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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나, 내가 그동안 네가 어떻게 사는지 몰랐구나. 이 좁은 다락방에서 얼마나 힘들었니. 이젠 안심하렴.”
미래에 조카를 팔아먹을 나쁜 놈이 이렇게 말했다.
‘엊그제만 해도 미친 사람처럼 날 쫓아다녔는데 몰랐을 리가 없잖아. 내 마음이 약해질 때쯤 도와주면 자기를 철석같이 믿을 테니 당장은 내버려둔 거지.’
조제프의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는 루미나가 방긋 웃었다.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어요. 저한테는 그게 당연했는걸요. 그래서 그런지…….”
한껏 올라갔던 루미나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이 방이 제 방이라는 게 아직 믿어지지 않아요. 꼭 남의 방을 훔친 것만 같아서 불편해요.”
하트 공작이 방문한 이후 루미나는 다급히 방을 옮기게 됐다.
백작 내외의 침실을 제외한 방 중에서 제일 넓고 좋은 곳으로.
이곳은 조제프의 손을 잡았으면 얻게 될 방이었다.
그래서 이제껏 자신의 방인 적 없지만 그 어느 곳보다 제 방 같았다.
눈을 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방의 구조를 꿰뚫고 있으면서 루미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연기했다.
“루미나! 그렇게 생각하지 말렴. 이건 원래 네가 누렸어야 할 것들이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숙부님.”
하트 공작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지만, 조제프에게는 아직 순진한 열두 살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한 드레스 몇 벌로 그간의 원한을 지울 수 없지.’
조제프를 포함한 다른 친척들이 위로하듯이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간의 과거는 다 잊고 오늘부터 새로 시작한다고 생각해라.”
그래, 그래.
여기저기서 동정의 시선이 쏟아졌다.
장례식장에서만 해도 독하니 뭐니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갑자기 태세를 전환한 건 하트 공작 탓이었다.
‘티라미수 가루라도 얻어먹어 보려고 노력하는 거지. 내가 공작님과 어떻게 만났는지 자꾸 떠보려고 하면서.’
속내가 투명하게 보이는데 순순히 당해 줄 루미나가 아니었다.
“제가 너무 들떴나 봐요. 숙부님 얼굴을 보니까 긴장이 풀려서……. 하암.”
루미나가 작게 하품했다.
“어머. 죄송해요.”
굉장히 의도적인 하품이었지만 당황한 것 같은 연기가 일품이었다.
주변에 있던 친척들이 껌뻑 넘어갔다.
어서 꺼져.
그런 의미인 줄도 모르고.
“죄송하기는 무슨. 졸리면 당연히 나오는 생리적인 현상이니 죄송해할 필요 없다.”
“그래, 그래. 나이가 어리면 그만큼 일찍 잠들어야 하는 게 맞지. 지금이 몇 시였지?”
누군가 말하자 모두의 시선이 근처의 시계로 쏠렸다.
“지금이…….”
벽에 굳건히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한 사람들이 한순간 입을 다물었다.
“밤 여덟 시네요.”
침묵 속에서 루미나만이 약간 졸음기가 섞인 답을 내놓았다. 어른들에게는 한창때인 시각이었다.
물론 루미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시치미를 뗐다.
“제가 오늘 정말 피곤했나 봐요. 평소에는 이때 잘 자지 않는데…….”
부끄럽다는 듯, 루미나가 살짝 뺨을 붉혔다.
생각보다 이른 시각을 보고 잠깐 당황했던 조제프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빠르게 간신배 상태로 돌아갔다.
“그래, 그래. 여덟 시면 잠들기 딱 좋은 시각이지. 어서 자거라. 우리가 불을 꺼주고 나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나가주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조제프는 루미나가 자는 모습까지 확인하고 싶은지 버티고 서 있었다.
결국 루미나가 베개에 머리를 대려고 이만 자는 척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베개! 베개가 이 꼴이 뭐냐. 거위 털도 잔뜩 들어가고, 폭신폭신해야 잘 맛이 나지 않겠나.”
루미나의 머리가 베개에 제대로 닿기도 전에 조제프가 호들갑을 떨었다.
“거위 털 베개가 있을 테지? 누님께서는 고급 베개가 아니면 머리를 대지도 않았으니 하나쯤은 있겠지. 우리 조카님이 불편해하지 않나.”
“…….”
“거기 멀뚱히 서 있지만 말고, 빨리 베개를 가져오지 않고 뭣 하고 있나!”
순식간에 주변 분위기가 어수선해졌다. 잠이 오다가도 달아날 것만 같았다.
‘……지금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이러는 건가? 비싼 돈 주고 산 옷을 버리게 했다고 복수라도 하려고?’
짜증을 숨긴 루미나가 조제프를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루미나에 대한 악감정을 이상한 방식으로 푸는 게 아니었다.
단지 간신배 역할에 충실한 것뿐이었다.
루미나도 루미나지만, 역시 조제프도 만만치 않게 독한 사람이었다.
‘역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조카를 팔아먹으려고 한 나쁜 놈은 달라.’
그 나쁜 놈을 처리하기 위해서는 더 교묘해질 필요가 있었다.
***
현재 랑슈스 저택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한다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었다.
슬슬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기에 발언권이 올라간 루미나가 압박을 주기 시작했다.
