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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한 긴장감이 팽팽하게 맴돌았다.
음식을 나르는 하인들은 혹 실수를 하게 될까 싶어 숨마저 죽였다.
랑슈스 백작 저택의 식당.
그곳에 이질적인 인상의 남자가 상석에 앉아 있었다.
바로 루키우스였다.
그의 근처에 자리를 잡은 루미나는 힐끔 주변을 둘러봤다.
오랜만에 북적이게 된 식당은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들이 자리를 가득가득 채웠다.
바짝 긴장한 하인들과 달리 친척들은 쉴 새 없이 나불거렸다.
그중 고모인 테레사 발레스와 외숙부인 조제프도 있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십니까? 랑슈스 본가를 책임지는 주방장이 한때 황궁에서 일했을 만큼 실력이 출중한 자입니다. 저도 가끔 여기서 먹은 음식 맛을 못 잊…….”
“루미나.”
“네, 공작님.”
“맛은?”
루키우스가 조제프의 말을 중간에 뚝 끊고 루미나에게 물었다.
컥.
방금 한 입 먹은 수프가 순간 턱 걸릴 뻔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루미나가 방긋 웃었다.
“맛있어요! 굉장히.”
사실 모르겠다. 무슨 맛인지.
“공작님께서는 입맛에 맞으신가요?”
“그럭저럭.”
그럭저럭이면 나쁘다는 의미 아닌가?
루미나뿐만 아니라 친척들 또한 같은 생각을 했다. 새파랗게 질려서 얼른 음식을 바꾸라고 하인에게 눈짓했다.
고요 속의 폭풍이 지나가고 있는데 루키우스가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잘 먹지 못하는군.”
“네? 잘 먹고 있는걸요! 이것 보세요.”
루미나가 수프를 연달아서 세 스푼이나 먹는 묘기를 보였다.
꿀꺽, 꿀꺽, 꿀꺽.
수프가 물처럼 술술 넘어갔다.
언뜻 보면 신이 나서 식사를 하는 듯했지만, 루키우스의 말이 옳았다.
말을 걸기 전까지만 해도 혹시나 약을 넣었을까 봐 은제 스푼으로 수프를 뒤적거리던 중이었으니까.
죽음을 겪은 이후 루미나는 식사하는 행위 자체를 꺼리게 됐다.
언제? 누가? 어떻게?
이 집에 루미나의 편은 없었다.
그건 곧 스스로를 알아서 지켜야 한다는 의미였다. 항시 긴장하는 수밖에 없었다.
엔디미온에게는 독을 쓰지 않겠지.
그런 생각으로 엔디미온이 받은 선물 쿠키를 몇 번 먹었다.
그 쿠키 몇 개가 근래 한 식사 중 가장 과식한 축에 속했다.
달아도 너무 단 탓에 입맛에 맞지 않아서 혼쭐이 났지만.
이런 뒷사정을 숨기며 열심히 먹다 보니 벌써 그릇의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루미나, 공작님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니?”
“친모와 아는 사이였던 거냐?”
루키우스의 철벽 수비가 만만치 않자 친척들은 공략 대상을 바꿨다.
바로 루미나였다.
그동안 루미나를 슬금슬금 피해 다녔지만, 하트 공작이 연관돼 있다면 얘기가 또 달랐다.
저 순진한 아이를 꼬셔서 어떻게든 공작 가문과 연줄을 잇기 위해 눈을 벌겋게 뜨고 있었다.
힐끔.
이를 모를 리 없는 루미나가 루키우스의 눈치를 봤다.
그리고 무심하던 루키우스의 입이 열렸다.
“후견인이지.”
“그게 정말입니까?!”
조제프가 목소리를 높였다.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눈치를 챈 건 조제프뿐만이 아니었다. 루미나의 고모, 테레사가 나섰다.
“갑자기 후견인이라니요? 관련된 얘기는 고인이 된 백작 내외에게 전혀 듣지 못했습니다.”
말투에 살짝 불편한 기색이 비쳤다.
하트 공작의 등장이 그녀에게 호재가 될지 악재가 될지 아직 판가름이 나지 않는 듯했다.
반면 루키우스는 태연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내 피후견인이 돼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지. 어찌나 똑똑한지 허락만 받는다면 내 아들과 결혼도 시키고 싶을 정도야.”
……네?
아드님의 의사는요?
아니, 그 전에 제 의사는요?
그 무엇도 없는데요?
사전에 전혀 협의되지 않은 이야기에 루미나는 쥐고 있던 스푼을 놓을 뻔했다.
쨍그랑-.
커트러리가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설마, 내가?’
아니었다.
얼굴 모르는 친척이 손에 힘이 풀렸는지 커트러리를 놓치고 말았다.
아마 다들 루미나와 비슷한 심경일 거다.
“호호, 우리 루미나가 참 예쁜 아이긴 하죠. 싹싹하고.”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려던 고모, 테레사는 싹싹하다는 거짓말만은 하기 힘겨웠던지 순간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러다가 어금니 부러지겠어. 진짜로 부러졌으면 좋겠다.’
찰나의 차이였다.
하지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루미나가 사심을 담아서 생각했다.
“힘도 세고, 끈기 있고, 모난 곳 하나 없죠.”
맞은 뺨이 어지간히 아팠나 보다. 지금도 아픈 것 같고.
