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님께서 절대 의원한테 상처를 보여주지 말라고 명령했잖아.”
“…….”
“아가씨 잘못이 아니라 순전히 네 잘못이었으니까 인정이 있다면 연고라도 몰래 넣어 줄 수 있는데 입 딱 다물고 있었지?”
“하, 하지만……! 마님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떻게 그러니?”
“그때 슬쩍 아가씨를 보니까 어떤 애가 연고를 준 것 같던데. 너는 아니었나 봐?”
“그러는 너는! 너는 아가씨한테 잘해준 줄 알아?”
비웃음을 당한 사만다가 흥분했는지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곧바로 폭로가 이어졌다.
“아가씨가 좁은 방으로 처음 옮겼을 때, 우리가 청소해 줬잖아. 그런데 넌 그때 어땠니?”
“내가 어땠는데!”
“와, 이것 봐. 일상이었나 봐? 기억도 못 하고.”
공격하는 입장이 되자 기세등등해진 하녀가 말했다.
“청소하는 척하면서 구정물을 엎지르고 도망친 거 기억 안 나? 그때 한참을 깔깔대며 웃었잖아. 전부 아가씨께서 치울 거라면서.”
“…….”
“그런 네가 친근하게 굴면 아가씨께서 얼마나 어색하겠니.”
“아가씨께서도 생각이 없겠어? 전부 용서했으니까 날 곁에 두는 거지!”
두 번째 부인의 묵인으로 그동안 덮어놨던 악행들이 둑이 무너진 댐처럼 그 자리에서 쏟아졌다.
“아냐! 난 그런 적 없어!”
분위기는 점점 더 과열되어 하녀들끼리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 시작했다.
다들 저지른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같이 머리를 잡으면 잡았지.
“당시에는 아가씨께서 마음이 여려서 그냥 넘어갔는데……!”
“그러면 너는? 너는 떳떳하니?!”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하녀가 새파랗게 질린 채로 들어왔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이 혼란 속에서도 놀라지 않았다.
“얘, 얘들아!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갑작스러운 동료 하녀의 외침을 듣고 하녀들이 상대의 머리채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돌렸다.
“뭔데?”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기만 해 봐!”
“그, 그게 아가씨가……!”
사나운 눈길이 우다다 꽂혔다.
순간 기가 죽었는지 소식을 전하러 온 하녀가 입을 다물었다.
성질 급한 하녀들이 그녀를 다그쳤다.
“아가씨가 왜?”
“빨리 말해! 지금 급한 거 안 보여? 아악! 은근슬쩍 잡아당기지 마!”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다.
제 머리채를 잡은 상대가 슬쩍 힘을 주자 하녀가 버럭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내려칠 것 같았다.
다른 의미로 또 새파랗게 질린, 소식을 전하러 온 하녀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가씨께서…….”
이어지는 뒷얘기를 듣자마자 하녀들은 모두 쥐고 있던 머리채를 황급히 놓았다.
분노만이 가득했던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새겨졌다.
비상이었다.
***
루미나의 방으로 들어가니 조제프와 테레사 그리고 하녀장과 집사가 버티고 서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하녀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루미나에게로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으신가요?”
“아가씨!”
의자에 앉아 있던 루미나가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그런 루미나의 옆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있었다.
외부에서 온 손님인지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한동안 뛰는 건 무리입니다. 가벼운 걸음도 되도록 조심하시고요. 그 외에도 문제가 많으니 식사도 제때 챙기세요.”
“네, 알겠어요. 의사 선생님!”
씩씩하게 대답한 루미나가 빙긋 웃었다.
아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다리뿐만 아니었다. 얼굴에도 자잘한 상처가 생겨서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이는 등.
여기저기 난리도 아니었다.
“그러면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네. 제가 꼴이 이래서 배웅을 하기는 힘들 것 같네요. 아, 미아. 네가 의사 선생님을 배웅해 줘.”
“……네, 알겠습니다.”
대화에 끼지 못한 하녀들 중 하나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됐습니다. 저 혼자 갈 수 있으니 아가씨의 친절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싸늘하게 하녀들을 쳐다본 의사가 짐 꾸러미를 정리하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루미나에게 달려가서 속 빈 염려의 말을 쏟아낼 때가 아님을 눈치챈 하녀들이 얌전히 서 있었다.
의사가 벽에 딱 붙은 채로 줄줄이 서 있는 하녀들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이곳은 하녀 관리를 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쯧.
그들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의사가 혀를 차며 방을 나갔다.
그제야 하녀들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다.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싸우느라 산발이 된 머리. 단정치 못한 옷.
얼마나 격하게 싸웠는지 옷자락이 찢어진 하녀도 간혹 있었다.
난간이 무너지면서 루미나가 그대로 굴러떨어진 탓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황급히 달려오느라 정리를 하지 못했다.
