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당들의 최애는 나 (8)화 (8/152)

“후견인?”

루키우스는 난생처음 들어본 단어라는 듯 반응했다.

“네. 제가 성인이 될 때까지만 공작가의 힘을 빌릴 수 있게 해 주세요.”

성인이 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육 년.

열두 살이라고 조금 전에 단단히 못 박아뒀으니 공작 또한 자연스럽게 남은 기한을 계산했을 거다.

“공작가의 힘이라. 공작가의 이름으로 큰 빚이라도 지려는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니에요.”

루미나는 서둘러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부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마차 사고였죠.”

고인의 명복을 빌 법도 하건만 루키우스는 더 말해보라는 듯이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레기온이 맞았다.

“그 탓에 친척들은 파벌을 나눠가며 싸우고 있어요. 직계 혈족은 저와 동생만 남았고요. 전 동생이 무사히 가문을 이어받길 바라요.”

“그래서 기한을 정해 놨군.”

“네. 제가 성인이 될 때쯤이면 위계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을 테니까요.”

그때쯤이면 엔디미온이 가주 업무를 도맡아 하기 어렵지 않은 나이다.

‘나 때문에 눈치가 보이는지 여전히 미적거리고 있지만 엔디미온도 싫지는 않겠지.’

본인이 정말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일단 그 경우의 수는 상황이 닥치면 고민해 보기로 했다.

“생각은 기특하다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다.”

루키우스가 딱 잘라서 거절했다.

“전쟁터나 마물이 싫으면 네 의사를 명확히 밝히면 되는 일이지. 넌 특이한 능력을 가졌으니 충분히 배려해 줄 거다.”

“…….”

“특히나 너는 전투를 능히 할 수 있는 레기온이 아닌 듯하니까.”

“공작님께서는 제 능력이 탐나지 않으신가요?”

“아니라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내 곁에 두는 것보다 네가 싫어하는 전쟁터에 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능력이구나.”

루미나가 다른 곳은 다 제쳐두고 굳이 루키우스를 찾아온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그와 자신의 이해관계가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그는 아들을 살리고 싶어 했고, 루미나는 살릴 능력이 있고.

게다가 그는 죽음의 문턱에 선 자의 눈을 감겨 줄 만큼 인정 있는 사람이었다.

‘이 얘기는 죽어도 못 하지.’

보아하니 그는 루미나와 달리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네 능력이 특이한 데다 탐이 나긴 하지만 딱 거기까지구나.”

흥미를 잃은 듯, 루키우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쁜 제안은 아니다만 여러모로 생각해야 할 점이 많군. 일단 집으로 돌아가라. 대답은 차후 하도록 하마.”

루미나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루키우스는 이 수상한 소녀에 대해 실컷 조사한 후 경계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굳이 위험 부담을 안고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안 돼.’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다.

절대 거절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야 했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역린을.

“강한 레기온일수록 그 힘에 침식당하기 쉽죠. 운이 나쁘면 죽음에 다다르기도 하고요.”

“…….”

“아드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루미나의 능력인 치유는 상처에 국한되지 않았다.

강력한 레기온이 힘을 쓰면 쓸수록 ‘인간’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에서 멀어지고 만다.

그 탓에 폭주하게 되고.

하지만 루미나의 능력이 있다면 폭주를 막아낼 수 있다.

“본인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레기온을 만난 적 있나?”

지금으로서는 레기온을 만난 적 없었다.

하지만 레기온을 만나지 않았는데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네.”

입을 꾹 다문 루키우스가 루미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진실을 판가름하려는 듯했다.

‘여기서 주눅 들면 안 돼!’

어떤 상황에서도 미소를 유지해야 했다. 루미나가 떨지도 않고 당당하게 시선을 받아쳤다.

“그렇군.”

넘어갔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때였다.

“만약 내가 네 능력만 취하고 버린다면?”

“…….”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만, 약속을 지키는 인간보다 지키지 않는 인간이 더 많…….”

“아드님을 사랑하잖아요.”

