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루미나?”
얼간이처럼 기죽어 있을 줄 알았는데 웃다니?
테레사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릴 뻔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웃긴 얘기를 들어서 저도 모르게 그만.”
“뭐가 그렇게 웃기니?”
자애로운 고모 역할을 해내야 하는 테레사가 표정을 갈무리하곤 물었다.
루미나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짓말은 제가 아닌 고모님께서 하는데 너무 당당하잖아요.”
“거짓말이라니. 나는 그동안 들은 대로 말했을 뿐인데 무슨 소리니.”
테레사가 슬쩍 오리발을 내밀었다.
자신은 아이의 학대와는 관련이 없으며 모두 들은 얘기일 뿐이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다.
도망칠 구석 하나는 눈치 빠르게 만들어놓는 테레사였다. 하지만 루미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들은 얘기일 뿐이라면 당사자를 앞에 놓고 단정 지으면 안 되죠. 고모님께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남이잖아요. 그런데 마치 본 것처럼 얘기해서 웃고 말았네요.”
진짜 열두 살 때라면 ‘정말 내가 잘못한 걸지도 몰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입을 다물고 말았을 거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몇 마디의 말로 웅크려 있을 필요 없었다.
“……여기서 생활했단 말이니?”
“네, 고모님. 당장 다락방을 훑어만 봐도 그렇잖아요.”
“…….”
“고모님께서는 여기 있는 가구에서 생활감이 느껴지지 않으세요? 하긴, 평생 새것만 취급하셨으니 이런 물건이 생소할 수도 있죠.”
“그렇구나.”
테레사의 억지로 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방금 드레스 룸이 어딘지 물으셨죠? 아, 맞다. 고모님. 설명은 제가 할게요. 공작님께서는 제 손님이잖아요.”
그러니까 낄 데 안 낄 데 구분 못 하고 나서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공작의 앞이니 대충 넘어갈 줄 알았겠지만 아니었다.
루키우스는 이 웃기지도 않은 상황을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었다.
“저는 따로 드레스 룸을 둘 만큼 옷이 많지 않아서 이 옷장이 끝이에요.”
“그렇군.”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장을 열어봐도 되겠나?”
“네.”
그가 옷장을 열었다.
대부분이 오래 입은 티가 났다. 그래서 몇몇 새 옷이 도드라져 보였는데 모두 조제프가 사준 것들이었다.
“이런 옷이 취향인가?”
소녀의 취향은 알 수 없군.
실제로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값비싼 데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옷으로만 골라서 사달라고 했으니까.’
프릴과 레이스, 반짝이는 비즈가 잔뜩 박힌 유치찬란한 옷뿐이었다.
루미나가 네 살만 어렸어도 제법 귀엽게 봐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이젠 애매했다.
“외숙부께 선물 받은 옷이에요. 그래서 소중히 입으려고요.”
“취향이 아니면 버려라.”
그가 딱 잘라서 말했다.
“전부.”
거금 들여서 산 옷이 단번에 분리수거도 못 할 쓰레기가 되었다.
조제프의 얼굴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네게 훨씬 어울릴 만한 것으로 사주마.”
“하지만 제가 너무 받기만 하는 것 같은데…….”
루미나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속으로는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속물적인 본심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내가 네 후견인인데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별것도 아니니 가볍게 생각해라.”
무려 공작이 해 주는 선물인데 별것이 아닐 리 없었다.
심장이 콩콩 뛰고 있는데 루미나의 내면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루미나와 속물적인 루미나가 싸워댔다.
‘눈 한번 딱 감고 받아. 어차피 입을 옷도 없잖아.’
‘대충 있는 천 쪼가리로 몸만 가리면 그게 옷이지! 받지 마, 루미나! 이번 일을 빌미로 공작님이 나중에 큰 걸 요구하면 어쩌려고 그래!’
‘천 쪼가리를 입으라니! 그게 말이니? 옷은 곧 내가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는 얼굴이나 마찬가지라고!’
속물적인 루미나가 충격을 받았는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하트 공작은 재산이 어마어마하잖아. 옷 몇 벌 선물하는 건 개미한테 과자 부스러기 주는 것보다 더 하찮을걸!’
‘그, 그런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루미나의 마음이 약해졌다.
그 틈을 노려 속물적인 루미나가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그래! 어른이 주는데 받아야지! 후견인이 괜히 후견인이겠어?’