“저는 부모님께서 이토록 공덕이 높으신 줄 몰랐어요. 많은 분들이 부모님의 죽음을 함께 추모해 주시니 든든하네요.”
“역시 그렇…….”
“그런데 바쁘시지 않으세요?”
“…….”
“저는 어른은 어른의 의무가 있다고 배웠어요. 어른들도 해야 할 일이 있으시잖아요.”
“하하. 중요한 시기에는 잠깐 할 일을 뒤로 미뤄도 되는 거란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자기 할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싫어하셨어요! 자신 때문에 할 일도 미루고 추도만 하는 건 부모님께서도 반기지 않으실걸요?”
조심조심하면서 말하다가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하고 당돌한 말투가 나왔다.
“그렇지 않나요?” 하면서 당연한 걸 말하는 듯이 되묻는 분홍빛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상대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고인을 핑계로 대면서 남았던 자들, 역으로 고인을 빌미로 떠나게 될지니.
그렇게 루미나가 객식구처럼 자리 잡은 친척들을 하나둘씩 쫓아냈다.
하지만 모두 쫓아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테레사와 조제프.
그들만은 아직 어린아이들을 돌보겠다며 강경하게 버텼다.
실제로 그들이 방계 분파의 대표 격이었다.
때문에 테레사와 조제프가 남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로 다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제법 순순하게 떠났다.
‘일차적인 정리는 대충 했네. 그런데도 아직 한참 남았어. 후.’
워낙 쓰레기가 많다 보니 정리할 게 많았다.
한 번에 버리기 어렵다면 차곡차곡 정리해서 버리는 편이 깔끔했다.
최근 거처를 다락방에서 넓은 방으로 옮길 때도 그랬다.
다락방에 있던 물건은 오래됐다며 친척들이 전부 버리려고 하기에 루미나가 일단 내버려두라고 했다.
이에 루미나는 가만히 있는데 친척들이 나서서 새 가구를 사줬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새 가구를 맞춘 것이다. 아마 하트 공작의 눈치를 보느라 그런 것이리라.
또한 평소 루미나를 무시하던 하인들도 이제는 집안의 아가씨 취급해 주며 퍽 친절하게 대해 줬다.
예전에는 공기 취급하던 이들이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자 루미나는 속없는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었다.
“사만다라고 했었나? 항상 곁에서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고맙다니요.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사만다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아침이 되면 세숫물을 가져다주고 커튼을 걷어준다.
당일 루미나가 입을 만한 옷을 골라 입혀주면 끝이었다. 그 후로 자유 시간.
이렇듯 크게 칭찬받을 일을 한 적 없었다.
그 때문에 사만다는 최근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고 있었다.
봉급은 그대로인데 하는 일은 반절쯤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루미나는 딱히 요구하는 게 없어서 깐깐했던 마님과는 달리 일하기 편했다.
사만다가 마님 밑에서 일하던 때를 한창 떠올리고 있는데 루미나가 불쑥 말했다.
“봉급은 만족해? 내가 집사한테 말해 볼까?”
“네? 아닙니다, 아가씨! 저는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니 신경 쓰실 것 없어요!”
사만다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얼떨결에 본심까지 나왔다.
거절당한 루미나의 표정이 흐려졌다.
“앗, 내가 너무 과했던 걸까? 하지만 이제껏 날 이렇게까지 돌봐준 사람이 없어서…….”
“…….”
“부모님께서 항상 잘해 주셨지만 너도 알다시피 사정이라는 게 있잖아.”
“그렇죠. 아가씨의 마음, 제가 다 압니다.”
루미나가 먼저 빈틈을 보이자 사만다가 눈을 반짝이며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모든 일에는 줄이 중요한 법이다. 사만다는 지금 루미나라는 줄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루미나는 그런 사만다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만다뿐만이 아니었다.
친절의 가면을 쓰고 제게 다가오는 하인이 있다면 모두 받아주었다.
하지만 과거는 잊기 힘든 법.
엊그제만 해도 고용된 하인들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루미나에게 다가가기 힘든 하인들도 존재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서 파벌이 나뉘었다.
그리고 파벌은 균열의 씨앗이 됐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상황이 어이가 없어.”
루미나의 곁에 붙어서 알랑방귀를 뀌며 봉급을 올려 받은 동료 하녀들이 못마땅했던 한 하녀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네가 아가씨를 제일 많이 괴롭혔잖아! 그런데 주인님 내외가 돌아가시고, 하트 공작님께서 아가씨의 후견인이 되자마자 바로 태도를 바꾸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그게 뭐 어때서? 그리고 괴롭혔다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내가 언제 아가씨를 괴롭혔다고 그래?”
최근 루미나의 총애를 받은 사만다가 당당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상대가 코웃음 치며 외쳤다.
“일부러 다락방에 쥐를 풀어놓은 적 있잖아! 그날, 아가씨가 엉엉 울면서 부인께 호소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여기 있어?”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제법 큰 소란이었으니 시간이 흘러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계모인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이 완벽하게 관리하는 저택에서 쥐 같은 게 나올 리 없다며 루미나를 크게 혼냈다.
어린 루미나가 잔뜩 겁에 질려서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데도 말이다.
단순히 장난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감정이 선명히 새겨져 있건만 그녀는 루미나를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하며 매를 들었다.
결국 그날, 루미나는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다.
이곳에 고용된 하인들은 모두 그 광경을 목도했다.
그리고 외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