멈칫.

루미나는 전생에서 죽은 아들을 언급하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곧 죽을 자를 앞에 두고 가식을 부릴 리 없으니 아들을 살릴 기회를 놓친 아쉬움은 진심일 거다.

그리고…….

진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만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됐다.

루미나 본인은 부모에게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으니까.

“제가 아드님을 살릴 목숨의 은인인데 그런 무자비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선글라스 탓에 눈을 볼 수 없었지만, 제법 놀랐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도 모르는 걸 네가 알고 있구나.”

“그야 아까 아드님 얘기를 할 때 굉장히 열정적이었으니까요.”

단순한 핑계는 아니었다.

‘무관심한 아버지가 아들의 옷 치수를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하트 공자는 사랑받고 있구나.

부럽다.

문득 그런 생각을 하며 루미나가 입을 열었다.

“아드님을 치료해 드릴 테니 저의 후견인이 되어 주시겠어요?”

“…….”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 드릴게요.”

그렇게 말한 루미나가 확신에 가득 찬 미소를 지었다.

***

루미나는 무사히 저택으로 돌아왔다.

발에 땀이 나도록 루미나를 찾아다니던 조제프는 옷가게에서 멀쩡하게 쉬고 있는 루미나를 보고 성을 냈다.

“꼬, 꽃병을 깨뜨려서 혼이 날까 봐 겁이 났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변명까지 완벽하게 정해두고 실행한 계획이었다.

루미나가 축 처진 눈꼬리로 안쓰럽게 중얼거렸다. 조제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도 조제프한테 잔소리를 잔뜩 들었지만, 한 귀로 흘려들어서 기억도 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돌아온 루미나는 좋은 소식이 들리길 기다렸다.

“아무리 봐도 조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이야.”

“누님이 깐깐한 겁니다.”

루미나가 엔디미온의 방에서 중얼거렸다.

루미나가 있을 때면 친척들 중 그 누구도 엔디미온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엔디미온도 루미나의 방문을 기꺼워하는 것 같아 제법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려고 했다.

비록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지만.

“누님.”

“응?”

“누님께서는 방을 옮길 생각이 없으십니까?”

장례식을 치르고 시간이 제법 지났건만 루미나는 여전히 다락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먼저 껄끄러운 주제를 언급할 줄 몰랐던 터라 루미나는 조금 놀랐다.

이제껏 엔디미온이 루미나의 일에 목소리를 크게 낸 적은 없었다.

부모님이 살아계셨을 때는 계모가 워낙 강경한 데다 남매 사이도 어색해 나서지 못한 듯했다.

그러나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소원하던 루미나가 저를 가족이라 생각한다니 적잖이 신경 쓰인 모양이다.

엔디미온이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누님께서는 랑슈스의 적녀입니다. 지금보다 좋은 방에서 지내는 게 원칙상 옳습니다.”

“엔디미온.”

내용도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순간 사전이 말을 할 수 있었나, 하고 의심이 들 정도였다.

가만히 듣던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불렀다.

그간 침묵하고 있었던 게 양심에 찔리기라도 했을까. 엔디미온이 순간이지만 뜨끔한 얼굴을 했다.

“혹시 맨날 찾아오는 친척들이 귀찮아서 그래? 내가 네 방에 있으면 아무도 오지 않으니까 아예 나를 근처에 지내게 하려고?”

“……그런 게 아닙니다.”

엔디미온이 정색했다.

그런 불순한 의도가 전혀 없다는 걸 드러내고 싶은 듯, 안 그래도 감정 없는 얼굴에 감정이 더 사라졌다.

순순히 그 진심을 믿어준 루미나가 대답했다.

“딱히 불편하지 않아. 어차피…….”

똑똑-.

노크 소리가 끼어들었다.

말을 끝맺지 못한 루미나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하녀가 들어왔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환복을 도와드릴 테니 어서 가시죠.”

“대체 어떤 손님이길래?”

하녀가 필요 이상으로 호들갑이었다.

