 루키우스를 말렸다.

“많아 봐야 열 살밖에 안 된 애잖아. 게다가 소중한 레기온이니 조금 인상을 펴고 얘기하는 편이…….”

“죄송한데 한마디만 해도 되나요?”

루미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루미나에게 쏠렸다.

“저는 열두 살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어린아이처럼 대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물론 두 분의 나이가 되면 열 살이나 열두 살이나 엇비슷해 보이겠지만요.”

앞으로 해야 할 얘기에서 루미나의 나이는 중요한 주제였다.

그래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루미나가 공포로 얼어붙어 있을 줄 알았던 가게 주인은 넋이 나갔다.

“아, 꼬마 아가씨도 레기온이었지.”

그러다가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저렇게 태연히 말할 수 있다니. 역시 레기온이었다.

“브랜든, 둘만 얘기하고 싶으니 나가 있어라.”

가게 주인, 브랜든이 조금 전만 해도 멀쩡했던 테이블을 멀거니 쳐다보다가 떠났다.

그 모습이 굉장히 슬퍼 보였다.

“자리를 옮기지.”

“네!”

테이블이 두 동강이 나면서 우유 또한 바닥을 처참하게 만들었다.

때문에 비교적 깔끔한 구석 자리로 옮겨 앉았다.

커튼까지 완벽하게 닫아놔서 낮인데도 실내가 어두웠다.

어쩐지 수상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다시 묻지. 네가 치유 능력이 있는 레기온인가?”

“네, 맞아요.”

루미나는 어둠도 몰아낼 만큼 방실방실 웃으며 대꾸했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이 망할 조제프와 친척들을 무너뜨릴 최고의 무기였다.

첫인상은 최대한 좋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최선을 다해 웃는 중이었다.

“능력은 얼마나 사용할 수 있지?”

“한계까지 사용해보지 않았어요.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든 레기온이든 가리지 않고 어떤 상처도 치료할 수 있어요.”

“죽은 사람은?”

“……못 살려요.”

“그렇단 말이지. 나에게도 능력을 보여줄 수 있나?”

“네.”

대답을 듣자마자 루키우스가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엄지를 가늘게 그었다.

‘실수하면 안 돼.’

겉으로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비장한 다짐을 하며 루미나가 능력을 썼다.

상처 부위로 나비 모양의 빛 무리가 모여들었다.

곧이어 빛이 사라졌을 때는, 그의 손가락이 깔끔하게 나아 있었다.

“상처의 크기와 상관없이 치료할 수 있어요.”

가만히 루미나를 쳐다보던 루키우스가 예고 없이 불쑥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저, 저……. 손을 잘라간다고 해서 능력을 훔쳐갈 순 없어요!”

너무 당황해서 그만 헛소리가 나왔다.

루미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한 사이 루키우스는 그녀의 손가락을 꼼꼼히 살폈다.

“상대의 상처를 자신에게 옮기는 형태인가 보군.”

손목을 잘라가려는 게 아니었다.

아픈 내색도 하지 않았는데 방금 본인의 상처 위치 그대로 루미나에게 남은 걸 확인하고 진실에 도달한 것이다.

루미나의 뺨이 부끄러움으로 살짝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점만 있는 능력이 아니어서 싫다는 걸까?

‘하지만 전생에서는 개의치 않는 듯 보였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도 눈이 가려져 있으니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희귀한 능력을 가진 레기온인 걸 알면서도 황실로 가지 않은 이유가 뭐지? 꼭 제국이 아닌 어느 나라를 갔어도 널 데려가려고 난리일 텐데?”

“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루미나는 고민하는 척했다.

너무 어린아이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쟤는 레기온이니까’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까 봐.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저는 전쟁터가 싫어요. 마물도 싫고요.”

아무리 이기는 싸움이라지만 결국 전쟁터였다.

환경은 척박하고, 맛없는 음식 먹어야 하고, 하루 종일 긴장한 채로 사회성 없는 레기온 틈바구니에 섞여 있어야 했다.

레기온에 대한 루미나의 인식은 섣부른 일반화가 아니었다.

그 강력한 힘 탓인지 유독 인간성을 잃은 레기온이 많았다.

레기온 중에 괴짜가 많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였다.

‘그래서 ‘너 레기온 같다’라는 말이 욕으로 쓰이기도 하지.’

그 외에도 ‘너 레기온 닮았다’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이 레기온이시니?’라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발언까지 있었다.

“그래, 네게 남들과 다른 능력이 있다는 건 알겠다. 그런데…….”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울렸다.

“내게 뭘 원하지?”

루미나는 상대의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말했다.

“제 후견인이 되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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