‘그치. 저분은 이제 후견인이지…….’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루미나의 완패였다.
***
“후견인이 돼 주셔서 감사해요.”
루키우스가 밝게 웃는 루미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아주 엉망진창이더군.”
“사정 없는 집이 어디 있겠어요. 저희 집안도 사정이 있을 뿐인 거죠.”
루미나는 자신의 집안이 특히 유별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에 너무 어렸고, 어른들의 탐욕이 생각보다 더 음습했을 뿐이지.
루키우스는 단 한 번의 방문으로 루미나가 어째서 외부의 힘을 빌리려고 했는지 완벽히 이해한 듯했다.
“그러면 저도 제 의무를 이행해야겠죠!”
열정을 드러내기 위해 루미나가 훙 하고 콧김을 내뿜으며 활기차게 말했다.
“언제쯤 찾아가면 될까요?”
“편한 대로 해라.”
“네? 정말요?”
루미나가 눈을 크게 떴다.
하트 공자가 사망하기까지 앞으로 남은 시간은 육 년 남짓.
그래서 아직 여유가 있는 걸까?
‘저쪽에서 먼저 여유를 준다면 내가 마다할 이유는 없지.’
루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용건이 없다는 듯 루키우스가 루미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한두 걸음 척척 갔을 뿐인데 엄청나게 멀어졌다.
금방 사라질 것만 같은 까만 뒷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우다다-.
곧바로 그의 뒤를 쫓았다. ‘공작님!’ 하며 부를 여유도 없었다. 거리가 너무 금방 멀어졌기 때문이다.
루미나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루키우스의 옷자락을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뭐지?”
그가 붙잡힌 줄도 모르고 척척 앞으로 가는 탓에 그대로 질질 끌려가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옷자락이 붙잡히자마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저는 멍청하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가 루미나를 쳐다봤다.
“고모님이 다락방은 체벌용이라고 했잖아요. 멍청해서 계속 그곳에서 지낸 거 아니에요.”
은연중에 신경이 쓰였던 터라 결국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멍청했다면 나를 찾아올 생각도 못 했겠지.”
게다가 그는 열두 살짜리 아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루키우스는 자신이 본 것만 믿었다.
“그리고 공작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무엇이지?”
“공자님을 찾아갈 때, 며칠간 공작저에서 머무를 수 있을까요?”
자세한 이유도 묻지 않고 루키우스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루미나의 표정이 비가 그친 후에 날이 개듯 밝아졌다.
“감사해요. 그러면 늦지 않도록 찾아가는 걸로……. 아앗, 옷을 구겨서 죄송해요!”
어찌나 강한 힘으로 잡고 있었는지 그의 옷이 살짝 구겨진 듯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루미나를 보며 루키우스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사과할 필요 없다.”
괜찮다는데도 울상이 된 루미나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
“대장, 어때?”
마차가 움직이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브랜든이 루키우스에게 물었다.
“담력은 제법 마음에 들더군.”
“그렇겠지. 대장을 보고 울지 않고, 치안대로 달려가지도 않았으니까.”
똘똘한 눈빛을 하던 루미나를 떠올린 브랜든이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브랜든.”
루키우스의 경고를 받은 브랜든이 억울해했다.
“하지만 대장도 그 능력을 봤잖아. 같은 레기온이라면 그 아이한테 끌릴 수밖에 없다고.”
루미나가 능력을 썼을 때 빛이 온몸을 감싸는 느낌이 들었다.
차갑고 딱딱했던 마음이 말랑말랑하게 녹아내릴 것처럼 따스했다.
흔히 레기온은 인간성이 결여돼 있었다. 그런데 그 빛을 봤을 때는 평범한 인간이 된 것만 같았다.
같은 레기온이라면 절대 거부할 수 없는, 탐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결국 후견인이 되어 줄 생각이었잖아. 그 능력은 억만금을 준대도 못 사는 거니까.”
“훔쳐 들었군.”
“너무 궁금해서 그만.”
브랜든 정도면 믿고 일을 맡기니 엿들어도 상관없었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루키우스는 저보다 훨씬 작은 소녀를 떠올렸다.
첫인상은 수더분했다.
그런데 스스로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고 물러설 때는 물러서며, 또 물러서지 않을 때는 완고했다.
협상할 자세가 제대로 돼 있는 아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성질을 내야 할 땐 강단 있게 굴 줄도 알았다.