평소 루미나를 찾아올 손님도 없을뿐더러 찾아온다 해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

계모의 방침이었다.

‘계모가 죽었지만 별반 다르지 않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계모의 사람이니까.’

루미나가 엔디미온을 만나러 오는 걸 못마땅하게 봤는지 ‘빌붙는다’라고 표현하는 이들이다.

안 듣는 데서는 임금님 욕도 한다지만, 너무하다 싶은 구석이 있었다.

“하트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만나고 싶다며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어서 준비를…….”

“하트 공작?”

되물음은 루미나가 아닌 엔디미온 쪽에서 나왔다.

“어째서 그분이 누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신 거지?”

“그건 만나면 얘기해 주시겠지. 엔디미온, 넌 환자니까 누워 있어. 금방 다녀올게.”

“하지만…….”

엔디미온이 루미나를 붙잡았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위험하다니?”

“그분께서는 공작이기 이전에 레기온이지 않습니까.”

수틀리면 사람 목숨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닌 존재임을 잊지 말라는 의미였다.

루미나는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네 말이 틀린 건 아니지. 하지만 날 보러 오셨는데 내가 피해 다니면 도리어 분노하지 않을까?”

“…….”

“처신은 내가 알아서 잘할게.”

“……알겠습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루키우스의 무시무시한 오라를 떠올리면 괜한 걱정은 아니었다.

일단 엔디미온을 안심시키고, 방을 나서던 루미나가 멈칫했다.

‘엔디미온이랑 조금 친해진 건가?’

걱정도 할 줄 알고.

어쩐지 상상으로만 그리던 이상적인 가족에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한 루미나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하녀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저택을 나가니 주변이 어수선했다.

‘다들 어디 있나 했더니 여기 있었네.’

거물이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친척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루키우스의 눈에 띄기 위해 두려움을 이겨내며 갖은 아양을 떨었다.

“공작님, 다리가 아프지는 않으세요? 응접실로 안내해드릴까요?”

“랑슈스 내외께서 생전에 공작님과 인연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혹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습니까?”

다들 말 한번 섞으려고 난리였다.

루키우스는 무시로 일관했다.

어떻게든 호의를 얻으려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루미나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한테 후견인이 돼 달라고 했는지 실감 났다.

‘문제는 가만히 서 있어도 빚을 독촉하는 채권자처럼 보인다는 거지만.’

친척들이 발만 동동 구르는 모습이 퍽 재밌었다. 루미나는 멀찍이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때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루미나가 있는 곳이었다.

‘아차.’

정신을 차린 루미나가 도도도 빠르게 그에게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공작님! 랑슈스 가의 첫째 딸, 루미나 랑슈스라고 해요. 저를 찾으셨다고요.”

“그래.”

루키우스의 짧은 대답에도 기죽은 기색 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루미나가 순진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데 타고 오신 마차가 크네요. 공작 각하가 되면 저런 마차는 당연히 타고 다니는 건가요?”

채권자 같은 루키우스만큼이나 시선을 끄는 물체가 있었다.

바로 그의 뒤편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였다.

줄줄이 이어진 마차는 척 봐도 짐 마차였다.

“저건 선물이다.”

“선물이요?”

루미나가 커다랗게 뜬 눈을 깜빡였다.

설마 저기 있는 걸 전부 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마차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자신을 위한 선물이라는 걸.

청렴과 절제를 모르는 속물적인 루미나의 심장이 주책없이 콩콩 뛰었다.

“추모용 꽃은 늦은 듯해서 네가 좋아할 만한 꽃을 골라오려고 했지. 그런데 딱히 좋아하는 꽃이 없더군.”

취향까지 고려해 주다니.

역시나 루미나를 포함한 루미나의 고모의 사돈의 팔촌의 할아버지까지 조사를 마친 루키우스였다.

“그래서 모조리 사 왔다.”

그의 말을 듣고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루미나는 생각했다.

‘아, 맞아. 엔디미온한테 말하지 못했네.’

다락방 신세는 곧 탈출이라고.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