때문에 누가 봐도 ‘나 싸웠소’라고 외치는 듯한 꼴이었다.
명문가의 하녀로서 결코 보여서는 안 될 모습이었다.
이런 추레한 꼴을 외부인에게 보였다는 사실을 늦어도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하녀들이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혔다.
“다들 어디 있었어? 아무리 불러도 오지 않길래 나는 오늘 무슨 날인 줄 알았지 뭐야.”
뒤늦게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하녀들은 해맑은 루미나의 목소리를 들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소녀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전히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하지만 루미나가 한 말의 속뜻만큼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아, 그게…….”
“몇 번이나 큰 소리로 너희를 불렀어. 너희가 정말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아무도 날 도와주러 오지 않았지.”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힐 만큼 싸우느라 바빴으니 루미나의 부름을 제대로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본인들이 업무 시간에 해선 안 될 짓을 했다는 경각심 정도는 있었던 터라 소식을 듣자마자 후다닥 달려오기 바빴던 거고.
“크흠흠.”
그때, 루미나의 근처를 지키고 있던 조제프가 헛기침을 했다.
“이 층밖에 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삼 층이라도 됐다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
“…….”
“게다가 내가 루미나를 찾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방치된 채로 있었을 텐데. 대체 주인 보필을 어떻게 하는지!”
감정이 격해지는지 조제프가 점차 언성을 높여갔다.
“집사, 하녀장! 말해보게! 우리 멜칸 가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게야!”
“……면목이 없습니다.”
하녀장이 나서서 조제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미나가 고개를 저었다.
“숙부님, 전 괜찮아요. 사고였잖아요. 그리고 하녀들도 할 일이 있었던……. 윽.”
본인이 괜찮다는 걸 알리고 싶었는지 루미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경시할 수 없는 부상이었다. 다리를 절룩거리던 루미나가 끝내 제자리에서 쓰러졌다.
“루미나!”
조제프가 후딱 달려와서 루미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버럭 호통을 쳤다.
“담당 하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지? 딱 붙어서 루미나의 손발이 되지 않고 말이야!”
루미나의 담당 하녀는 하나가 아니었다.
사만다를 포함한 하녀들이 책임을 미루려는 것처럼 힐끔힐끔 서로의 눈치만 봤다.
“하녀장이나 집사도 문제네. 이런 부적격한 이들을 고용해서 쓰고 있다니. 두 사람의 자질이 의심될 정도야.”
비난의 화살은 하녀들뿐만 아니라 고용된 모든 이들에게 쏟아졌다.
“심지어 발코니의 난간이 부실하다는 것도 몰랐다니. 말이 안 되는 소리지.”
“…….”
“이번 일은 결코 넘어갈 수 없다. 하녀장과 집사를 포함해서 전부 이 집에서 나가는 게 낫겠구나. 루미나를 보필할 자격이 전혀 되지 않아!”
언뜻 들으면 팔불출이 할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조제프에게는 음습한 의도가 있었다.
사용인을 모두 해고해서 자신의 사람으로 채워 넣을 계획인 것이다.
그때까지 듣고 있던 테레사가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나섰다.
“멜칸 백작. 전원 해고라니. 그건 과한 처사가 아닐까 싶네요.”
“발레스 부인, 어디서 과한 처사라고 느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파지직-.
두 사람의 시선이 사납게 맞부딪쳤다.
안 그래도 사이가 좋지 않던 두 파벌의 대표였다.
이 싸움으로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난리 난 상황을 고요한 시선으로 지켜보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루미나였다.
‘해고 얘기가 나오면 고모님께서 나설 줄 알았지.’
랑슈스 가문의 하녀장은 고모와 연줄이 닿아 있었다.
은밀하게 랑슈스 가문의 대소사를 보고하는 스파이 역할도 겸했고.
본인 사람이 잘리게 생겼으니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었다.
‘전생에서 숙부가 집안의 고용인을 싹 다 갈아엎었지.’
그러면서 하녀장이 고모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루미나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그때의 대화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루미나는 한창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을 속으로 응원했다.
‘싸워라, 더 싸워라.’
이기는 사람이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승자는 멀뚱히 앉아서 이 사태를 구경하고 있는 루미나뿐이었으니까.
그녀를 제외한 모두가 패배자였다.
루미나는 자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조제프 덕분에 사용인들의 관리 부실로 다쳐버린 불쌍한 소녀가 됐다.
집사나 하녀장 그리고 하인들을 해고하라고 먼저 지시한 적이 없는 거다.
‘전생에 내 방처럼 지냈던 곳인데 난간이 부실하다는 것도 몰랐겠어?’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조제프가 찾아오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모두 계획된 행동인 것이다.
이게 바로 손 안 대고 코 풀기? 혹은 누워서 마들렌 먹기?
“멜칸 백작!”
“발레스 부인!”
다들 싸우고, 남 탓하기 바빠서 루미나가 씨익 웃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