아이를 칭찬할 때 하지 않을 말까지 본심으로 나왔다.
“영특한 아이가 탐이 나는 공작님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루미나는 부모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았죠.”
언제부터 우리 루미나였는지.
루미나는 테레사가 자꾸 자신을 ‘우리 루미나’라고 하는 것이 거슬렸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친척 된 입장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
“언제부터 하트 가가 남의 말 몇 마디로 좌지우지당하는 가문이 되었지?”
루키우스가 우아하게 쥐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박았다.
콰득-.
그렇게 힘을 준 것 같지 않은데 포크가 그대로 꽂혔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혹 내가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나쁜 짓을 할 만큼 추잡한 가문의 사람 같나?”
“그,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본인의 말실수를 깨달은 테레사가 황급히 부정했다.
루미나 앞에서 악독하기 그지없었던 그녀는 하트 공작 앞에선 순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루키우스는 테레사에게서 빠르게 관심을 껐다. 다른 대화 주제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피후견인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알아보는 것도 후견인으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이지. 식사가 끝나면 안내해 줄 수 있나?”
“네, 공작님.”
“식후 티타임은 이왕이면 네 방에서 했으면 하는군.”
뜨끔.
루미나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고 있는 친척 대부분이 움찔했다.
“아직 어린, 그것도 여자애의 침실을 구경하는 건 좀…….”
“전 괜찮아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루미나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공작님이 보시기에 좀 누추할 거예요. 그 점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방긋방긋 웃는 루미나는 밝았다. 학대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만약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다 제 잘못인걸요. 그러니까 부끄럽지 않아요!”
“그렇다는군.”
루키우스가 수긍했다.
만약 반박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말을 못하게 해줄 것 같은 어조였다.
‘루미나, 저 영악한 것……!’
까득.
테레사가 작게 이를 갈았다.
그녀는 루미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루미나가 친모의 외양을 빼닮은 것이었다.
루미나의 친모가 어찌나 제 남동생을 좋아했던지. 지켜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생김새만 닮았을 뿐인데도 루미나에 대한 평가가 박해졌다.
‘아니지. 외모뿐만 아니라 그 성품까지 제 어미를 닮은 것 같았어.’
제 부모가 죽었는데 잘 죽었다는 소리 따위를 하는 애였다.
도저히 곱게 볼 수 없었다.
‘조제프라고 했나. 뒤늦게 부랴부랴 찾아와서 감히 랑슈스를 넘보려고 하다니.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장례식이 끝났건만 테레사가 랑슈스 저택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이유는 엔디미온을 이용해 랑슈스 가를 주무르기 위함이었다.
‘요즘 돈이 궁해서 새로운 사업을 눈여겨보던 차였으니 시기가 좋았지.’
엔디미온의 외가는 평민이니 염치없이 찾아와서 재산을 나눠달라고 배짱을 부리지 못할 거다.
그런 계산을 모두 마친 테레사는 이제 엔디미온만 설득하면 끝나는 문제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일을 진행하면서 루미나의 존재가 큰 걸림돌이 됐다.
조제프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루미나를 설득하고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해 미묘하게 파벌이 나뉘면서 귀찮게 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저 가문의 핏줄은 방해만 되잖아. 대충 돈만 내놓고 꺼지면 좋을 텐데.’
갑자기 루미나의 후견인이 되겠다는 하트 공작만 해도 그랬다.
그가 좋은 인맥이 되어 주는 걸로 이 만남을 끝내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만약 루미나 저것이 학대받았다고 공작님께 일러바치면…….’
루미나를 직접적으로 학대한 사람은 이미 죽은 계모였다.
그렇지만 테레사 또한 사실을 전부 알면서 묵인하지 않았던가.
괜히 제게 불똥이 튈까 봐 걱정이 된 테레사는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
식사가 끝나고, 루키우스는 랑슈스 저택을 산책했다.
물론 친척들이 금붕어 똥처럼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은 여전히 말 한번 붙여보려고 안달이었지만 철벽이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친척이라는 병풍을 배경처럼 데리고 다니며 루미나는 루키우스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그들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루미나의 다락방이었다.
“여긴 드레스 룸인가? 아니면 놀이방?”
“아뇨. 침실인데요.”
루미나의 대답을 듣고 어쩐지 루키우스가 영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저택은 그리 작지 않던데. 너같이 콩알만 한 아이가 지낼 방도 없나?”
“아휴, 루미나도 참.”
걱정했던 상황이 펼쳐졌다.
루미나가 입을 열기도 전에 테레사가 나섰다.
“공작님, 제가 듣기로 여기는 체벌용 방이고 침실은 따로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체벌용?”
“아이가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 잠깐 올려보내는 곳이죠.”
“…….”
“하트 공작님이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고 하셔서 들뜬 건 알겠지만, 관심받기 위해 이곳이 네 방이라는 거짓말까지 하다니. 그러면 안 되지, 루미나.”
테레사가 계모와 똑같은 변명을 하며 부드럽게 루미나를 타일렀다.
‘결국 내 탓이라는 거잖아.’
자연스럽게 모든 잘못을 루미나에게 돌리고 있었다.
루미나가 입을 다물자 테레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 룸은 어디 있지?”
“드레스 룸도 당연히…….”
이번에도 테레사가 대답하려던 때였다.
“풉.”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