그 모습이 꼭…….
“개 같지 않나?”
“……대장,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리 들어도 욕이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흉흉한 말투까지 겹쳐 흉을 보는 것만 같았다.
“소형견 같았지.”
“아, 그런 의미였어? 그건 맞지.”
작은 덩치로 깡깡 짖으면서 눈 한 번 깜빡하지 않는 모습이 딱 소형견이었다.
머리 색도 밀색니까 굳이 따지자면 포메라니안인가?
“하지만 대장도 잊으면 안 돼. 그 애가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다는 걸. 어쩌면 박사와 관련됐을 수도 있어.”
루미나 랑슈스.
그 소녀에 대한 뒷조사는 이미 소녀의 고모의 사돈의 팔촌의 할아버지까지 마쳤다.
한마디로 탈탈 털어냈다는 의미다.
“거짓말을 하더군.”
루미나는 레기온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단 한 번도 레기온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레기온을 만난 적 있다고 거짓말을 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제법 잘 파악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이 많았다.
“여기서 더 파낸다고 해서 나올 게 있을까 싶긴 한데 조금 더 조사해 볼까?”
“그래.”
특징 없던 브랜든의 얼굴이 젤리처럼 녹아내리더니 이내 30대 중후반의 서글서글한 미남이 되었다.
브랜든 또한 레기온이었다.
루키우스의 충실한 수족이자 한 번 본 사람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외모를 바꿀 수 있는 레기온.
그는 자신의 능력을 어두운 일에 유용하게 써먹고는 했다.
“탈탈 털었는데 아직도 남은 게 있는 사람은 처음이라 긴장되는걸. 대장을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어.”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루키우스는 의심 가는 것이 있다면 눈에 보이는 데 뒀다. 그 편이 나중에 처리하기 쉬우니까.
그래서 루미나의 제안은 처음부터 수락할 생각이었다. 그냥 내치기에는 이용가치가 차고 넘쳤다.
다만 어떤 패를 숨기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관심 없는 척, 계속 거절했다.
결국 한 방 먹은 건 그가 됐지만.
“아드님을 사랑하잖아요.”
어쩐지 아들을 인질로 삼은 것 같아 썩 유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아, 맞아. 가출한 카라얀은 집에 들어왔어?”
카라얀 폰 하트.
하트 공자이자 루키우스의 하나뿐인 아들 이름이었다.
“내 그림자도 밟으려고 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군.”
“한창 부모님한테 반항할 나이지.”
그리고 대학살 날의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 있을 만하고.
브랜든이 가까스로 뒷말을 삼켰다.
***
“공작님이 나를 의심하고 있어.”
루키우스가 떠나고, 성공적으로 거물 후견인을 구한 루미나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오늘은 첫날이니 대충 넘어갔지만 앞으로 나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떠보려고 하겠지.’
의심이 불신이 되고, 그 불신으로 일찍 내쳐질 수 있었다.
어설픈 타이밍에 끈 떨어진 신세가 되어선 안 된다. 그러면 전생이 반복될 뿐이다.
‘의심을 아예 없앨 순 없어.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공작의 호의를 얻어내는 것.
객관적으로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아이를 쉽게 내칠 수 없을 거다.
“아가씨.”
저택으로 들어가니 하녀가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다가왔다.
“공작님께서 선물하신 꽃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거대한 짐마차 몇 대가 싣고 나른 만큼 루키우스가 선물한 꽃의 양은 어마어마했다.
“일부는 화병에 꽂아서 저택을 장식하도록 해. 그리고 이 모종들은 정원을 꾸미는 데 쓰면 될 것 같아.”
“알겠습니다.”
“그렇게 써도 남을 것 같으니까 꽃다발을 하나 엮어줄래?”
루미나는 하녀가 정성껏 엮은 꽃다발을 받아 안고 복도를 걸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니 창문 너머로는 명령을 받은 정원사가 분주히 모종을 나르고 있었다.
“꽃은 참 아름다운데…….”
루미나가 싸늘한 눈빛으로 정원을 내려다봤다.
“관리하는 사람이 별로니까 엉망이네. 슬슬 갈아치워야겠어.”
똑-.
색깔이 유독 눈에 띄었던 꽃 한 송이를 꺾은 루미나가 그것을 미련 없이 바닥에 버렸다.
그리고 사뿐하게 지르밟고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